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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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일찍 읽게 된 건 예약주문시에 달린 쿠폰의 영향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이 작품 하나로 여러 문학상을 휩쓸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과연 어떤 작품이길래?'하는 호기심이 일었기때문이다. 그동안 많은 작품들을 내놓은 히가시노 게이고이지만 유독 나오키상과는 인연이 없었다(5번이나 물을 먹었으니 그 심정 오죽하랴). 하지만 그는 이 작품으로 나오키상은 물론이고 이 미스테리가 대단하다,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0, 주간문춘 베스트 10에서 모두 1위를 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정말 이 작품. 대체 어떤 작품이길래?

  제목에서 예측할 수 있듯이 이 책 속에서는 한 남자의 '헌신'이 등장한다. 예쁘장하게 생긴 이웃집에 사는 야츠코를 몰래 짝사랑하며 그녀가 일하는 도시락집에 가서 얼굴도장을 찍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별볼일없게 생긴 중년의 수학교사 이시가미. 그는 우연히 옆집에서 야츠코와 그녀의 딸이 우발적으로 그녀의 전남편을 죽이게 된 것을 눈치채고는 그녀를 도와주겠다고 나선다. 낯선 사람의 도움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법 하지만 야츠코는 이시가미의 마음을 약간은 눈치채고 있었기에 그의 그런 호의를 받아들인다. 백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한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었던 이시가미는 야츠코의 범행을 덮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하나씩 실현시켜 가는데...과연 사랑때문에 시작된 이시가미의 '헌신'은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할 것인가.

  뛰어난 탐정 혹은 형사가 등장해 사건의 진상을 밝혀가는 과정이 아니라 시작부터 사건이 툭 떨어지고, 부수적으로는 형사들의 취조나 탐문, 알리바이 확인 등의 수사적인 면에서부터, 사건을 교묘하게 숨기려는 이시가미와 우연히 사건에 끼어들게 되어 이시가미의 계략을 알아채려는 이시가미의 대학동창인 물리학자 유가와 이 둘의 두뇌싸움까지. 다양한 재미를 느낄 수 있었던 책이었다. 물론, 기존의 히가시노 게이고의 글들처럼 어렵지 않게 책에 빠져들게 하는 점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왠지 모를 '가슴아픔'을 느낄 수 있었기에 묘한 감동이 남았던 것 같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책 속에서 등장하는 야츠코와 그녀의 딸 마사토의 감정표현이 다소 약했다는 점, 혹은 두 모녀가 자신의 일을 너무 이시가미에게 맡겨놓고는 이 사건 속에서 너무 소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기존에 히가시노 게이고를 좋아했던 독자라면, 소문으로만 듣던 <용의자 X의 헌신>이 과연 어떤 책인지 궁금했던 독자라면, 혹은 여름을 맞아 추리소설 한 번 읽어볼까하는 독자. 누구라도 재미있고 신선하게 읽어갈 수 있는 책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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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6-08-12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새 읽으셨군요. 방금 도착했어요. 언제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

이매지 2006-08-12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까 12시 좀 넘어서 도착했는데 1시간쯤 걸려서 다 읽었어요.
생각보다 안 두껍더라구요^^;

미미달 2006-08-12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까 말까 계속 어영부영 하다가 결국은 못 사버린 책이어요. ㅠ

이매지 2006-08-12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미달님 / 뭐 싸기도 쌌지만 워낙 땡기던 책이라 좋았어요^^ 사실 전 이 책 이렇게 빨리 나올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었거든요^^
 
N 또는 M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40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명우 옮김 / 해문출판사 / 199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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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거사 크리스티의 많은 책들 가운데 추리소설을 가장한 로맨틱 소설이나, 전통적인 추리소설들은 그런대로 찾아볼 수 있는 반면에 첩보물은 꽤 드물다. 몇 편 되지 않는 첩보물이기에 관심을 가지고 나름의 재미를 찾아가면서 읽을 수 있었던 작품.

