膳友辭(선우사)

                   -백석

 

낡은 나조반에 흰 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아서

쓸쓸한 저녁을 먹는다.

 

흰 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아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 밑 해정한 모래 틈에서 하구 긴 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 뼈가 굵은 탓이다.

바람 좋은 한 벌판에서 물닭이 소리를 들으며 단 이슬 먹고 나이들은 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 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라난 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어졌다.

착하디착해서 세괏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 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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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08-25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누아님 / 멋진 시 고마워요. 백석 시인은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라는 그의 싯구와도 너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누아 2006-08-25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취할 때, 텔레비전도 없는 작은 방에서 자취할 때, 밥을 먹으면 손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게 슬로우모션처럼 느껴졌어요.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구나, 밥을 씹는구나...그땐 외로움이란 단어가 내 안에 없어서 그게 외로워서 그런 건지 몰랐어요. 그때 이 시를 봤어요. 빙그레 웃었어요.

잉크냄새 2006-08-30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누아님 / 지금 실천문학사의 <백석 전집>을 읽고 있는데, 생각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아요. 저도 이 시 읽고는 빙그레 웃었지요.^^
 

벌이 내게 와서

                                                         -강영환

 

풀밭에 누웠더니 벌 한마리가 귓가에 와 멤돈다 꿀을 만드는데 내게서 가져갈 게 있는지 쫓아 내어도 윙윙 소리내어 멤돈다 심하게 쫓다가 침 맞을까하여 가만히 있었더니 귓볼에 내려앉아 살그머니 귓속말 한마디 일러 주고 떠난다 나는 그 말을 차마 여기 옮길 수가 없다 나는 그간 침 맞을 짓을 얼마나 했는지 알 수가 없으므로 벌이 내게 와서 일러 준 말 입을 다문다

 

>>같이 사는 남자는 이 시집을 1995년에 샀군요. 그리고 저는 2006년에야 처음으로 강영환의 산문시집의 문을 엽니다. 말벌이 어떻게 들어왔는지 창가에서 떠나질 않고 돌진하며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무서워서 혼났습니다. 소리가 어찌나 큰지 빚쟁이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았어요. 사람이 온몸으로 돌진하여 부딪치면 얼마만큼의 소리가 날까요. 근데 아무리 문을 열어놓아도 이 녀석 나가질 않네요. 그러더니 어느 사이 사라졌어요. 또 나타나면 어쩐다지요. 시인들도 참 뻥쟁이들이잖아요. 벌이 귓볼에 내려앉다니요. 그 윙윙거림을 어떻게 참지. 모기도 아니고. 그나저나 벌이 시인에게 뭐라 했길래 차마 옮길 수도 없는 말을 시로 썼을까. 뭐라고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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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6-08-24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너 사람이지?
2. 너는 꿀도 없냐?
3. 꿀도 없는 게 사람이야.

너무 꿀꿀한가.

물만두 2006-08-24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불면 쏜다!

돌바람 2006-08-24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킥킥.

비자림 2006-08-24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봐, 덩치 큰 친구!
혹시...내 여자친구 못봤어?
이쪽으로 왔는데?

비로그인 2006-08-24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그러게 뭐라고 했을까요
어쨌든 시인들이 뻥쟁이라는데 새삼스럽게 공감.
(이렇게 오랜만에 또 인사 전하고 갑니다..^^)

비자림 2006-08-24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잉크냄새님, 안녕하세요?
전 그만.. 돌바람님 서재인 줄 알고 쫑알거리고 갔네요. 이제야 보니..
처음 와서 인사도 없이 죄송하와요.^^ 근데 이게 무슨 조화다냐????

파란여우 2006-08-24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앙? 돌맹이님 서잰줄 알고 지원이가 벌쐤어? 하고 물어보려더니 지붕이...지붕이...
그러니까 내 앵벌이 여기로 도망쳐 왔구만!
아, 요새 앵벌이넘은 믿을 수가 있어야지.

