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파운드의 슬픔
이시다 이라 지음, 정유리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나라에도 제법 많은 작품이 출판되었지만, 이시다 이라의 작품이라고는 <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만 접했을 정도로 아직 그는 내게 낯선 작가다. 이전에 읽은 <이케부쿠로->에서도 그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생활을 재미있게 보여주고 있어서 인상적이었는데, 이 책은 그 책과는 달리 말랑말랑한 연애소설이라 과연 같은 작가의 책인가하고 놀랐다. 물론 연애를 소재로 삼은 여느 일본소설처럼 가벼운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이시다 이라만의 감각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이 책은 총 10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는 남자지만 이야기의 주인공은 거의 30대의 여성이다. 남성 작가가 묘사하는 여성은 때론 묘하게 현실감이 떨어지는데 인터뷰를 통해 이야기를 써내려갔기 때문인지 이 책 속의 여성들은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느낌이 들었다.  전체적으로는 소박하면서도 일상적인 내용이라 크게 부담없이 읽어갈 수 있었는데, 유독 표제작인 '1파운드의 슬픔'은 서정적인 제목과는 달리 꽤 열정적인 내용이라 행여나 누가 내 책을 엿보지 않을까하고 잔뜩 긴장해서 방어자세를 취하고 읽어갔다. 

  이 책 속의 여성들의 사랑은 결코 '운명적'이지 않다. 그보다는 오히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할 정도로 그동안 생활에 녹아들어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랑을 발견하는 쪽에 가깝다. 안면만 있던 사이지만 공통의 취미(책을 좋아한다)라는 매개체로 묶여지기도 하고, 갑자기 목소리를 잃었을 때 별로라고 생각했던 직장 동료의 의외의 면을 발견하게 되며 사랑의 시작을 예감하기도 한다. 또, 결혼은 생각하지 않고 각자의 물건에 이니셜을 새겨넣는 동거인 사이에 고양이라는 공통 소유의 생명체가 끼어듬에 따라 내 것 니 것을 표시하던 사이에 변화가 생기기도 한다. 이렇듯 이 책 속에 있는 이야기들은 소설이긴 하지만 사실 우리 일상에서도 '혹시나...'라는 생각을 품게끔 만드는 상황들이다. 오랜 시간 기다려온 내 반쪽이 오늘 스치듯 길에서 만난 사람일 수도 있고, 우연히 물건을 사러 간 매장의 직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오히려 아직 내 반쪽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외로워하기보다는 누가 과연 내 반쪽인지 찾아가는 재미가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이 책의 제목만 봐서는 엄청 슬픈 이야기가 담겨있을 것 같지만, 이 책은 소위 최루성 멜로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사랑이 시작될 때의 설렘이 가득 녹아있다. 외로움, 슬픔. 이런 것들은 이 책에서는 어디까지나 사랑을 만나기 전 잠깐 느끼는 괴로움일 뿐이다. 어디까지나 이 책의 주역은 찬란히 빛나는 사랑이다. 사랑, 사랑. 그 모습은 제각각 다를 지라도 이 책은 결국 사랑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한 10개의 이야기인 것이다. 가벼우면서도 센스가 있어 지루하지 않게 읽어갈 수 있었다. 지금 사랑을 한참 하고 있다면, 이제 갓 사랑을 시작했다면, 그리고 언제쯤 내 반쪽이 나타날까하고 안달하고 있다면 한 번쯤 읽어보며 이 핑크빛 이야기를 즐겨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이케부쿠로->와는 다른 분위기때문에 과연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은 어떨까 궁금증이 들었다. 책장을 덮으며 <4teen>과 <LAST>와 같은 이시다 이라의 다른 작품들도 한 번 접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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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2007-07-31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LAST는 이 책과 반대의 분위기라고 보시면 될 거에요.
이 책처럼 우리 일상에서도 혹시나 라는 생각을 품게 하긴 하지만...
사랑이 시작될 때의 설렘이라기보다는 인생이 무너져 갈때의 아슬함이랄까 그런게 묻어나는 책이죠..

그리고 4teen은 제가 최고의 일본소설로 꼽는 작품중에 하나에요 -ㅁ-///
[뭐 워낙 저조한 독서량이긴 하지만 =_=...;;]

암튼 이시다이라의 책 중 가장 원츄하는 책 =ㅁ=/////

이매지 2007-07-31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음. 4teen이 추천이라 이거죠?
언제 봐야할텐데 이거 언제 보려나 ㅠ_ㅠ
자꾸 볼 책만 쌓여가는군요 ㅎㅎ
 
1파운드의 슬픔
이시다 이라 지음, 정유리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4월
구판절판


