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프 1
캐서린 스토켓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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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으세요, 유지니아." 어머니의 규칙에 따라 가끔이라도 유지니아라는 본명으로 나를 불러준 사람은 콘스탄틴이 유일했다. "진짜 못난이는 가슴속에 살지요. 못난이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야비한 사람이거든요. 아가씨도 그런 사람일까요?"
"모르겠어요. 안 그런 것 같아요." 나는 훌쩍였다.
콘스탄틴은 내가 앉은 식탁 의자의 옆자리에 앉았다. 관절이 부어서 쩍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콘스탄틴이 엄지로 내 손바닥을 꾹 눌렀는데, 이건 우리 사이에서 들어봐요, 내 말 좀 들어봐요, 하는 신호였다.
"아침마다, 죽어서 땅에 묻힐 때까지 이렇게 다짐해야 해요." 콘스탄틴이 바투 붙어 있어서 그녀의 검은 잇몸까지 다 보였다. "자기 자신에게 물어봐야 해요. 저 바보들이 오늘 내게 지껄인 말을 믿을 것인가?"-110~1쪽

콘스탄틴이 자기 엄지를 내 손에 꾹 눌렀다. 나는 알아들었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백인을 두고 한 말이라는 것을 알 만큼은 나도 똑똑했다. 그래도 비참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아무리 잘 봐줘도 나는 못 생겼겠지만 그녀가 내게, 내가 그저 어머니의 백인 자식이 아니라 뭔가 다른 존재인 것처럼 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살면서 끊임없이 정치에 대해, 유색인에 대해, 여자로 사는 것에 대해 무엇을 믿으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콘스탄틴이 내 손에 자기 엄지를 꾹 누른 그 순간, 내가 무엇을 믿을지는 나 자신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111쪽

오, 비밀을 함께 나눌 사람이 있다는 건 참으로 짜릿한 일이었다. 나이가 비슷한 형제나 자매가 있다면 이런 기분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담배나 어머니의 눈을 피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당신이 기형적으로 키가 크고 머리가 곱슬곱슬하고 생김새가 특이하다는 이유로 당신의 어머니가 조바심치며 어쩔 줄 몰라할 때 누군가 당신을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누군가 말없이 눈빛으로, 나랑 같이 있으면 괜찮아요, 해주는 것이다. -114쪽

어느새 생각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상황까지 흘러간다. 저 백인 여자들이 우리가 저들에 대한 글을 쓴다는 사실을 알아내면, 저들이 어떤 사람인지 그 진실을 말한다는 사실을 알아내면, 결국 무슨 일이 생길지 나는 아주 잘 안다. 여자들은 남자들 같지 않다. 여자들은 방망이로 후려치지 않는다. 미스 힐리는 내게 권총을 들이대지 않을 것이다. 미스 리폴트가 내 집에 불을 지르지도 않을 것이다.
아니, 백인 여자들은 자기들의 손은 더럽히지 않는다. 저들은 마녀의 손가락처럼 뾰족하고 병원 쟁반에 가지런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예리한 치과용 기구들처럼 번쩍이는 도구를 쓴다. 그것으로 당신을 서서히 괴롭힌다. -318쪽

나는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간다. 평소에는 교회 내부보다 더 시원한데 오늘밤은 여기도 덥다. 사람들이 커피에 얼음을 넣는다. 나는 누가 왔는지 둘러보면서 미스 힐리의 의심을 아슬아슬하게 따돌린 것 같으니 더 많은 가정부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미 서른다섯 명이 거절했다. 아무도 살 사람이 없는 물건을 파는 기분이다. 키키 브라운의 레몬 향 나는 광택제처럼 부담스럽고 냄새나는 무언가를. 하지만 키키와 내가 같은 점은 나도 내가 파는 물건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우리가 하는 이 이야기는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것이다. -3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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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5-31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저 내일 이 책 지르려고 장바구니에 넣어놓긴 했는데(1일이잖아요!) 이 책 어떤가요, 이매지님? 좋아요?

