
복장불량의 21살 청년
나는 그 시절 달릴때가
가장 무안했습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래도록 달린 거리는 아마도 11km 정도쯤 될것이다. 축구 A매치에서 가장 많이 뛰는 미드필더가 7~8km를 뛴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 축구장에서 내가 뛰는 거리는 고작해야 2~3km 남짓일것이다. 가장 긴 거리 11km는 10km 단축 마라톤에 참여하여 뛴 거리이다. 1km는 반환점을 역으로 도는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덤으로 주어진 거리이다.
단축 마라톤에 참가한 것이 대학 1년인지 2년인지 봄인지 가을인지는 가물가물하다. 하여간 어느해 공대 체육대회였다. 수업중인 교실에 선배들이 처들어와 체육대회 단체상을 먹어야 하는데 후배들이 참여도 안한다고 궁시렁거리고 급기야 세대가 어쩌느니 하며 거들먹거리는 소리가 싫어서 자원한 자리였다. 미리 지원한 학생들은 운동복에 반바지, 운동화등 마라톤에 필요한 복장을 갖추고 나왔지만 나를 비롯한 몇몇의 급조된 지원자들의 복장은 천태만상이었다. 당나라 군대였다. 양복바지, 구두, 남방. 그날의 복장이다. 뛰어야하나 말아야하나를 고민하는데 미리 지원한 친구녀석이 축구화를 빌려주었다. 아마도 사려깊은 배려였겠지만 아스팔트 위에서는 축구화보다 차라리 구두가 낫다는 것을 안것은 한참이 지나서이다. 하여간 스타트를 알리는 총성이 울리고 마라톤은 시작되었다.
중략 ( 하여간 뛰었다 )
대열의 후미에서 뒤쳐져 천천히 달리던중 대열을 잃어버렸고 결국 반환점을 거꾸로 돌아 가뜩이나 뒤쳐져 있던 위치가 거의 꼴찌로 전락하고 말았다. 반환점을 돌아 다시 시내로 나왔을때는 주변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학교 차량이 뒤쳐져 포기한 몇몇을 싣고 달리는 것을 보았으나 그래도 남아있는 자존심에 끝까지 뛰고자 했다.
마라톤을 위해 교통정리를 하던 경찰관들이 복귀해버린 시내를 하교길의 꼬마들과 신호등 지켜가며 계속 달렸다. 나를 올려다보는 꼬마들의 시선이 왠지 꺼림칙했다. 경찰관에게 두번정도 붙들려 검문을 받았다. 이유를 알수 없었다. 그러나 고개를 삐닥하게 하고 나를 훏어보는 경찰관의 눈길을 따라 나의 모습을 보았을때 경악했다. 단추를 세개 정도 풀어헤친 남방, 무릅까지 걷어올린 양복바지, 그리고 축구화... 술이나 약에 취한 놈으로 보기에도 지나침이 없는 모습이었다. 이것을 무아지경, 무인지경이라 해야하나.
그러나 어쩌랴. 이미 엎어진 물인것을. 그 꼴로 완주를 하고 학교 정문을 들어설때는 이미 다 정리하고 단체상까지 선정한 이후였다. 신호등 기다리고 경찰관에게 심문받고 시간이 그렇게 흐른것은 당연하리라. 결국 머릿수도 채우지 못한 것이다. 난 왜 뛴 것인가? 그래서 지금도 마라톤을 보면 그냥 맹목적이라는 생각만이 드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