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은 왜 하중근씨의 죽음에 대해서 침묵하는가?
많은 죽음을 보았지만, 건설노동자 하중근씨의 죽음만큼 억울하고, 침묵에 쌓여있는 죽음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누군가 나에게 하중근씨는 집회에 참가한 것이 아니라 동료에게 도시락을 건네주러 갔다가 밀리는 과정에서 사고가 난 것이라고 들리는 말을 들려주었다. 죽음에 대한 사진도, 자료도 없는 상태에서 그야말로 ‘가십거리’에 불과한 말인지도 모르지만, 이런 작은 말들부터 알고 싶은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찾아볼 수 있는 진실은 너무나 없다.
너무나 선량해 보이는 이 아저씨의 죽음이 마치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의 하나일 뿐이라는 듯이 무시하고 일상생활에 빠져드는 지식인들도, 그리고 시민단체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신문들이야 늘 그렇다고 하지만, 이 죽음만큼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죽음도 별로 없어 보인다.
1. 기원 : 노무현의 서민들
불과 2년 전,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한국형 뉴딜을 들고 나올 때 많은 시민단체와 심지어 한겨레 신문의 기자들까지 “경제는 어떻게 살려야 하는 것 아니냐?” 그리고 “막노동꾼도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그 2년 전에 지금 불법파업과 불법점거라고 몰리고 있던 이 일용직 건설노동자들을 위해서 도로도 짓고 행정수도도 이전해야 한다고 소위 바른말한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얼토당토 않게 건설한국의 구호를 들고 나오고, 이게 절차적 민주주의를 안정화시키는 일이라고 말했다.
지금 포항에서 임산부가 유산하는 일이 벌어지는 정도로 오고가는 시민들까지 폭도로 몰리고 있는 이들의 한 가운데에는 바로 노무현의 그 “서민들”이 한 가운데 서 있다. 이 사람들이 행복하고, 이들에게도 얼마간의 돈이 들어가야 한다고 “정부 재정자금 조기지출”을 얘기하던 것이 불과 2년 전의 일이다.
지금 노무현의 서민들, 바로 그 시절의 서민들이 소위 참여정권이라는 세력의 방패 앞에 외롭게 서 있는 중이다.
그때 바로 나한테까지 “경제를 아느냐”고 몰아붙이던 그 지식인들이 노무현 정권은 문제가 있다고 스스로 반성하는 척을 한다. 내 눈에는 다음 대선놀이에 또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해서 이미 기운이 빠진 것으로 판명된 노무현과의 선 긋기에 다름 아닌 것 같아 보인다. 진정으로 반성한다면 지금 지식인들과 그 당시 노무현 정부살리기에 앞섰던 시민단체들이 할 얘기는 노무현에게 종조목을 들이대는 일이 아니라...
억울한 죽음인 하중근씨의 죽음의 경위와 사인을 정확하게 해명을 하라는 요구를 해야하고, ‘경제적 죽음’으로 내몰리게 될 이 노동자들에게 손배소를 걸지 말 것을 요구해야 한다.
산 사람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지금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비록 허울만 남았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지식인들의 요구이다. 단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지금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그리고 단 한 가족이라도 경제적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지금은 지식인의 고해성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행동이 필요한 순간이다.
2. 하중근씨의 죽음은 지식인의 죽음이다
한 사회는 언제나 지식인이라고 이름붙여진 사람들에게 예우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보면서, 그들에게 적절한 경제적 대우를 한다. 머리 좋고 위대하신 분이라서 그렇게 예우하는 것이 아니다. 위기의 순간에 약자들을 대변하거나 그들 앞에 몸을 던질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들을 예우하는 것이다.
방패의 패킹마저 던져버리고 생활인이 전투경찰 앞에 맨 몸으로 서 있게 되는 상황은 기본적으로 지식인들에게 그리고 학자들에게는 부끄러움이다.