이매지 2011-05-31 09:03   좋아요 0 | URL
1권 이제 한 100페이지 정도 남았는데요,
아 이제 슬슬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요.
<앵무새 죽이기>와 <올리브 키터리지>를 함께 맛보는 기분이랄까?!
(그나저나 벌써 1일이 다가오는군요!)

다락방 2011-05-31 10:02   좋아요 0 | URL
앵무새 죽이기와 올리브 키터리지를 함께요? !!!!

이매지 2011-05-31 22:43   좋아요 0 | URL
일단 인종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앵무새 죽이기>가 생각나구요,
하나의 마을에서 살아가는 저마다의 이야기라는 점이나 분위기가 <올리브 키터리지> 같아요.
오늘 퇴근길에 1권 다 읽었는데요, 일단 1권까지 읽고는 주저 없이 추천!
1일에 구입하세요!

2011-06-01 0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01 0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두 남자의 집짓기 - 땅부터 인테리어까지 3억으로 좋은집 시리즈
구본준.이현욱 지음 / 마티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지은 지 50년이 가까운 집에서 25년 가까이 살다보니 여기저기 손을 봐야 할 곳이 너무나 많다. 요즘 우리 집의 이슈는 계속 이 집에서 불편을 감수하며 살 것인가, 리모델링을 할 것인가, 아니면 아예 새로 지을 것인가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집에 대한 고민이 많아서일까. 땅부터 인테리어까지 3억이라는 깔끔한 표지의 <두 남자의 집짓기>가 눈에 들어왔다. 한겨레 신문의 구본준 기자의 글을 재미있게 읽어온 터라 겸사겸사 읽어보았다.

  아파트, 주상복합, 빌라, 단독주택 등 다양한 주거 형태 중에서 건축가인 이현욱과 건축기자인 구본준은 어린아이를 키우는 집이라면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이 가장 좋다고 이야기한다. 태생적으로 뛰어놀 수밖에 없는 아이들에게 "뛰지 마!"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게 하는 아파트보다는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다는 점에서 단독주택은 나이 든 노인들이 노후를 보내는 곳이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젊은 부부가 살아야 하는 곳이라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단독주택이 비싸다는 것. 하지만 두 남자는 단독 주택이 아파트와 비교해 그렇게 비싸지 않고, 아파트보다 싸게 살 수도 있다는  점을 이 책을 통해 보여준다. 직접 땅을 알아보러 다니고, 집을 짓을 짓기 시작해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완공을 하고 인테리어에 조경까지 해치우는 모습은 독자도 함께 땅콩집을 짓는 현실가능한 꿈을 꿀 수 있게 한다.

  물론 건축에 문외한인 일반 독자에 비해서 건축 관련 업자들의 도움을 알음알음 받기는 했고, 집을 짓는데 결국 든 돈은 7억 3천만원이 조금 넘었다는 점(애초에 제목에 내세운 3억도 한 가구당 3억이라는 의미였다) 등 다소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내게 적당한 자금이 갖춰져 있고 마음 맞는 사람이 있다면 과감하게 땅콩집을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들의 삶에 반했다. 땅을 사는 과정에서 알아두어야 할 점에서부터 실제 땅콩집을 짓는 공정과 땅콩집에서 1년 동안 살면서 느낀 점이나 관리비 등까지 제시해주는 점에 믿음이 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한 것은 첫째도 단열, 둘째도 단열이라는 점. 이 책을 읽으며 만약 집을 짓는다면 어떤 집을 지을 것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겨울이면 손이 곱을 정도로 추워서인지 단열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며 단순히 평수가 넓고 남에게 과시하기 좋은 삐까뻔쩍한 집이 아니라, 가족들이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고, 가족 각자의 프라이버시를 어느 정도 지킬 수 있는 그런 집. 그것이 진정한 '내 보금자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시간날 때 땅콩집 카페에도 들어가 땅콩집 그 후의 프로젝트와 추가 정보 등도 접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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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1-05-30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텔레비전에서도 나와서 궁금했어요

이매지 2011-05-30 17:47   좋아요 0 | URL
오전에 신문 보는데 오늘 신문에도 소개됐더라구요. ^^
이래저래 유명세인 것 같아요~

카스피 2011-05-30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아파트나 빌라는 너무 획일적이지요.하지만 도심에선 색다른 집을 짓기가 좀 힘들것 같더군요.

