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끝났지만 나에게는 영원히 결론 없는 이야기로 남아 있다. 아이에게 그렇게 크게 겁을 준 것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후 나이를 많이 먹은 오늘날에도 유난히 곱고 낭자한 저녁노을을 볼 때면 내 의식이 기억 이전의 슬픔이나 무섬증에 가 닿을 듯한 안타까움에 헛되이 긴긴 시간의 심연 속으로 자맥질할 때가 있다. -12쪽
백 단위의 번지와 백 단위의 호수를 합하면 여섯 자리나 되는 무의미한 숫자를 어떻게 왼단 말인가. 물건을 세기 위해 하나, 둘, 셋, 넷은 백까지 셀 수 있었지만 일, 이, 삼, 사는 미처 못 배웠다. 배웠다고 해도 집을 번지수가 있어야 찾을 수 있다는 걸 납득할 수 없었다. 시골 우리 마을의 집은 서로 멀찍멀찍 떨어져 있었고 한눈에 누구네 집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는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영희네 집은 영희네 집같이 생겼고 수돌이네 집은 수돌이네 집같이 생겼다. 우리 집에 오는 편지는 할아버지의 성함만으로도 우리 집을 잘만 찾아왔다. 아무리 가르쳐도 주소를 제대로 못 외는 딸은 엄마를 실망시켰고 아둔하다는 탄식을 자아냈다. 소명하다는 칭찬을 듣던 아이가 환경이 바뀌자 하루아침에 아둔한 아이로 변했다. -21쪽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을 때 그걸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은 언젠가는 저자들을 악인으로 등장시켜 마음껏 징벌하는 소설을 쓰리라는 복수심이었다. 왜 하필 소설이었을까. 소설로 어떻게 복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 시기를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고, 위로가 되었다. -32쪽
사람이란 고통받을 때만 의지할 힘이나 위안이 필요한 게 아니라 안일에도 위안이 필요했던 것이다. 증언의 욕구가 이십 년 동안이나 뜸을 들였다가 결실을 맺게 된 것은 아마도 최초의 욕구가 증오와 복수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증오와 복수심만으로는 글이 써지지 않는다. 우리 가족만 당한 것 같은 인명피해, 나만 만난 것 같은 인간 같지 않은 인간, 나만 겪은 것 같은 극빈의 고통이 실은 동족상잔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32~3쪽
그의 생명은 아무하고나 바꿔치기 할 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우주였다는 게 보이고, 하나의 우주의 무의미한 소멸이 억울하고 통절했다. 그게 보인 게 사랑이 아니었을까. 내 집 창밖을 지나는 무수한 발소리 중에서도 내 식구가 귀가하는 발소리는 알아들을 수 있는 것처럼. -33쪽
형님, 참 묘한 기분이었어요. 내가 살아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으니까요. 기억이 지워졌는데 어떻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겠어요. 거리를 오고가는 사람들이나 요상하게 춤추는 불빛들이나 다들 실재하는 것들이 아니라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환상이다 싶었어요. 건물이고 차들이고 형체는 지워지고 거기서 내뿜는 불빛만이 서로 얽히고설키는 게 마치 물체들의 혼령이 너울너울 자유롭게 교감하는 것 같더라구요. 마음이 편안하고도 슬펐어요. 세상을 하직하면서 한평생의 헛되고 헛됨을 돌아보는 기분이 그런 게 아닐까요. 편안한데도 이상하게 위로받고 싶었어요. -179쪽
형님, 우리가 참 모진 세상도 살아냈다 싶어요. 어찌 그리 모진 세상이 다 있었을까요? 형님, 그나저나 그 모진 세상을 다 살아내기나 한 걸까요? 형님은 당연히 비웃으시겠지만 세상이 정말 달라져다면 그 달라지게 한 힘 중엔 우리 창환이 몫도 있다고 생각해요. -191쪽
젊어졌다는 소리도, 좋아졌다는 소리도 꼭 욕같이 들려요. 그렇다고 늙어 보인다거나 야위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것도 아녜요. 그런 소리 들으면 내가 하루하루를 얼마나 힘들게 보내고 있는지 들킨 것 같아서 기분이 안 좋아요.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만나면 젊어졌다 좋아졌다, 아니면 어디 아팠느냐, 못쓰게 됐다는 식으로 남의 신체를 가지고 들먹이는 인사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197쪽
그이가 부드럽고 따뜻한 눈으로 나를 보아주던 시절 우리 사이엔 말주변 같은 건 필요 없었다. 그이와 나 사이에 말주변의 필요성을 다급하게 의식하게 되면서부터 내 불안과 초조는 비롯됐다. 나는 어쩌다 남편에게 "여보, 요새 나 좀 이상해요. 괜히 불안하고 초조하고……" 그러면 남편은 자못 냉담하게 "흥 노이로제로군, 누가 현대인 아니랄까봐" 했다. 남편은 척 하면 척 하고 빠르게 어떤 등식(等式)을 찾아내는 데 능했다. 그러나 이런 등식으로 도대체 무엇을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237쪽
이렇게 나나 철이 엄마나 딴 방 여자들이나 남보다 잘살기 위해, 그러나 결과적으론 겨우 남과 닮기 위해 하루하루를 잃어버렸다. 내 남편이 십팔 평짜리 아파트를 위해 칠 년의 세월과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상실했듯이. -238~9쪽
셋 중 어느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은 소설을 읽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시간 죽이기'라고 부른다. 시간을 죽인다니, 그것은 유사 이래로 가능했던 적이 없는 일이다. 시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이지 인간이 시간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멍청하고 진부한 소설을 읽으면서 다섯 시간을 보냈다면 그것은 시간이 다섯 시간만큼의 나를 죽이는 동안 어리석게도 이를 방치한 것과 다르지 않다. 이 세상에는 내가 시간을 살리고 시간이 나를 살리는 일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 박완서 선생의 소설을 읽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일 중의 하나다. -266쪽
결국 훌륭한 소설은 이 세상에는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소설이다. 사십여 년의 세월이 그 줄기찬 입증의 과정이었고, 그 입증의 성공은 소설가로서 선생이 늘 품고 있었던 자부심의 근거였다. -277쪽
선생의 손바닥 위에 올라가면 모든 게 다 문학이 되었다. 그 손으로 선생은 지난 사십 년간 역사와 풍속과 인간을 장악해왔다. 그 책들을 읽으며 우리는 살아온 날들을 부끄러워했고 살아갈 날들 앞에 겸허해졌다. 선생이 남긴 수십 권의 책들은 앞으로도 한국사회의 공유 자산으로 남아 우리들 마음공부의 교본이 될 것이다. 우리는 원로 작가 한 분을 떠나보낸 게 아니라 당대의 가장 젊은 작가 하나를 잃었다. -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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