원래는 정부와 생활인 사이의 갈등에 지식인과 학자라는 하나의 안전선이 그어져 있어야 한다. 그래서 행동하기 전에 말 즉 토론으로 해결하고, 몸이 움직이기 전에 머리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런 일들을 하라고 학자들을 만들어놓고 월급도 주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 마지막 1년, 끝까지 내몰린 생활인들이 “정의의 방패”임을 자처하는 전투경찰의 방패 앞에 알몸으로 내몰려서 서게 될 일이 더 많아질 것이고, 이미 사라져버린 목숨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많은 목숨들이 이 정권의 제단에 올려질 것이다. 불 보듯이 뻔하지 않은가?
이 가운데에 지식인들이 안전지대이든 아니면 바리케이드이든, 혹은 ‘고독한 요구자’이든, 그런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한다.
하중근씨의 죽음을 보고도 “저건 절차상 잘못된 폭도에게 벌어진 비극적 사건일 뿐이야”라고 말한다면 앞으로 우리 사회가 짊어질 수많은 “배고프다”는 아우성들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달려간 고부의 민중들이 난을 일으키면서 언제 일본 물러가라고 혹은 고종 물러나라고 하였던가?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 한 마디이다.
“배고프다.”
가깝게는 친구에게 도시락이라도 건네주러 나섰다가 죽었던 고 하중근씨의 사건에서 아직도 우리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연말의 농민들이 죽음까지 이들이 외쳤던 소리는 정말 단 한 마디이다.
“배고프다.”
“배고프다”고 민중들이 길거리로 나서기 시작하는 순간이 우리 역사에서 언제나 난의 역사였고, 지금은 고부민란 이후로 백 여년만에 생활인들이 길거리로 나서는 순간이다.
이제 그들이 역사 속에서 이 시기의 지식인들에게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너희들은 배부르니? 나는 배고픈데...”
3. 역사는 계속된다
연말, 여의도에 모인 농민들은 각지에서 서울로 모여들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아직은 국회와 정부에 할 말이 있던 시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배고픈 사람들이 서울로 자비를 들여서 올라왔다.
이제 더 이상 배고픈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들지 않는다. 포항의 건설노동자 사건은 그래서 역사의 전환점이다. 그들은 더 이상 서울로 모이지 않고, 밥이라도 줄 능력이 있는 ‘창고’와 ‘관아’로 모여드는 것이다. 포스코에 모였던 건설노동자 사건이 사건인 것은, 정부에 아무리 말해봐야 혹은 국회에 아무리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 변화는 엄청난 변화이다.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배고프다”고 달려간 농민들과 포항에 모였던 건설노동자는 다른 점이 전혀 없다. 본질은 “배고프다”이고 그들이 원한 것은 민주주의나 절차 혹은 정의 같은 고상한 것과는 전혀 차이가 없이 “밥 사먹게 돈 좀 줘라”는 단 한 마디였다.
2006년 8월, 대한민국은 지금 민란 전야이다. 배고프다는 백성들을 왕의 포졸들이 “집에 가라”고 창으로 밀어붙였는데 그 중에 선량한 한 사나이가 맞아 죽고, 안타깝게 구경하던 임산부가 아이를 유산하게 된 사건이 현재의 상황이다. 조선조에서도 배고프다고 하는 백성들을 초기부터 역도로 몰아붙이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그러고 있다. 게다가 양반집 정원이 몰상식하게 몰려든 백성들에 의해서 망가졌다고 초가삼간과 전답을 전부 팔아서 양반에게 돈을 물어줘라고 하고 있다. 그것이 다음주부터 시작될 손배소의 본질이다.
그나마 전셋집이나 월세집의 보증금까지 다 뺏기고, 평생을 벌어도 1/10도 채 갚지 못할 수 십억원의 손배소를 등에 엎고 살게 될 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걸인이 되거나 산적이 되는 일 밖에 더 있겠는가?
그야말로 ‘어린 백성’이 배고프다 말하고 싶어도 말할 길이 엎어서 우 몰려간 것이 포항의 포스코 앞마당이다. 그 앞자리에서 사람이 죽어나가고, 아이가 죽어나갔는데, 민주주의? 현명한 선택, 한미 FTA?
