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 측 증인
고이즈미 기미코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1년 10월
장바구니담기


냉혹한 것은 판결이 아니었다. 냉혹한 것은 따로 있었다. 검사도 아니고 판사도 아니고 경찰조차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었다. 일치단결해서 이 판결이 내려지게 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16쪽

목사는 우리에게 형식에 따라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표현으로 영원을 맹세케 했는데, 이 '죽음'이란 대체 누구의 죽음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둘 중 어느 한쪽의 죽음으로 갈라진 게 아니었다. 우리는 둘 다 죽지 않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철창살 안과 밖으로 나누었다. 우리는 철망을 사이에 두고 얼굴을 마주 볼 수도 있고, 손가락을 맞댈 수도 있다. 마음만 먹으면 입도 맞출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이에는 수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가 생겼다. -18~9쪽

잘 쓴 살인 이야기나 범죄 이야기에는 묘하게 사람을 도취시키는, 가슴 설레게 하는 뭔가가 있게 마련이다. 절대로 덤벼들지 못할 우리 속의 맹수를 구경할 때처럼.-13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7대 죄악, 탐식 - 죄의 근원이냐 미식의 문명화냐
플로랑 켈리에 지음, 박나리 옮김 / 예경 / 2011년 12월
장바구니담기


엄격한 신학자 장 드 제르송은, 탐식보다 더 중대한 죄를 지을 수 있으니 과도한 금식을 경계하라고 말했다.
더 중대한 죄란 첫째로 지친 몸이 과민해지면서 생겨나는 분노이며, 둘째로 자신에게 비상식적인 행동을 가하는 오만이다. 그러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도덕론자와 교육학자들은 절제의 개념을 강조했다. 신체활동에 필요한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은 너무 많이 먹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죄를 저지르게 된다. 『신학대전』(1271~1272)의 저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먹고 마시고 싶은 욕망이나 미각의 쾌락을 비난하지 않았다. 이는 자연스러우며 신이 바라신 것이기에 전혀 나쁘지 않다고 언급했으나, 인간을 한낱 금수로 만들어버리는 도를 벗어난 식탐은 역시 지탄했다. 지각 있는 식욕이란 결국 절제와 균형 그리고 사회 예법을 준수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한 사회 예법이란 인체의 생리적 욕구를 충족하면서 초대한 손님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사람들 사이에 필수적인 교류를 말한다. -33~4쪽

역사학자 자크 르 고프에 따르면 '하나뿐인 진정한 이상향'인 코케뉴는 중세에 만들어졌지만, 그 이미지는 성경과 고대신화에서 영감을 얻은 오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젖과 꿀이 넘쳐흐르는 가나안 땅, 신이 유대민족에게 내린 약속의 땅 이외에도 성경에서 가장 많이 참조한 부분은 바로 에덴동산이다. 지상낙원에 있는 것처럼 코케뉴의 인간은 먹을 것을 어떻게 구할지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역시 배고픔 자체도 낯선 개념이다. 더군다나 음식을 얻기 위해 일할 필요는 더욱 없다. -46쪽

그러나 과연 미각적 쾌락에 대해서 진지하게 서술하는 일이 가능할까? 음식은 저속한 소재로 여겨져 대부분의 고급 문학 장르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다. 몰리에르의 희극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음식을 먹지만, 코르네이유의 비극에서는 먹지 않는다. 더욱이 라신의 희곡 중에서는 유일하게 《소송인》이라는 작품에서만 등장인물들이 먹고 마신다. 근세 프랑스 문학에서는 음식은 콩트나 희극소설, 우스꽝스럽거나 저속하고 익살스러운 시, 음란소설 같은 마이너 장르에만 등장했다. 서사시, 비극시, 서정시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소재였던 셈이다. -147쪽

음식을 묘사의 대상으로 삼았던 서양 회화는 미각적 쾌락을 언급하는 데 있어 요리책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서양에서 음식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정물화나 풍속화의 묘사 소재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오랫동안 예술사학자들은 풍부한 지식을 동원하여 회화 작품에 묘사된 빵, 포도주, 과일, 채소, 계란, 생선, 고기, 과자 등이 지닌 도덕적, 종교적 의미를 논했다. 빵이나 포도주의 존재에서 그리스도적 상징을 읽어냈으며 벌레 먹은 과일에서 허영의 상징을 발견했다. 그런데 과연 그 정도의 통찰력을 가지고 그림을 그렸을까? 아니면 이 역시도 요리책에 등장하는 영양학적 담론처럼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보여주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을까? 벗은 몸을 그리기 위해 신화를 회화의 소재로 채택했던 것처럼 말이다. -149~15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붉은 수확 대실 해밋 전집 1
대실 해밋 지음, 김우열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월
장바구니담기