  일단 배경이 2차 세계대전이기때문인지 소설의 전반에 흐르는 공기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졌다. 기존에는 평화로운 시대지만 그런 평화를 깨뜨리는 사건을 다뤘다면 이 책에서는 평화롭지 않은 시대이기에 '내부의 적'을 찾아내려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때문에 책 속에서 2차 세계대전을 겪는 평범한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엿볼 수 있다는 점이 또 하나의 재미로 남았던 것 같다. (예를 들어, 함께 지내는 사람들이 혹시나 스파이가 아닐까하고 의심하고 알게 모르게 서로를 감시하는 모습들같은 것)

  이제는 중년이 되어 일을 맡겨주는 사람도 없이 따분한 일상을 보내던 토미와 터펜스 부부. 어느 날, 토미에게 제 5열. 그러니까 내부의 적을 찾아달라는 일이 맡겨지게 된다. 이에 토미는 터펜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임무를 위해 한 여관으로 떠나게 되지만 그 곳에서 자신보다 먼저 도착해있는 터펜스를 만나게 된다. 이야기를 몰래 들은 터펜스가 모험을 찾아 쫓아온 것. 부부이지만 이번만큼은 서로의 정체를 숨긴 채 일을 진행해가는 두 사람. 너무도 전형적인 인물들이 모여있는 여관에서 토미와 터펜스는 과연 내부의 적을 찾아낼 수 있을까? 

  사실 애거사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 그러니까 미스 마플양이나 포와로 같은 경우에는 직접 발로 뛰는 스타일이 아닌 산책하듯이 둘러보고 머리와 경험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다. 하지만 첩보전에서는 이런 행동에는 한계가 있는 법. 그렇기에 토미와 터펜스 부부가 더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다른 탐정들보다 이들은 좀 더 머리가 떨어지는 감도 없잖아 있지만(평범한 것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랄까) 그렇기때문에 더 친근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전통적인 첩보물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박진감이 부족한 듯하고, 애거사 크리스티 식의 로맨틱 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엔 또 그 나름대로 부족하고, 조금만 더 유머러스했더라면 좋았을텐데하는 아쉬움도 조금 들었고, 여튼 이래저래 부족한 맛이 좀 남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거사 크리스티가 아낀 두 탐정, 토미와 터펜스를 만나볼 수 있는 몇 안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흥미를 끄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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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8-12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터펜스 팬도 꽤 많아요^^

이매지 2006-08-12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이 작품 읽다보니 토미보다는 터펜스가 영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모방범 2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0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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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권 뒤에서부터 이어진 2부에서는 범인들의 관점에서 사건을 다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1부에서는 연쇄살인사건이 중심에 놓였다면 2부에서는 그 떠들석한 사건은 부수적인 요소일 뿐이다. 

  2부에서는 겉으로 드러난 시체보다 훨씬 더 많은 시체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과 사건의 진범들의 관계, 그들의 수법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다. 객관적인 사건 자체는 1부와 다를 것이 없다고 볼 수 있겠지만 2부에서는 그런 사건의 객관성보다는 심리적인 측면이 부각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말해, 왜 범인이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왜 범인이 범행을 저지르게 되었는지, 그 사건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알아차리지 못했던 사람들은 진실을 직면하기 전에 어떤 감정들을 느끼고 있었는지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3부에서는 1부에서처럼 다시 사건의 주변으로 향한다. 이미 1부에서 등장한 사람들이 다시 나와 사건에 대해 생각하고 범인의 모습과 진상에 대해서 제각각의 방법으로 파악해가는 모습, 그리고 2부에서는 정확하게 등장하지 않았던 숨겨진 피해자들에 대한 조사에 관한 이야기들이 하나씩 진행된다.