이매지 2011-05-30 22:49   좋아요 0 | URL
도심은 일단 땅값이 너무 비싸죠.
강북 쪽도 요새는 평당 1천은 가볍게 넘으니까요.

2011-05-30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31 0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상한 라트비아인 매그레 시리즈 1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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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책들에서 매그레 경감 시리즈가 출간된다고 했을 때 처음엔 갸웃했다. 세계문학전집, 도끼 전집, 프로이트 전집 같은 무게 있는 전집을 주로 출간해왔기에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현재 장르문학 가운데 열린책들에서 수키 시리즈를 펴내고 있긴 하지만 이건 75권이나 되는 대장정이 아니니 논외로 하고. 어쨌거나 어딘가에서 내주길 기대했던 엘러리 퀸 전집이 아니라는 사실은 아쉬웠지만 또 하나의 장르문학 시리즈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마냥 설렜다. 4월 출간예정이었던 것이 밀려 5월에 4,5월 분의 책이 한꺼번에 출간되었을 때도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든 것도 바로 그 설렘 때문이었다. 새로운 캐릭터와의 만남. 그 첫만남 <수상한 라트비아인>이 시작됐다.

  11월의 어느 날, 기동 수사대의 매그레 반장은 라트비아인 피에트르의 이동에 대한 전보를 받는다. 외견 연령 32세, 신장 169, 미간 좁음, 비배 직선 등으로 그의 신체적 특징이 나열된 구술 몽타주를 통해 라트비아인 피에트르에 대해 입력 후 그가 도착할 듯한 기차역으로 나간다. 하지만 그곳에서 피에트르와 똑같은 인상착의의 남성이 화장실에서 살해당한 채 발견되고, 또 한 명의 피에트르와 똑같이 생긴 남자가 호텔로 향한다. 이에 특유의 감이 발동된 매그레 반장은 미행을 시작한다. 라트비아인과의 보이지 않는 대립 속에서 자신이 아끼던 부하가 살해당하고, 자신 또한 총에 맞기까지 하지만,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균열 이론'을 가지고 범인이 틈을 보이는 순간만을 끈질기게 기다리는 매그레 반장. 끈질긴 그의 추격 앞에 결국 범인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에 이르는데...

  신장 180센티미터, 몸무게 100킬로그램이 넘는 큰 덩치의 바윗덩어리 같은 남자. 쉴 새 없이 맥주를 마시고,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문, 강인한 모습이지만 아내 앞에서는 한없이 자상한 남자. 어떤 사건이 벌어지느냐도 시리즈물을 읽는 재미를 더하지만 결과적으로 시리즈물을 계속 '읽게' 만드는 것은 캐릭터의 힘이다. 그런 면에서 <수상한 라트비아인>에서 처음 만난 매그레 반장은 따뜻함과 우직함을 두루 갖춘 정감가는 캐릭터였다. 무엇보다 그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그가 전형적인 경찰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외교상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범인을 제대로 체포하기 위해 결정적인 증거가 나올 때까지 섣부른 행동을 자제하는 면도 있지만, 법망을 피해가기도 하고, 권총을 아무렇게나 방치해 절망에 빠진 범인이 자살하게 방조하기도 한다. 선과 악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라 범인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모습을 보며 시리즈 첫 권이라 어느 정도 캐릭터가 확립되어 있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섣부른 것이었음을 확인했다. 약간은 갸웃한 면도 있었지만 '삶을 수사한다'는 버즈북의 제목처럼 우직하게 삶을 수사하는 매그레 반장. 앞으로 이어질 대장정이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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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5-30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그레 시리즈 정도면,열린 책들 정도는 되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네요.여러가지 추리 소설이 출간되는 일본이 넘 부럽네요ㅜ.ㅜ
 