"도널드 윌슨이 하느님의 오른편 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총알구멍을 싫어하지 않으신다면 말입니다만."
"누가 쐈답니까?"
회색 옷을 입은 남자가 목덜미를 긁으면서 대답했다.
"누구든 총 쥔 놈이 쐈겠죠."-15쪽

계획이라고 할 만한 게 있다면, 나머지 인간들만 유죄로 만들 수 있는 일을 모조리 파헤쳐서 끝장을 보는 거요. 광고라도 할까. '범죄 구함, 남녀 불문.' 내 생각만큼 타락했다면 그들을 교수대에 보낼 만한 일 한두 개 정도 찾아내는 건 일도 아닐 거요. -142쪽

작금의 상황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분별 있고 이성적이며 세상일이란 게 제 뜻대로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만큼은 충분히 겪어 본 성인들이다, 누구라도 때로는 타협할 필요가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고 싶다면 상대가 원하는 것도 주어야 한다, 이제 우리가 무엇보다 바라는 것은 이 정신 나간 살육을 끝장내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모든 일을 솔직하게 논의하면 퍼슨빌을 도살장으로 만들지 않고도 한 시간 안에 평화를 되찾을 수 있다며 영감은 장광설을 끝마쳤다. -241쪽

오늘 오후에 영감한테 찾아가서 내가 그들을 박살냈다는 걸 알려 줄 수도 있었어. 그러면 영감은 이성적으로 나왔겠지. 내 편을 들어 합법적으로 게임을 끝내도록 지원해 줬을 거야. 그런 방법도 있었단 말이야. 하지만 그자들이 서로 죽이도록 하는 쪽이 더 쉽고 확실했어, 그렇고말고. 이제 생각해 봐도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야. 대만족이야. 탐정사무소엔 뭐라고 보고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만약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보스가 알면 날 기름에 튀겨 버릴 거야. 이 망할 놈의 도시 때문이야. 포이즌빌이 맞아. 독의 도시라고. 날 독에 중독시켰어. -257쪽

잘 들어, 난 오늘 밤 윌슨 영감의 탁자 앞에 앉아 송어를 낚싯바늘에 꿰어 갖고 놀듯 그자들을 농락했어. 물고기를 낚을 때 느끼는 손맛만큼이나 흥미만점이더군. 난 내가 까발린 것 때문에 누넌이 그날 밤을 넘길 확률이 만의 하나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를 보며 웃었어. 마음속까지 훈훈하고 행복했다구. 그건 내 본모습이 아냐. 그나마 영혼이 남은 자리에 온통 단단한 딱지가 앉아 버렸어. 20년간 범죄를 다루다 보니 어떤 살인 사건도 속사정은 일절 보지 않고 오직 수입원이자 일로만 볼 수 있게 됐지. 하지만 이런 식으로 죽음을 계획하면서 흥분하는 건 나답지 않아. 바로 이 도시가 날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거야. -257~8쪽

나는 늘상 입에 달고 사는 불평을 시작했다. 신문이란 것은 도무지 일을 온통 어지럽혀서 사건을 수습할 수 없게 만드는 데 말고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물건이라고. -30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7대 죄악, 탐식 - 죄의 근원이냐 미식의 문명화냐
플로랑 켈리에 지음, 박나리 옮김 / 예경 / 201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7대 죄악, 탐식>이라는 제목을 보고 맨 처음 떠오른 것은 영화 <세븐>이었다. 성서에 나온 일곱 가지 죄악에 따른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세븐>은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매력을 발한다. 신자가 아닌 내가 성서에서 말한 7대 죄악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아마 이때가 처음이지 않나 싶다. 오만, 질투, 분노, 슬픔, 인색, 탐식, 성욕. 어떻게 보면 우리가 흔히 범하게 되는 것들. 과연 애초에 어떻게 죄악으로 규정된 것일까. 그런 궁금증을 안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왜 탐식을 죄악으로 보고 이를 금한 것일까 했던 궁금증은 책을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 풀렸다. 그레고리우스 1세는 "탐식이 어리석은 기쁨, 음란함, 순결의 상실, 지나친 수다 그리고 감각기능의 약화"를 가져온다고 보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취기로 인해 "음란하고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노래, 불경한 말, 지나친 수다, 몽롱한 정신, 어리석은 즐거움" 등이 발생하고, 이는 결국 다른 죄까지 유발하기 때문에 탐식을 중대한 죄로 규정한 것이다. 애초에 가졌던 궁금증은 풀렸지만 탐식이 어떻게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았는가라는 새로운 궁금증이 생겼다. 시, 풍자삽화, 판화, 소설, 광고 등으로 끊임없이 향유, 발전되어온 탐식의 문화. 기존에 알던 작품을 재해석한 것은 아니라 낯설기는 했지만, 그동안 몰랐던 미식문화에 대해 한 수 배울 수 있어서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탐식이 어떻게 문화로 발전되었는가를 보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그 속에서 끊임없이 탐식의 경계를 오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가는 것도 흥미로웠다. 예를 들어, 상류층 가톨릭교도들은 금육(禁肉)기간에 신선하고 고급스러운 생선을 배불리 즐겼고, 육식과 구분이 애매모호한 동물(거북이, 비버, 개구리, 검둥오리 등)을 먹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백포도주에 향료를 섞어 만든 구운 대하나 바다가재 수프 같이 금육기간에 특화된 요리도 발달했다고 한다. 허울 좋은 규범을 만들어놓고 이를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벗어난 이들의 모습이 어쩐지 안쓰럽게 느껴지면서도 위선적인 일면을 본 것 같아 씁쓸하기도 했다.