  하나의 거대한 작품을 만든다고 생각하고 있는 범인. 그들의 범행의 1막은 끝났다. 3부에서 이어질 그들의 2막. 과연 그 끝은 어떻게 될까 불안하고 조마조마한 마음(그리고 한 켠에는 범인에 대한 분노), 안타까운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3권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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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8-10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 나오면 볼랍니다..;;;;;

이매지 2006-08-10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권 오늘 나온다더니 아직이네요.
으음.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젊은 작가 김영하의 『빛의 제국』이 출간되었다. 동인문학상 수상작 『검은 꽃』 이후 삼 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소설이다. 탄탄한 작품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춘 김영하의 소설세계에서 『빛의 제국』은 거대한 지각변동을 예고한다. 이번 소설에서 그는 자신의 특장인 감각적이고 속도감 넘치는 문체를 억누르는 한편, 묵직한 주제의식과 전복적인 상상력으로 1980년대에서 2000년대에 이르는 시간 동안의 한국사회의 변화양상과 그 구성원들의 개별적 삶의 궤적을 조망한다. 이 작품은 내용과 형식 모두 김영하의 기존 작품들과 성격을 달리하며, 1990년대 이후의 한국소설에서는 비슷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무엇보다 『빛의 제국』의 의미론적 파장은 1960년에 발표된 최인훈의 기념비적 소설 「광장」에 가 닿는다. 주지하듯 「광장」은 남북 분단의 현실과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개별적 인간의 삶을 통해 정면으로 다룬, 최초이자 최고의 작품이다. 「광장」 출간 46년째인 올해, 김영하는 1960년대와는 또다른 층위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역사적 현실 조건 속에 놓인 인간의 실존적 삶에 중층적으로 접근한다. 「광장」이 4ㆍ19혁명 후부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까지의 문학사를 이념적으로 독점했다면, 『빛의 제국』은 1989년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문학사를 재편하며 현재의 이십대 젊은이들에게 1980년대 이후의 현대사를 추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놓는다. 김영하가 그려낸 21세기의 ‘이명준’은 스물네 시간 안에 자신의 존재는 물론 살아온 세월의 절반을 흔적 없이 정리해야 하는 중년의 스파이다. 『빛의 제국』은 그로부터 씌어지기 시작한다.

단 하루 동안 인생을 통째로 다시 산 한 남자 이야기

“어느 여름밤, 나는 침대에 누워 새로운 소설을 구상하고 있었다. 문득 간첩, 그것도 남파된 지 이십 년이 넘은 남자가 떠올랐다. 그 동안 그저 조금 위험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고만 믿었던 이 남파간첩에게 어느 날 갑자기 귀환 명령이 떨어진다. 남은 시간은 하루. 그는 그 하루 동안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한다. 가족, 사랑, 직업과 추억, 그 밖의 모든 것들을 버려두고 떠나가야 하는 것이다. 시작은 근사해 보였다. 나는 벌떡 일어나 구상을 적기 위해 노트를 펼쳤다. 스파이의 이야기지만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보편적인 한 인간의 이야기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썼다.”
소설의 주인공 김기영(본명 김성훈)은 평양외국어대 영어과 재학중 차출되어 김정일정치군사대학 공작원반(구 695부대 130연락소)에서 사 년간 대남 공작원 교육을 받은 뒤 스물두 살이던 1984년 서울로 남파된 스파이다. 당의 명령에 따라 입시를 치르고 1986년 연세대 수학과에 입학한 그는 학생운동권에 잠입한다. 위장 재외동포나 고정간첩, 자생적 공산주의자 위주의 공작원 양성 방식에 변화를 꾀하고 있던 당시의 평양은 잘 훈련된 엘리트 출신 공작원을 남한 대학의 신입생으로 입학시켜 학생운동세력과 함께 커나가도록 한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김기영은 그 실험 모델이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영화수입업을 하며 남파된 스파이들에게 그럴듯한 전사(前史)를 만들어주는 이른바 ‘포스트’로 기능한다. 수백 명의 스파이들이 그를 거쳐 남한 각지로 흘러들어간다. 그러다 1995년 자신을 내려보낸 북쪽 담당자가 실각함으로써 잊혀진 스파이가 된 그는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왔다.
2005년의 어느 날 아침, 사무실에 출근한 그는 한 통의 스팸 메일을 통해 하루 안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귀환하라는 평양의 명령을 전달받는다. 자신의 기록이 삭제되었으리라 믿고 있던 그는 명령의 전달 경위를 추측하며 고민에 휩싸인 채 서울 곳곳을 방황한다. 올라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그에게 남은 시간은 단 하루. 대학 시절 만난 아내와 중학교에 다니는 딸, 이십여 년 동안 자신이 일구어온 모든 것을 내던지고 가야 하는 그는 순간순간 잊고 있던 과거와 맞닥뜨린다. 불행했던 평양에서의 어린 시절, 배신한 동료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기도 했던 젊은 날의 기억 속에서 그는 시간과 미행의 강박에 동시에 쫓기며 허둥댄다.