울보 2006-08-24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돌바람님 서재인줄 알고 반가워서 얼른 달려왔는데,
그나저나 어쨌든 반갑습니다,

이누아 2006-08-25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삼촌이 전업으로 벌을 치신 적이 있어요. 아카시아 나무가 많은 우리집 근처까지 오시면 산에 천막을 치고, 벌을 쳐요. 저는 그 천막에서 잔 본 적도 있어요. 살면서 벌에 두 번 물려 봤지만 그래도 벌이 무섭지 않은 건 그때 벌들과 함께 지낸 탓인지도. 손바닥에 벌을 올려 놓으면 내려 앉지 않고 손바닥 위에서만 맴돌아요. 가만히 보고 있으면 시간과 공간을 떠난 듯한 느낌이 들어요.^^ 돌바람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꿀도 없으면서, 아무 것도 빼앗아 가지도 않을 건데, 왜 그리 벌을 못마땅해 할까요? 벌은 관심도 없는데, 그냥 지나는 길인데. 위협하지만 않으면 되는데.

잉크냄새 2006-08-25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바람님 / 아, 역시나 한바탕 삐쳐버리는것이 효과가 큽니다. 몇군데 더 돌아다녀봐야겠어요. 시보다 더 멋진 님의 감상평까지 곁들여주시다니, 이거 영광무지로소이다.
물만두님/역시 추리의 귀재다우시네요.^^
비자림님/저도 제 서재인줄 님 댓글을 보고 알았어요. 반가워요.
사야님/시인들이 뻥쟁이이기는 한데, 그 뻥이 하도 시적이니 시인이겠죠. 제가 그렇게 뻥을 치면 단순 뻥이고요.ㅎㅎ
여우님/아니, 여우님마저 헷갈리시면 어떻게 합니꽈!! 여우님 서재로도 한바탕 삐치러 갈랍니다. 그러기 전에 어여어여~~
울보님/ㅎㅎ 저도 제 페이퍼를 열기가 처음이니 헷갈리네요.^^
이누아님/전 절벽위에서 벌집을 쑤시고 그 아래로 다이빙을 시도했는데...그만 배치기를 해서 물위에 두둥실 떠오르던 기억이 나네요. 마지막 댓글, 이누아님의 해석은 역시나 싶습니다.^^

이누아 2006-08-25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이 늘상 벌에게서 꿀을 훔쳐가니, 아마도 사람들은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벌만 보면 벌받을까 떨게 되나 봐요. 벌을 치는 걸 보면 벌들이 가여워요. 얼마나 열심히 꿀을 모아 오는지, 얼마나 한방에 그 꿀들을 앗아가는지...혹시 그 귀속말, "내 꿀 내 놔" 아닐까요? 그런 애들 집을 왜 쑤시고 다니세요?^^

잉크냄새 2006-08-30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누아님/심하게 반성하고 있어요. 괜한 객기의 표시였겠지요.^^ 벌의 말은 아마도 " 뭐, 이 생명은 향기도 없어~~~" 가 아닐런지요.
 
 전출처 : 검둥개 >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도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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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08-21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동안 "가난하고 외롭고 맑고 쓸쓸하니" 라고 외우고 다녔다.
맑은 것은 높은 것이니 의미야 통한다 하겠다.

겨울 2006-08-21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시를 읽으면 마음이 사정없이 울렁거립니다.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이러한 감성이 아직은 남아 있어 기쁘다 할까요.

잉크냄새 2006-08-22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기만 하여도 울렁이면 그건 열아홉 순정이랍니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뒤로 또 그리 가슴 저린 문장이 이어지고 있었군요.^^
 