  식욕이 곧 성욕이라는 과거의 인식은 어느 정도 사라졌을지 몰라도, 중세에서부터 이어져온 탐식/미식문화는 지금도 건재하고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예의를 갖춰 음식을 먹는" 것을 중시하고, 여성과 아이들은 여전히 달콤한 음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중세와 다른 이유에서 탐식(혹은 비만)은 부도덕한 것으로 인식된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탐식을 바라보는 잣대가 변해가는 과정, 그리고 그와 더불어 발달한 문화사를 읽어가는 재미가 쏠쏠한 책.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부만두 2012-01-26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저도 영화 "세븐"에서 본 거구의 시체가 생각나요. 종종 CSI 에서도 그런 캐릭터들이 나오지요.
요새 흔한 맛집 프로그램이나 맛 기행 책들이 다 '탐식'을 조장하는 걸까요? ....근데, 야식 생각나요... ㅜ ㅜ

이매지 2012-01-27 23:23   좋아요 0 | URL
사실 이 책에서 말하는 '탐식'은 단순히 식탐이라기보다는 예절을 지키지 않고 먹는 걸 비판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티비의 맛집 프로그램은 그냥 음식이라는 소비물을 권장하는 것일지도. (저는 지금 야식을 먹고 있...)

재는재로 2012-01-29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맛집하니까 생각나는게 맛집의 허구를 꼬집는 다큐가 생각나네요 맛집에 돈봉투가 지나가고 요즘 사유리가 출현하는
맛프로 보고 있는데 이게 더 신선하네요 꾸밋것 같지않고 좋아요 사유리의 사차원 매력이 ,,

이매지 2012-01-30 00:47   좋아요 0 | URL
저도 사유리가 하는 맛프로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진짜 웃기더라구요.
 
기나긴 하루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장바구니담기


이야기는 끝났지만 나에게는 영원히 결론 없는 이야기로 남아 있다. 아이에게 그렇게 크게 겁을 준 것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후 나이를 많이 먹은 오늘날에도 유난히 곱고 낭자한 저녁노을을 볼 때면 내 의식이 기억 이전의 슬픔이나 무섬증에 가 닿을 듯한 안타까움에 헛되이 긴긴 시간의 심연 속으로 자맥질할 때가 있다. -12쪽

백 단위의 번지와 백 단위의 호수를 합하면 여섯 자리나 되는 무의미한 숫자를 어떻게 왼단 말인가. 물건을 세기 위해 하나, 둘, 셋, 넷은 백까지 셀 수 있었지만 일, 이, 삼, 사는 미처 못 배웠다. 배웠다고 해도 집을 번지수가 있어야 찾을 수 있다는 걸 납득할 수 없었다. 시골 우리 마을의 집은 서로 멀찍멀찍 떨어져 있었고 한눈에 누구네 집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는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영희네 집은 영희네 집같이 생겼고 수돌이네 집은 수돌이네 집같이 생겼다. 우리 집에 오는 편지는 할아버지의 성함만으로도 우리 집을 잘만 찾아왔다. 아무리 가르쳐도 주소를 제대로 못 외는 딸은 엄마를 실망시켰고 아둔하다는 탄식을 자아냈다. 소명하다는 칭찬을 듣던 아이가 환경이 바뀌자 하루아침에 아둔한 아이로 변했다. -21쪽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을 때 그걸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은 언젠가는 저자들을 악인으로 등장시켜 마음껏 징벌하는 소설을 쓰리라는 복수심이었다. 왜 하필 소설이었을까. 소설로 어떻게 복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 시기를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고, 위로가 되었다. -32쪽

사람이란 고통받을 때만 의지할 힘이나 위안이 필요한 게 아니라 안일에도 위안이 필요했던 것이다. 증언의 욕구가 이십 년 동안이나 뜸을 들였다가 결실을 맺게 된 것은 아마도 최초의 욕구가 증오와 복수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증오와 복수심만으로는 글이 써지지 않는다. 우리 가족만 당한 것 같은 인명피해, 나만 만난 것 같은 인간 같지 않은 인간, 나만 겪은 것 같은 극빈의 고통이 실은 동족상잔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32~3쪽