기억하라,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그 인물이 내 머릿속으로 ‘찾아왔을‘ 때 동시에 두 가지가 떠올랐다. 하나는 폴 발레리의 시구였다. 정확히 어느 시에서 읽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그리고 이제는 무슨 경구처럼 씌어지는 구절이지만,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문장이었다. 내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잘 통제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어느 샌가 긴장도 감각도 무뎌진 채 그저 하루하루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하루, 인생에 대한 감수성이 극으로 치닫는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달라 보이고 낯설어 보인다. 그리고 문득 그야말로 아무것도 감각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 살고 있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귀환 명령은 어떤 면에서 그의 정신적 잠을 깨우는 역할도 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 연작이었다. 그 연작 속의 세계는 조심스럽게 뒤집혀 있다. 마그리트의 다른 그림처럼 대놓고 부조리하지 않고 자세히 살펴봐야 무엇이 이상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하늘은 청명한데 땅은 어둡다. 가스등이 켜진 거리, 나무들은 검은 그림자에 묻혀 있다. 집의 창문에서는 램프의 불빛이 은은히 비쳐 나오지만 밖은 엄연히 낮이다. 내 소설의 주인공이 사는 세상이 바로 그런 곳이 아닐까. 혼자만 어둠 속인 혹은 혼자만 대낮인, 그런 세상. 그러다 갑자기 어느 하루, 그것마저도 뒤바뀐다.”
김기영은 북한, 1980년대의 남한 그리고 21세기의 남한사회를 모두 경험하는 인물이다. 그가 남파되었던 1980년대의 남한은 21세기의 남한보다는 오히려 북한과 더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국가 시스템, 국민들의 사고방식, 정치상황, 교육환경 등 모든 면에서 그때까지만 해도 남과 북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사회였다. 그러나 21세기의 남한은 1980년대의 남한과는 사실상 ‘다른 나라’이다. 후자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2005년 서울이라는 시공간에 소속된 김기영은 이미 자본주의사회에 완벽히 적응한 인물이다. “배는 불룩 나오고 가슴은 빈약하며 팔에는 물살이 출렁대는, 남한의 평균적인 중년 남성이 되어가고 있는”중으로, “하이네켄 맥주와 빔 벤더스의 영화를 좋아하”고 “일요일 오전엔 해물 스파게티를 먹고 금요일 밤엔 홍대앞 바에서 스카치 위스키를 마시는 사람”이다. 누가 봐도 간첩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전형적인 386세대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그에게 떨어진 귀환 명령. 그것은 자신이 본래 “공작원이고 당과 수령에게 충성을 맹세한 노동당원”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동시에 일상에 함몰된 채 살아가던 권태로운 삶을 통째로 뒤흔드는 계기가 된다. 그는 단 하루 동안 인생의 전부를 반추하고 회의하며 ‘복습’한다. 이는 엄밀히 말해 그에게 자본주의란 ‘학습’한 것일 뿐 ‘체득’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영원한 국외자. 그것이 김기영의 운명인 셈이다. 소설의 제목으로 쓰인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은 “혼자만 어둠 속인 혹은 혼자만 대낮인, 그런 세상”을 살아온 김기영의 삶을 함축하고 있는 그림이다.