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우라사와 나오끼의 <몬스터>에 보면 60년 동안 숲에게 용서를 구하는 노인의 이야기가 짧게 등장한다. 청년시절의 그는 맑은 사람이었다. 그가 거니는 숲속은 온갖 새들의 천국이었고 누구보다 맑은 심성의 그에게 새들이 몰려들어 앉곤 했다. 2차 대전의 발발로 게슈타포가 된 그는 당국의 명령으로 어느 청년을 쫓게 되었고 그가 거닐던 바로 그 숲에서 도망자를 사살했다. 그 이후, 새들은 더 이상 그에게 다가오지 않았고 노래를 부르지도 않았다. 그 이후 청년은 60년 동안 매일 숲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장영희 교수의 이 책도 그런 용서와 희망의 책이 아닐까 싶다. 타인에 대한 용서와 희망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한 그것이다. 자아와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영혼마저 빼앗겨버린 우리들의 용서와 아직 그 끝자락을 놓지않고 있는 희망에 대한 글이다. 숲에게 용서를 구하는 노인처럼 우리도 저 멀리 절름거리며 뒤쳐지는 삶과 영혼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매개체가 문학작품이다. 현실의 문제에서 문학작품의 세계로, 다시 현실의 깨달음과 희망으로 돌아오는 글의 구성은 문학의 가교 역활을 잘 보여주는 단면이다.

맑고 정갈한 글의 장영희 교수가 걸어간 문학의 숲속길을 따라 한번 걸어가볼 일이다. 어느 한곳 웅크리고 있던 나의 영혼이 나의 그림자와 더불어 따라갈 것이다. 새들이 나의 어깨에 다시 앉는 그곳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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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8-19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두고 아직 못 읽었네요. 선선해지면 읽어야겠어요. 올여름 왜 이리 일에 밀려사는 것 같은지...^^

파란여우 2006-08-19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숲 속에서 님을 기다리다 잊고 있던 처자 반가워 덥썩 끌어 안습니다.
어맛, 책을 끌어 안았다구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06-08-21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도장만 찍어놓은 책.:)

잉크냄새 2006-08-22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 선선해지는가 싶더니 다시 폭염이네요. 선선해지는 독서의 계절, 양서 많이 읽으시길 바랍니다.
여우님 / 이 책, 기억나시죠? 요즘은 책이 손에 잡히지 않는지라, 이리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읽었지 뭡니까.
사람님 / 눈도장을 찍으셨다니 이제는 책장을 넘기실 차례군요.^^

2006-08-23 06: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6-08-23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 네, 다시 사진속의 구렛나루를 보고 왔어요. 역시 제가 눈썰미가 떨어져서요. 풍경은 최대한 빠른 시일내에....
 
 전출처 : waits > [펌.하꿈] 지식인은 왜 하중근씨의 죽음에 대해서 침묵하는가?

 

지식인은 왜 하중근씨의 죽음에 대해서 침묵하는가?



많은 죽음을 보았지만, 건설노동자 하중근씨의 죽음만큼 억울하고, 침묵에 쌓여있는 죽음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누군가 나에게 하중근씨는 집회에 참가한 것이 아니라 동료에게 도시락을 건네주러 갔다가 밀리는 과정에서 사고가 난 것이라고 들리는 말을 들려주었다. 죽음에 대한 사진도, 자료도 없는 상태에서 그야말로 ‘가십거리’에 불과한 말인지도 모르지만, 이런 작은 말들부터 알고 싶은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찾아볼 수 있는 진실은 너무나 없다.

너무나 선량해 보이는 이 아저씨의 죽음이 마치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의 하나일 뿐이라는 듯이 무시하고 일상생활에 빠져드는 지식인들도, 그리고 시민단체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신문들이야 늘 그렇다고 하지만, 이 죽음만큼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죽음도 별로 없어 보인다.

 

1. 기원 : 노무현의 서민들

불과 2년 전,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한국형 뉴딜을 들고 나올 때 많은 시민단체와 심지어 한겨레 신문의 기자들까지 “경제는 어떻게 살려야 하는 것 아니냐?” 그리고 “막노동꾼도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그 2년 전에 지금 불법파업과 불법점거라고 몰리고 있던 이 일용직 건설노동자들을 위해서 도로도 짓고 행정수도도 이전해야 한다고 소위 바른말한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얼토당토 않게 건설한국의 구호를 들고 나오고, 이게 절차적 민주주의를 안정화시키는 일이라고 말했다.