조선조 같았으면 사림의 유생들이 줄상소를 올리고, “어린 백성을 보살펴 살피시옵소서”라고 경희궁 앞에 돗자리를 깔고 목날아갈 각오를 하고 목놓아 울고 있을 순간이다. 정승들이 덕이 없음을 하늘에 목 놓아 고하며 석고대죄를 드려야 할 상황이다.
지금은 가부장제의 수호자로 몰릴대로 몰린 서원들이지만 조선이 나라다왔을 때 백성들이 배고프다고 할 때 서원의 유생들은 “굽여 살피옵소서”라고 줄상소를 올렸었다.
민란의 역사가 다시 반복되어야 진정 이 땅의 역사는 한 발 더 나아가게 된단 말인가?
4. 측은지심과 염치지심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측은한 마음이 들지 않으면 축생과 같다고 했다. 어쩌면 5대째 가난했을지도 모른, 철종 때부터 단 한 번도 마음 편하게 살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한 건설노동자가 죽었다. 어찌 이리도 측은지심이 없는가? 하중근씨의 집안도 가난했지만 일제를 버텼고, 6.25도 버텼고, 조국근대화도 버텨서 21세기로 넘어온 집안이다. 그 집안의 아직 결혼도 하지 못한 40대 자식이 죽었는데, 불법노동자라는 한 마디 낙인으로 딱하다는 마음이 드는 것은 사람이 응당 가지게 되는 측은지심이다.
신문사의 칼럼에서 각종 매체에 자기 프로를 가지고 있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공헌으로 다들 한 자리씩 차지하고 간만에 집에 월급봉투 좀 가지고 가는 게 노무현 정부 후반기의 소위 민주화 투사들에게 한 자리씩 주는 시대 유행 아닌가? 지금 높은 자리에 있는 자칭 지식인 그리고 각 대학에서 옛날식으로 치면 대감 대우 받으면서 교수대감 노릇하는 학자들, 당신들은 지금 행복한가?
옛날로 치면 당상관 자리에서 대감 노릇하는 지식인들이여, 어찌 그리도 염치지심이 없는가! 국민들의 세금과 시민들이 모아준 돈으로 살아가는 당상관들이여, 대감들이여!
부디, 측은지심과 염치지심을 회복하고, 왕에게 상소라도 올려주시라.
포항의 노동자들의 손배소만은 안된다고, 산 사람이라도 살리자고, 상소라도 울려주시라.
백성들은 오래된 경제 가뭄에 전답옥토는 팔아버린지 오래이고, 이미 신용불량자된 지아비를 대신해 지어미들이 신용불량자가 되어있고, 부모의 빚을 대신 갚아 신용불량자가 된 저들의 아이들은 아예 취직도 못하고 도탄에 빠진지 오래이다.
그들이 배고프다고 몰려든 것이 측은하지 않은가? 그들에게 “집이라도 팔아서 갚으라구해”라는 가혹한 손배소만이라도 막아주어야 하지 않는가? 사람 사는 사회에서 이런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불쌍한 일이 벌어져서는 안된다.
하중근씨의 주검의 피가 채 마르지도 않았는데, 손배소 소송을 하겠다는 현 상황이 어찌 사람사는 사회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인가? 조선조에서도 이런 일들은 일찍이 벌어진 적이 없다.
당상관들과 대감들이 왕과 대선놀음 하는 동안에 얼마나 더 많은 백성들이 피를 흘려야 하는가? 대한민국 생활인들의 눈에서 흐르는 이 눈물이 언제나 마르게 될 것인가! 민중이든, 농민이든, 노동자이든, 비정규직이든, 이들도 다 어린 백성들이고, 생활인들이다.
당상관과 대감들, 당신들을 이 사회는 지식인이라고 부른다. 지금 이 사회에 백성들의 피라도 막아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은 당신들 밖에 없다.
당신들이 행동하지 않으면, “나는 배고파”라고 백성들이 직접 움직이게 된다.
그걸 우리 역사에서는 민란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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