눈 먼 인간들의 나약하고 비루한 운명에 대하여
“이 소설의 기본적 지향점은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사회가 어떻게 변화해왔는가 그리고 인간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또한 그것을 통해서 한치 앞을 모르는 눈 먼 인간들의 운명을 다루고 싶었다.”
김기영의 아내 장마리는 대학 시절 운동권 서클에서 김기영을 만나 결혼했다. 여러 직업을 전전했고 지금은 폭스바겐 영업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자기 삶의 행로가 뒤틀어졌다고 생각하며 남편과 딸의 일상엔 무관심한 채 스물 살이나 어린 대학생과의 연애에 빠져 있다.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잃고 늙어가는 자신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대학생과의 섹스를 통해 보상받는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 시시각각 자신을 옥죄어오는 시간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무인 러브호텔에서 어린 애인이 요구에 의해 스리섬을 벌인다. 자책감은 있지만 죄책감은 느끼지 않는다. “임수경을 질투하고 평양에 가고 싶어 안달을” 했던 1980년대의 주사파 여대생이 마흔 살 중년의 나이에 『중국의 붉은 별』을 끼고 다니며 마오를 숭배하는 스무 살짜리 대학생에게서 정신적 육체적 위안을 얻는 한 편의 촌극은 지난 이십여 년 동안 한국사회와 그 구성원들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가장 친한 친구를 배신하고 무언가 야릇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남자친구의 생일파티에 참석해 아무도 없는 집에서 그와 진한 스킨십을 나눈 김기영의 조숙한 딸 현미의 문장은 그런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끔찍했던 어떤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여겨지는 것, 그런 일이 반복되는 것, 혹시 그런 게 인생이 아닐까.” 김기영은 하루 동안 절친한 대학 후배를 만나 진실을 털어놓기도 하고, 공작원으로 함께 남파된 동료들을 찾아 명령의 경위를 캐보려고도 하지만 돌파구는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그는 장마리에게 모든 것을 고백한 뒤 같이 올라가자고 설득하지만 그녀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단호하게 거부한다. 마침내 귀환 쪽으로 마음의 가닥을 잡는 순간, 김기영은 자신이 오래 전부터 남쪽 정보당국에 의해 완벽히 감시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만약 이 소설이 잘 읽힌다면, 그 순간 당신은 이 소설을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없다. 아니 있지만 계속해서 그것을 지워나간다. 소설적 현대성에 대한 이런 지향이 제대로 실현됐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 소설을 읽음에 있어 ‘이야기’에만 집중하지는 말았으면 하는 것이 작가로서의 바람이다. 물론 이 소설은 ‘잘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만약 이 소설이 잘 읽힌다면, 그 순간 당신은 이 소설을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
『빛의 제국』은 원고지 1천5백매 분량으로 저자가 쓴 가장 긴 소설이다. 집필시 몇 번이고 처음부터 새로 쓰는 습관을 버리지 못해 돌연 문예지 연재를 중단하고 문장, 시점, 구성 등 등장인물을 제외한 모든 것을 바꾸어 다시 썼다. 오히려 방해가 될까봐 방북 취재는 일부러 하지 않았고, 대신 탈북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그 내용을 참고해 평양을 묘사했다. 특히 저자와 동갑인데다 평양에서 영화대학을 졸업하고 모스크바 유학까지 한 탈북자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탈북 시인 최진이씨와 그 부군은 초고를 읽고 코멘트를 해주었다.
한 편의 숨가쁜 스파이 영화처럼 『빛의 제국』은 여러모로 무거운 소설임에도 시종일관 잘 읽힌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이 소설의 경우 그것은 장점이 될 수 없다. 잘 읽히는 것은 ‘이야기’일 뿐이다. 이 소설은 그 이야기의 밑바닥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스스로 지워나간다. 주인공의 의지, 소통 등은 주인공이 의식할 수 없는, 이야기 바깥에 존재하는 소설의 ‘형식’에 의해 서서히 허물어져버린다. 에셔의 판화를 떠올리게 하는 일종의 형식 실험이다. 『빛의 제국』이 잘 읽힌다면, 그것은 저자의 실수가 아니라 독자의 오독이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아랑은 왜』『검은 꽃』등 지금까지 국내에 발표된 김영하의 대부분의 작품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폴란드, 미국, 일본 등 세계 곳곳에서 이미 출간되었거나 곧 출간될 예정이다. 『빛의 제국』에 대한 반응들이 기다려지는 또다른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는 이미 세계에서 ‘통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김영하
1995년 계간 『리뷰』에 단편 「거울에 대한 명상」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호출』『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오빠가 돌아왔다』, 장편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아랑은 왜』『검은 꽃』, 산문집 『포스트잇』『랄랄라 하우스』, 영화산문집 『굴비낚시』『김영하ㆍ이우일의 영화 이야기』가 있다.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이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에서 아내와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저자 홈페이지 http://kimyoungha.com