지금 포항에서 임산부가 유산하는 일이 벌어지는 정도로 오고가는 시민들까지 폭도로 몰리고 있는 이들의 한 가운데에는 바로 노무현의 그 “서민들”이 한 가운데 서 있다. 이 사람들이 행복하고, 이들에게도 얼마간의 돈이 들어가야 한다고 “정부 재정자금 조기지출”을 얘기하던 것이 불과 2년 전의 일이다.

지금 노무현의 서민들, 바로 그 시절의 서민들이 소위 참여정권이라는 세력의 방패 앞에 외롭게 서 있는 중이다.

그때 바로 나한테까지 “경제를 아느냐”고 몰아붙이던 그 지식인들이 노무현 정권은 문제가 있다고 스스로 반성하는 척을 한다. 내 눈에는 다음 대선놀이에 또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해서 이미 기운이 빠진 것으로 판명된 노무현과의 선 긋기에 다름 아닌 것 같아 보인다. 진정으로 반성한다면 지금 지식인들과 그 당시 노무현 정부살리기에 앞섰던 시민단체들이 할 얘기는 노무현에게 종조목을 들이대는 일이 아니라...

억울한 죽음인 하중근씨의 죽음의 경위와 사인을 정확하게 해명을 하라는 요구를 해야하고, ‘경제적 죽음’으로 내몰리게 될 이 노동자들에게 손배소를 걸지 말 것을 요구해야 한다.

산 사람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지금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비록 허울만 남았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지식인들의 요구이다. 단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지금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그리고 단 한 가족이라도 경제적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지금은 지식인의 고해성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행동이 필요한 순간이다.

 

2. 하중근씨의 죽음은 지식인의 죽음이다

한 사회는 언제나 지식인이라고 이름붙여진 사람들에게 예우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보면서, 그들에게 적절한 경제적 대우를 한다. 머리 좋고 위대하신 분이라서 그렇게 예우하는 것이 아니다. 위기의 순간에 약자들을 대변하거나 그들 앞에 몸을 던질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들을 예우하는 것이다.

방패의 패킹마저 던져버리고 생활인이 전투경찰 앞에 맨 몸으로 서 있게 되는 상황은 기본적으로 지식인들에게 그리고 학자들에게는 부끄러움이다.

원래는 정부와 생활인 사이의 갈등에 지식인과 학자라는 하나의 안전선이 그어져 있어야 한다. 그래서 행동하기 전에 말 즉 토론으로 해결하고, 몸이 움직이기 전에 머리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런 일들을 하라고 학자들을 만들어놓고 월급도 주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 마지막 1년, 끝까지 내몰린 생활인들이 “정의의 방패”임을 자처하는 전투경찰의 방패 앞에 알몸으로 내몰려서 서게 될 일이 더 많아질 것이고, 이미 사라져버린 목숨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많은 목숨들이 이 정권의 제단에 올려질 것이다. 불 보듯이 뻔하지 않은가?

이 가운데에 지식인들이 안전지대이든 아니면 바리케이드이든, 혹은 ‘고독한 요구자’이든, 그런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한다.

하중근씨의 죽음을 보고도 “저건 절차상 잘못된 폭도에게 벌어진 비극적 사건일 뿐이야”라고 말한다면 앞으로 우리 사회가 짊어질 수많은 “배고프다”는 아우성들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달려간 고부의 민중들이 난을 일으키면서 언제 일본 물러가라고 혹은 고종 물러나라고 하였던가?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 한 마디이다.

“배고프다.”

가깝게는 친구에게 도시락이라도 건네주러 나섰다가 죽었던 고 하중근씨의 사건에서 아직도 우리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연말의 농민들이 죽음까지 이들이 외쳤던 소리는 정말 단 한 마디이다.

“배고프다.”

“배고프다”고 민중들이 길거리로 나서기 시작하는 순간이 우리 역사에서 언제나 난의 역사였고, 지금은 고부민란 이후로 백 여년만에 생활인들이 길거리로 나서는 순간이다.

이제 그들이 역사 속에서 이 시기의 지식인들에게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너희들은 배부르니? 나는 배고픈데...”

