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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도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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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08-21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동안 "가난하고 외롭고 맑고 쓸쓸하니" 라고 외우고 다녔다.
맑은 것은 높은 것이니 의미야 통한다 하겠다.

겨울 2006-08-21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시를 읽으면 마음이 사정없이 울렁거립니다.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이러한 감성이 아직은 남아 있어 기쁘다 할까요.

잉크냄새 2006-08-22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기만 하여도 울렁이면 그건 열아홉 순정이랍니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뒤로 또 그리 가슴 저린 문장이 이어지고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