수상한 라트비아인 매그레 시리즈 1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품절


하지만, 감히 예감이라고까지 부르긴 어려우나, 뭔가 어렴풋한 느낌이 그를 꿋꿋이 버텨 내게 만들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건 그만의 <이론> 때문이라고 해도 좋았다. 일부러 다듬어 발전시킨 것도 아니고, 아직은 머릿속에 막연한 상태로 떠도는 생각이지만, 매그레 자신이 남몰래 <균열 이론>이라 이름 붙인 일종의 원리 말이다.
이는 한마디로 모든 범죄자, 모든 악당의 내부에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기초한 이론이다. 사실 그들은 대개 게임 상대, 즉 적의 모습을 취하기 마련이며, 경찰의 눈에 띄는 건 결국 그런 모습이거니와 보통은 그런 모습들과 대결하는 식으로 모든 작전이 진행되기 일쑤다.
가령 어디선가 위법 행위나 범죄가 저질러졌다고 치자. 대개 이렇게든 저렇게든 객관적으로 주어진 자료를 토대로 대결이 벌어진다. 그중 몇 가지 밝혀지지 않은 점들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찰은 머리를 쥐어 짜는 것이다. -64~5쪽

다만 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일종의 <균열>을 찾아 기다리고 또 기다려 왔다는 게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이다. 다시 말해, 게임 상대한테 생기는 어떤 <틈> 사이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 말이다! -66쪽

아침에 마제스틱 호텔의 어느 여자 투숙객이 뇌까린 말…… <저 꼬락서니 좀 보라구!>
세상에! …… <저 꼬락서니>라니! 계속 수작을 부릴 위험성이 다분한 악당들을 처단하기 위해, 그것도 바로 같은 호텔에서 살해당한 동료의 복수를 위해 노심초사 동분서주하는 형사한테 그게 할 말인가!
<저 꼬락서니>라니! 영국 재단사의 솜씨로 멋지게 빚어낸 옷 한 벌 갖춰 입지 못하고, 매일 아침 손톱이나 다듬을 여유 따윈 꿈에도 기대할 수 없는 빡빡한 일정에, 사흘 전부터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주인공 없는 식탁만 꼬박 지키고 있을 마누라를 둔 사내에게 그게 어디 할 소리인가!
<저 꼬락서니>라니! 한 달 2천2백 프랑의 봉급을 받아가면서 매번 사건이 종료되고 범인이 쇠고랑을 차고 나면, 이제 책상에 붙어 앉아 영수증을 포함한 각종 증빙 문서들을 첨부해 가며 그간 들인 비용을 꼼꼼히 서류로 정리해, 그때부터는 경리와 또다시 씨름을 벌여야 하는 베테랑 수사 반장에게 어찌 그런 망발을 내뱉는단 말인가! -16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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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 (양장) - 조선의 문장가 이옥과 김려 이야기
설흔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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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제1회 창비청소년도서상 수상작이라 그런지 신문 광고나 인터넷 광고로 자주 접한 책. 하지만 그런 광고보다는 대학 시절 이옥의 매력에 빠져 지낸 적이 있어서 과연 이옥과 김려의 우정을 어떤 식으로 풀어갔을지가 궁금했다. <소년, 아란타로 가다>에서는 마지막으로 조선통신사가 떠난 계미사행을 배경으로 청유라는 소년의 이야기가 그려졌었고,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에서는 연암의 아들 박종채를 내세워 팩션의 형식으로 글쓰기에 대해 풀어갔다면,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는 이옥과 김려라는 두 실존 인물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진행한다. 