 

3. 역사는 계속된다

연말, 여의도에 모인 농민들은 각지에서 서울로 모여들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아직은 국회와 정부에 할 말이 있던 시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배고픈 사람들이 서울로 자비를 들여서 올라왔다.

이제 더 이상 배고픈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들지 않는다. 포항의 건설노동자 사건은 그래서 역사의 전환점이다. 그들은 더 이상 서울로 모이지 않고, 밥이라도 줄 능력이 있는 ‘창고’와 ‘관아’로 모여드는 것이다. 포스코에 모였던 건설노동자 사건이 사건인 것은, 정부에 아무리 말해봐야 혹은 국회에 아무리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 변화는 엄청난 변화이다.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배고프다”고 달려간 농민들과 포항에 모였던 건설노동자는 다른 점이 전혀 없다. 본질은 “배고프다”이고 그들이 원한 것은 민주주의나 절차 혹은 정의 같은 고상한 것과는 전혀 차이가 없이 “밥 사먹게 돈 좀 줘라”는 단 한 마디였다.

2006년 8월, 대한민국은 지금 민란 전야이다. 배고프다는 백성들을 왕의 포졸들이 “집에 가라”고 창으로 밀어붙였는데 그 중에 선량한 한 사나이가 맞아 죽고, 안타깝게 구경하던 임산부가 아이를 유산하게 된 사건이 현재의 상황이다. 조선조에서도 배고프다고 하는 백성들을 초기부터 역도로 몰아붙이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그러고 있다. 게다가 양반집 정원이 몰상식하게 몰려든 백성들에 의해서 망가졌다고 초가삼간과 전답을 전부 팔아서 양반에게 돈을 물어줘라고 하고 있다. 그것이 다음주부터 시작될 손배소의 본질이다.

그나마 전셋집이나 월세집의 보증금까지 다 뺏기고, 평생을 벌어도 1/10도 채 갚지 못할 수 십억원의 손배소를 등에 엎고 살게 될 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걸인이 되거나 산적이 되는 일 밖에 더 있겠는가?

그야말로 ‘어린 백성’이 배고프다 말하고 싶어도 말할 길이 엎어서 우 몰려간 것이 포항의 포스코 앞마당이다. 그 앞자리에서 사람이 죽어나가고, 아이가 죽어나갔는데, 민주주의? 현명한 선택, 한미 FTA?

조선조 같았으면 사림의 유생들이 줄상소를 올리고, “어린 백성을 보살펴 살피시옵소서”라고 경희궁 앞에 돗자리를 깔고 목날아갈 각오를 하고 목놓아 울고 있을 순간이다. 정승들이 덕이 없음을 하늘에 목 놓아 고하며 석고대죄를 드려야 할 상황이다.

지금은 가부장제의 수호자로 몰릴대로 몰린 서원들이지만 조선이 나라다왔을 때 백성들이 배고프다고 할 때 서원의 유생들은 “굽여 살피옵소서”라고 줄상소를 올렸었다.

민란의 역사가 다시 반복되어야 진정 이 땅의 역사는 한 발 더 나아가게 된단 말인가?

 

4. 측은지심과 염치지심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측은한 마음이 들지 않으면 축생과 같다고 했다. 어쩌면 5대째 가난했을지도 모른, 철종 때부터 단 한 번도 마음 편하게 살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한 건설노동자가 죽었다. 어찌 이리도 측은지심이 없는가? 하중근씨의 집안도 가난했지만 일제를 버텼고, 6.25도 버텼고, 조국근대화도 버텨서 21세기로 넘어온 집안이다. 그 집안의 아직 결혼도 하지 못한 40대 자식이 죽었는데, 불법노동자라는 한 마디 낙인으로 딱하다는 마음이 드는 것은 사람이 응당 가지게 되는 측은지심이다.

신문사의 칼럼에서 각종 매체에 자기 프로를 가지고 있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공헌으로 다들 한 자리씩 차지하고 간만에 집에 월급봉투 좀 가지고 가는 게 노무현 정부 후반기의 소위 민주화 투사들에게 한 자리씩 주는 시대 유행 아닌가? 지금 높은 자리에 있는 자칭 지식인 그리고 각 대학에서 옛날식으로 치면 대감 대우 받으면서 교수대감 노릇하는 학자들, 당신들은 지금 행복한가?