* 초판발행|2006년 8월 8일
* ISBN|89-546-0191-X 03810
* 신국판|392쪽|9,800원
* 책임편집|조연주, 오경철(031-955-8865, 3572)

 

출처 : http://www.munha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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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을뭐라하지 2006-08-10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문학동네로선 이럴 수밖에 없겠지만,
혹시나 이 책을 보실 분들은 위의 내용 안 읽으셨으면 좋겠네요.
(이거 보고 책 보면 반감될 수 있습니다, 무언가가)

저는 지금 이 소설을 열심히 읽고 있는데,
이 소설엔 그 흔한 '저자의 말'도 그 뻔한 '해설'도 없습니다.
작가의 적확한 의도야 모를 일이지만,
소설에 대한 선입견을 제거해준다는 면에서 굉장히 의미심장한 일이지요.

페일레스 2006-08-10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 괜히 다 읽었네... -_- 연랑님 댓글부터 볼 걸. 아 참, 김영하씨 홈페이지 방명록에 연랑님 글도 있더군요! 괜히 반가워서... -_-;;;

이매지 2006-08-10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랑님 / 소문에 듣자하니 기존에 나왔던 책들보다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고 하던데. '저자의 말'도 '해설'도 없다니. 독자에게 알아서 판단하라는건가요. 으음. 저도 읽을 예정이긴 한데 그렇다면 이 글을 잊어야겠군요^^;

페일레스님 / 긴 글 읽느라 수고했소 -_ -;
 

이 전에 <혼징살인사건>과 <옥문도>에서 만난 긴다이치 코스케가 등장하는 작품. 긴다이치 코스케는 김전일이 사건을 해결할 때면 입버릇처럼 말하는 바로 그 할아버지. 그가 등장하는 작품 중 네 번째 장편인 이 책은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중에서도 인기가 높아 영화나 드라마로 많이 제작되기도 했다고. 그만큼 재미를 보장받았다는 얘기겠지?

페이지가 두꺼워서 걱정했는데 판형을 보니까 그렇게 두꺼운 책은 아닌 듯.



 
1권에서는 발칸반도의 이야기들을 이어갔다면 이번에는 동남아시아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강대국 중심의 역사에서 벗어나 그동안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던 지역의 역사를 짚어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 듯. 비교적 공평한 시각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같기도 하고.




김영하가 말하길 월드컵 끝나고 나올꺼라고 하길래 벌써 한참 전부터 언제 나오나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서야 나왔다. (월드컵 끝난지가 언젠데-_-) 출간 기념으로 낭독회도 갖는다고 하는데 이미 마감된 듯. 확인해보려고 했더니 김영하 홈페이지가 지지리도 안 열려서 포기. (http://kimyoungha.com/) 아. 역시 낭독회는 마감. 그냥 <검은꽃> 이후로 3년만에 만나는 장편이라는 데 의의를 둬야할 듯.





스타일리스트 서은영과 모델 장윤주가 손을 잡고 스타일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들은 이 책을 통해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스타일을 입으라'고 얘기하고 있다. 과연 '스타일'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하면 스타일하게 입는 것인지를 알려주고 있다고. 처음엔 둘이 함께 책을 지은 줄 알았는데 stylebook by 서은영, stylebook by 장윤주로 나눠서 책이 진행되더라.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은. 뭐 물론 나만의 스타일을 찾아 헤메는 사람이라면 조언정도를 얻을 수 있을 것 같긴 하고.



<한국의 美 특강>을 통해서 나에게 한국미술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해준 오주석의 <단원 김홍도>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한국이 美 특강>을 읽으면서 오주석이 참 김홍도를 좋아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렇게 김홍도에 대한 기록들을 모아놓은 책이 있는 줄은 몰랐었다. 기존의 책보다 판형을 키우고 도판이 커져서 '김홍도 화첩'에 가까운 책이 되었다고.김홍도가 살았던 세상부터 김홍도의 생애 등을 아울러 설명하기에 그의 작품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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