그의 생명은 아무하고나 바꿔치기 할 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우주였다는 게 보이고, 하나의 우주의 무의미한 소멸이 억울하고 통절했다. 그게 보인 게 사랑이 아니었을까. 내 집 창밖을 지나는 무수한 발소리 중에서도 내 식구가 귀가하는 발소리는 알아들을 수 있는 것처럼. -33쪽

형님, 참 묘한 기분이었어요. 내가 살아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으니까요. 기억이 지워졌는데 어떻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겠어요. 거리를 오고가는 사람들이나 요상하게 춤추는 불빛들이나 다들 실재하는 것들이 아니라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환상이다 싶었어요. 건물이고 차들이고 형체는 지워지고 거기서 내뿜는 불빛만이 서로 얽히고설키는 게 마치 물체들의 혼령이 너울너울 자유롭게 교감하는 것 같더라구요. 마음이 편안하고도 슬펐어요. 세상을 하직하면서 한평생의 헛되고 헛됨을 돌아보는 기분이 그런 게 아닐까요. 편안한데도 이상하게 위로받고 싶었어요. -179쪽

형님, 우리가 참 모진 세상도 살아냈다 싶어요. 어찌 그리 모진 세상이 다 있었을까요? 형님, 그나저나 그 모진 세상을 다 살아내기나 한 걸까요? 형님은 당연히 비웃으시겠지만 세상이 정말 달라져다면 그 달라지게 한 힘 중엔 우리 창환이 몫도 있다고 생각해요. -191쪽

젊어졌다는 소리도, 좋아졌다는 소리도 꼭 욕같이 들려요. 그렇다고 늙어 보인다거나 야위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것도 아녜요. 그런 소리 들으면 내가 하루하루를 얼마나 힘들게 보내고 있는지 들킨 것 같아서 기분이 안 좋아요.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만나면 젊어졌다 좋아졌다, 아니면 어디 아팠느냐, 못쓰게 됐다는 식으로 남의 신체를 가지고 들먹이는 인사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197쪽

그이가 부드럽고 따뜻한 눈으로 나를 보아주던 시절 우리 사이엔 말주변 같은 건 필요 없었다. 그이와 나 사이에 말주변의 필요성을 다급하게 의식하게 되면서부터 내 불안과 초조는 비롯됐다. 나는 어쩌다 남편에게 "여보, 요새 나 좀 이상해요. 괜히 불안하고 초조하고……" 그러면 남편은 자못 냉담하게 "흥 노이로제로군, 누가 현대인 아니랄까봐" 했다. 남편은 척 하면 척 하고 빠르게 어떤 등식(等式)을 찾아내는 데 능했다. 그러나 이런 등식으로 도대체 무엇을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237쪽

이렇게 나나 철이 엄마나 딴 방 여자들이나 남보다 잘살기 위해, 그러나 결과적으론 겨우 남과 닮기 위해 하루하루를 잃어버렸다. 내 남편이 십팔 평짜리 아파트를 위해 칠 년의 세월과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상실했듯이. -238~9쪽

셋 중 어느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은 소설을 읽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시간 죽이기'라고 부른다. 시간을 죽인다니, 그것은 유사 이래로 가능했던 적이 없는 일이다. 시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이지 인간이 시간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멍청하고 진부한 소설을 읽으면서 다섯 시간을 보냈다면 그것은 시간이 다섯 시간만큼의 나를 죽이는 동안 어리석게도 이를 방치한 것과 다르지 않다. 이 세상에는 내가 시간을 살리고 시간이 나를 살리는 일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 박완서 선생의 소설을 읽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일 중의 하나다. -266쪽

결국 훌륭한 소설은 이 세상에는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소설이다. 사십여 년의 세월이 그 줄기찬 입증의 과정이었고, 그 입증의 성공은 소설가로서 선생이 늘 품고 있었던 자부심의 근거였다. -277쪽

선생의 손바닥 위에 올라가면 모든 게 다 문학이 되었다. 그 손으로 선생은 지난 사십 년간 역사와 풍속과 인간을 장악해왔다. 그 책들을 읽으며 우리는 살아온 날들을 부끄러워했고 살아갈 날들 앞에 겸허해졌다. 선생이 남긴 수십 권의 책들은 앞으로도 한국사회의 공유 자산으로 남아 우리들 마음공부의 교본이 될 것이다. 우리는 원로 작가 한 분을 떠나보낸 게 아니라 당대의 가장 젊은 작가 하나를 잃었다. -28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