옛날로 치면 당상관 자리에서 대감 노릇하는 지식인들이여, 어찌 그리도 염치지심이 없는가! 국민들의 세금과 시민들이 모아준 돈으로 살아가는 당상관들이여, 대감들이여!

부디, 측은지심과 염치지심을 회복하고, 왕에게 상소라도 올려주시라.

포항의 노동자들의 손배소만은 안된다고, 산 사람이라도 살리자고, 상소라도 울려주시라.

백성들은 오래된 경제 가뭄에 전답옥토는 팔아버린지 오래이고, 이미 신용불량자된 지아비를 대신해 지어미들이 신용불량자가 되어있고, 부모의 빚을 대신 갚아 신용불량자가 된 저들의 아이들은 아예 취직도 못하고 도탄에 빠진지 오래이다.

그들이 배고프다고 몰려든 것이 측은하지 않은가? 그들에게 “집이라도 팔아서 갚으라구해”라는 가혹한 손배소만이라도 막아주어야 하지 않는가? 사람 사는 사회에서 이런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불쌍한 일이 벌어져서는 안된다.

하중근씨의 주검의 피가 채 마르지도 않았는데, 손배소 소송을 하겠다는 현 상황이 어찌 사람사는 사회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인가? 조선조에서도 이런 일들은 일찍이 벌어진 적이 없다.

당상관들과 대감들이 왕과 대선놀음 하는 동안에 얼마나 더 많은 백성들이 피를 흘려야 하는가? 대한민국 생활인들의 눈에서 흐르는 이 눈물이 언제나 마르게 될 것인가! 민중이든, 농민이든, 노동자이든, 비정규직이든, 이들도 다 어린 백성들이고, 생활인들이다.

당상관과 대감들, 당신들을 이 사회는 지식인이라고 부른다. 지금 이 사회에 백성들의 피라도 막아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은 당신들 밖에 없다.

당신들이 행동하지 않으면, “나는 배고파”라고 백성들이 직접 움직이게 된다.

그걸 우리 역사에서는 민란이라고 부른다.



조실  :  초록정치연대의 우석훈 정책실장의 글입니다 (저는 우석훈 실장님 글의 팬입니다. 물론 하소장님은 말할 것도 없구요 ^^;) 2006/08/14
하종강  :  저도 방송에서 이 일에 대해 한 마디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시민들은 이 일을 "노동자들의 과격하고 폭력적인 방식의 불법파업에 대한 자업자득 또는 인과응보"라고 냉담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은데, 이건 결코 정상이라고 볼 수가 없는 현상입니다.

나이가 환갑이 다 된 노동자들 2천여 명이 아흐레 동안이나 회사를 점거했고, 노동자 한 명이 죽고, 임신부가 유산을 하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 일이 벌어지기 전과 벌어진 다음에 우리 사회에 달라진 것이 전혀 없습니다. 백보를 양보해서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주의적으로 따져 본다고 해도 노동문제에 대한 이런 대처방식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닙니다.
  2006/08/15
답답  :  전 국민을 때려 죽이려나 봅니다. 2006/08/15
하종강  : 

포항 건설 노동자들 천여 명이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2006/08/15

 

 '하종강의 노동과 꿈' 홈페이지에서 퍼왔다. 원출처는 모르겠다. 난 우석훈 실장의 글을 별로 열심히 읽지는 않는 편인데, 이 글은 여러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사소한(?) 사실관계에서 내가 알고 있던 것과의 다른 부분들이 있기도 한데, 굳이 그걸 신경 쓰지 않아도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점잖고 진보적인' 지식인과 학자들도 이 글을 읽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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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6-08-16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찌지뽕! ^^
우아, 비 온다!
안녕, 잉크냄시님~

잉크냄새 2006-08-19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바람님 / 단 하루만에 완연한 가을날씨를 보이고 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