  정조의 문체반정은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될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양반전>을 쓴 연암이 문체반정의 가장 큰 희생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연암도 어느 정도 꾸중을 듣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는 사대부였기에 비교적 가벼운 수준의 벌을 받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 이옥은 문체반정의 가장 큰 희생양이라 할 수 있다. 이옥은 죽은 글쓰기가 아닌, 살아 있는 글쓰기를 시도하다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당하고 유배형에까지 처해진다. 하지만 이런 시련 앞에서도 이옥은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고 세상을 살아간다. <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는 바로 그 이옥과, 그의 절친이었던 김려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과거 문체반정에 휩싸여 유배를 당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현감이 되어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는 김려. 평온하기만 한 봄날, 그의 앞에 한 청년이 들이닥친다. 남루한 옷차림에 무례한 태도. 놀랍게도 그는 자신의 벗 이옥의「백봉선부」를 읊는다. 김려는 그 청년이 이옥의 아들 우태임을 알게 된다. 우태는 그냥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하며 아버지가 남긴 글 뭉치를 김려에게 보여준다. 그리운 벗의 글. 우태의 등장으로 김려는 글 때문에 모진 고초를 당했던 과거를 떠올리게 되고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유배생활도 떠올린다. 그리고 그때를 추억하며, 그는 이옥과의 우정에 대해, 글쓰기의 본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기회를 얻는다.

  이옥과 김려라는 일반 대중에게는 낯설게 다가갈 수 있는 두 선비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글쓰기와 신념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게 한다. 단순히 두 문사의 우정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유배지에서 싹튼 사랑, 묵묵히 자신의 곁을 지켜준 하인에 대한 고마움 등 얇은 책 속에서도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지루하지 않다. 단순히 옛이야기를 읽어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옥과 김려의 글을 통해 당시의 문체반정의 중심에 있었던 소품체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 될 듯하다. 어느 정도 시대적 배경을 알고 읽으면 분명 더 재미있을 책이지만, 별다른 사전 정보가 없는 독자가 읽어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과연 청소년들이 읽으면서는 어떤 느낌을 가질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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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5-27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어머니독서회 6월 토론도서로 정했어요.^^

아~ 그리고 문학동네 사랑의 책보내기 이벤트에 당첨돼서 100권 받아요.
물론 우리집에 두는 건 아니고, 주민센터 도서실에 보내는거에요.
문학동네~~~ 너무너무 고마워요@@^^

이매지 2011-05-27 09:34   좋아요 0 | URL
오아오아 100권이라니!!
순오기님 완전 부러워요! ㅎㅎ
좋은 일에 쓰신다고 하셔서 뽑아주신 거 아닐까요? ㅎㅎㅎ
여튼 축하드려요!

세실 2011-05-27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참 맘에 드는데(별다른 사전정보 없어도 쉽게 읽을수 있고 이옥에 대한 사실적 접근이 좋았어요),
지난 수요일 우리도서관에 채운씨가 와서 이옥에 대한 강의를 했는데요. 이 책 별로라고 하더라구요.
삶을 너무 비관적으로 그렸다네요. 그 말 들으니 괜히 속상한거 있죠.

이매지 2011-05-27 09:36   좋아요 0 | URL
글쎄요. 저는 삶을 너무 비관적으로 그렸다는 의견에 어쩐지 갸웃해지는데요.
뭐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를 수 있으니까요^^
작가의 책은 세번째 읽었는데, 가장 좋았어요. ㅎㅎ

하늘바람 2011-05-27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년 아란타로 가다 궁금하네요.
저는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제 처한 상황 때문인지 자꾸 제 이야기로 느껴져서 잠시 멈추고 있어요.
역시 이매지님 이옥에 대해 먼저 아셨다니
아 난 왜 아는 게 없을까.
^^
역시 이매지님은 멋지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매지 2011-05-27 13:17   좋아요 0 | URL
아, 이옥은 전공이 국문학이라 고전문학 수업 때 관심을 가졌던 문인이었어요^^
소년 아란타도 조선통신사에 대해서 이야기와 버무려 잘 보여주는 책이긴 한데,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웠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