영양제는 화장품과 닮은 점이 많다. 수첩을 가방 속에 집어넣은 뒤 계산대로 향하며 아사요는 생각했다. 양쪽 다 효능만 읽어보면 엄청 대단한 제품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직접 써보기 전에는 자기 몸에 맞는지 어떤지 결코 알 수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세상 어딘가 자기한테 꼭 맞는 특별한 제품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게 하는 면까지 똑같다. -11쪽

이름이란 지금껏 우리가 해온 것처럼 누구 것인지를 나타내기 위한 것만이 아냐. 마음속으로 수없이 불러보고, 노래하듯 되뇌어보고, 아무도 모르게 몰래 써보기도 하는 거야.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란 그것만으로도 행복의 주문이 도리 수 있어. -39쪽

소메야 씨의 이야길 듣기 전까지, 결혼식이란 별 볼일 없는 웃음과 눈물을 실은 컨베이어 벨트라고 생각했었어요. 주섬주섬 이것저것 집어 먹고 있는 동안, 두 시간 남짓한 그 시간 동안, 즉석 부부 한 쌍 탄생 하는 식으로...-69쪽

이대로 가다간 생활에 치어 말라죽어버릴 것 같다. 이런 무미건조한 생활에 물기를 더해줄 뭔가가 없을까? 대단한 걸 바라는 게 아니다. 온몸에 행복의 비를 뿌려달라는 게 아니다. 자신이 식물들에게 주는 물처럼 그저 약간의 물기를 더해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없을까? 바싹 말라붙은 마음의 표면이 촉촉하게 젖을 수 있을 정도로 그저 약간이면 되니까. 남편이 있고, 아이가 있고, 평범한 결혼생활을 보내고 있는 여자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사치스러운 걸까? -90~1쪽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으면 언젠가 끝도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위해선 그 전에 끝내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있다. -102쪽

아무리 똑바르고 착한 아이라 할지라도 계속해서 삐딱이라고 불리다보면 언젠가는 정말로 삐딱해지고 만다. 이름에는 마법의 주문과도 같은 힘이 있어서 사람의 성격을 불리는 대로 바꾸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109쪽

사랑이란 섹스를 포장한 포장지일 뿐이라고 하시즈메 게이지는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백화점의 포장지처럼 무늬만 장미 꽃다발인 점도 아주 닮았다. 내용물이 그저 그렇다보니 예쁜 포장지라도 필요한 것이겠지. -173쪽

뭐든지 얽매여 있는 이 세상에 연애와 섹스만이 개인에게 남겨진 몇 안되는 자유인 것이다. 누구에게도 강요당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결과를 보고할 필요가 없다. -174~5쪽

속궁합은 노력으로라도 개선해갈 수 있지만, 책을 읽지 않는 남자를 독서가로 만드는 건 무리다. 남자들이란 자신의 생활 스타일에 대해서는 바보스러울 정도로 완고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지적 호기심을 지닌 남자 또한 거의 전무에 가깝다.
지아키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나 바 같은 곳보다 서점쪽을 훨씬 좋아했다.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빼곡히 꽂혀있는 책꽂이들에선 거의 에로틱에 가까운 흡입력을 느꼈다. 어떤 남성이 열중해 있는 책은 그 사람의 학력이나 직업보다 훨씬 더 깊이 있게 그 사람의 인물됨을 말해준다. -239쪽

십대 때부터 지아키의 연애 습관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연애란 그런 게 아닐까? 처음에 잘 먹혔던 기술을 질리지도 않고 언제까지고 우려먹는 것. 아무리 실패를 거듭해도 그렇게 많은 기술을 몸에 익힐 리는 없는 것이다.
사랑에는 0 아니면 1밖에 없다. 상대와 헤어진 순간 모든 것은 리셋 된다. 지아키가 느끼고 있는 이 설렘도 첫사랑 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248~9쪽

"어차피, 지금까지 읽은 책 이야기죠?"
지아키는 소녀처럼 혀끝을 내보였다.
"네, 그래요. 하지만 그걸로 가장 잘 알 수 있는 걸요. 당신이 어떤 사람이고, 뭘 좋아하는지, 그리고 마음속으로 어떤 삶을 꿈꾸고 있는지."
지아키는 창밖을 보고 있는 다카오에게 말하고 싶었다. 이렇게 많은 책들이 쓰이고 있는 건 바로 그 때문이라고. 책은 하나하나가 작은 거울이어서 읽는 사람의 마음속을 비추는 힘이 있다고. -254~5쪽

나이 차이가 많이 나든 적게 나든 결혼이란 한 번 시작되면 그저 공동생활이다. 거기에 로맨틱한 무언가가 개입될 여지는 손톱만큼밖에 없다. -263쪽

나 같은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좀 우습지만, 거꾸로, 다들 연애니 이벤트니 하는 것에 얼마나 휘둘리며 살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어. 달력에 무슨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자동적으로 연애를 하다니. 우리가 무슨 컨베이어 벨트도 아니고 말이야. -296쪽

