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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호시노 미치오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우리는 수없는 풍경에 부딪히며 살아가고 있다. 그 무한한 풍경 가운데의 어느 한 순간의 풍경이 느닷없이 어느 순간의 나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거의 신비에 가까운 일이다. 나는 언젠가 어느 명승지에서 오히려 풍경을 만나지 못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은 단지 일반적인 아름다운 경치에 지나지 않았다. 그 경치들은 나의 시각을 자극했지만 그것들은 그냥 흘러가버렸다. 내가 이름 없는 한 풍경을 만나게 되는 것은, 내가 풍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풍경이 어느 순간의 나를 주박하고 마는 것이다."
허만하 시인의 이 글귀가 떠올랐다. 십대 후반에 알래스카의 사진 한 장에 사로잡혀 사십대에 불곰의 습격으로 자연으로 돌아가기까지 알래스카의 바람이, 전설이 되어버린 호시노 미치오의 삶을 바라본다. 아, 그의 사진이 그토록 편안하게 느껴진 것은 피사체와 작가가 서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풍경이고 자연이었던 이유인가보다. 그가 알래스카를 카메라에 담은 것이 아니라 알래스카의 자연이 그를 풍경속에 담아둔 것이리라. 그러기에 빙설을 걸어가는 북극곰의 등짝에서 묻어나는 한없는 고독이 작가의 그것으로 느껴지기에 충분했으리라.
그래, 인간의 삶도 풍경이다. 다만 인간이 그것을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무한한 자연속 한부분으로서의 삶이 아닌 지배하고 소유하여야할 대상으로서 자연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풍경 밖으로 튕겨져 나오는 것이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그토록 갈망하면서도 바람에게서 그 길을 찾고자 하지 못하는 삶은 풍경밖의 삶이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삶의 시각은 협소할수 밖에 없다. 그 협소한 시각이 결국 자연을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열등감의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풍경속의 삶이라지만 살갗이 스치는 구체적인 삶의 이야기들이 빠지면 뭔가 허전하다. 실제 그는 자연의 풍경이 아니라 자연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서구문명과 접한 대부분의 원주민들이 그러하듯 알래스카 또한 소유냐 존재냐로 대변되는 가치관의 혼란속을 나아가고 있다. 작가처럼 알래스카의 풍경속으로 걸어들어간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치관의 충돌속에 폭발하듯 풍경 밖으로 튕겨져 나온 원주민이 있다. 젊은이들의 높은 자살율, 유전으로 하나씩 파괴되는 삶의 터전...어쩌면 제목에서 말하는 바람은 알래스카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의 표현일수도 있다. 베링해를 건너간 원시의 어느 시대부터 불어닥친 바람이 알래스카에서 생을 마친 작가를 거쳐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에는 누군가에게 전해질지. 그 바람이 전하는 풍경과 진실앞에 우리는 부끄럽지 않은지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