마유미는 생각했다. 왜 눈앞에 있는 간단한 사실을 깨닫는데 십 년이나 걸려버렸을까? 어른이 된 몸에 마음이 따라 오는데 왜 십 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을까?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리광을 부리며 자라왔고, 쾌적함 속에 자신으로부터 눈을 돌리는 데 필사적이었다. 그건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퉁이 저 편에서 갑작스레 다가오는 현재라는 시간에 몸도 마음도 붙을어 매여, 내내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깨달은 순간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 새로운 해와 새로운 사람은 분명 또다시 찾아오는 것이다. 고세가 말한 대로 기회는 언제나 있다. 지금의 마음가짐을 잊어버리면 되풀이해서 생각해내면 된다. -309쪽

연애 단편을 쓰는 게 저한테는 잘 맞는 것 같습니다. 꼭 작은 케이크를 예쁘게 마무리하는 파티쉐 같은 느낌이에요. 전 과장된 이야기보다는, 보통 여성이 보통 남성에게 마음이 이끌리는 그 순간이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들 연애를 하고 있는 줄 착각하지만, 알고 보면 다들 쓸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생에서 연애의 찬스랑 그리 몇 번 없는 것이죠. 그 순간을 모아담는 것이 즐거워요. -작가의 말-3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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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대부 집안의 자제이자 최고의 문장가로 알려진 윤서. 하지만 그는 반대파에게 된통 당하고 온 동생의 모습을 접하면서 차마 상소 한 번 올리지 못하는 겁쟁이다. 그런 그가 어명때문에 조사를 하다가 우연히 난잡한 책을 접하게 되고 거기에 빠져 심지어 자신이 직접 그런 책을 쓰는 데까지 이른다. 이왕 음란소설을 짓는 김에 1인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집안의 숙적인 의금부 소속의 광헌에게 그림을 그려달라 제안을 한다. 마침내 손을 잡은 두 사람. 그들의 음란에 점차 박차를 가하게 되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올렸던 영화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였다. 겉으로는 정숙해보이는 양반들 속에 있는 욕망에 사로잡힌 모습. <스캔들>에서 관능이나 욕망을 중심으로 영화를 이어갔다면 이 영화는 적당한 음란과 코믹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조선시대를 현대적으로 읽어가는 과정들이 있었기에 영화는 사극이라도 퓨전사극같은 느낌을 줬다랄까.

  유교적 덕목, 선비의 덕목에 사로잡혀있고, 앞에 나서거나 반항을 해본 적이 없는 윤서. 그에게 음란소설은 억압된 자아의 배출구였고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소설때문에 윤서는 예전이었다면 손도 못 댔을 왕의 여자 정빈과 사랑을 나눈다. 갖고 싶은 것은 꼭 가져야 하는 정빈, 소심하지만 글을 위해서 그녀와 대범한 사랑을 시작하는 윤서. 그들의 사랑은 아슬아슬 줄타기처럼 이어져간다.


  <음란서생>은 그 배경이 조선시대일 뿐이지 사실 어느 시대에 갖다 놔도 말이 되는 이야기이다.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 그것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도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때문에 이 영화는 어떤 사료적인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심지어는 왕이 등장하나 어떤 왕인지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꿈꾸는 거 같은 거, 꿈에서 본 것 같은 거, 꿈에서라도 맛보고 싶은 것'을 난잡한 소설을 통해 나타낸 윤서. 그것은 그저 그에게 있어서 금지된 사회에 대한 단 한 번의 반항이 아니었을까. 일탈의 짜릿함을 느낄 수 있는 영화였고 영상미도 예쁘긴 했지만 이야기의 연결이 건너뛰는 감이 없지않은 점과 별 거 아닌 음란도는 아쉬운 감이 들었다. 이런 사극이라면 부담없이, 재미있게 볼 수 있다 정도.


-2006년 5월 21일에 본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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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7-07-29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민정... 참 고운...^^;;

Kitty 2007-07-29 0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너무 오랜만에 본 한국영화라서 왠지 얼떨떨했다는 ^^
남자애들이랑 보러가면서 좀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야하지는 않아서 안도했었던 기억이 ^^

무스탕 2007-07-29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유쾌하게 본 영화에요. 의상도 이뻤고 양반들을 비춘 새로운 시각도 참신했고요.

이매지 2007-07-29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늘사초님 / 소위 꽃미녀는 아니지만 매력있죠? ^^
키티님 / 제목에 비해서 수위가 그리 높지 않았던 것 같아요.
무스탕님 / 진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았어요 :)
 

 


  영화에 대한 어떤 정보도 가지지 않고 단지 이 영화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만든 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라는 것만 보고 보게 됐다. 이전 작품에서 장애인과의 사랑이라는 다소 껄끄러운 주제에 대해서 얘기했던 감독은 이 영화에서는 역시 껄끄러운 소재인 게이이야기를 풀어간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메종 드 히미꼬'는 게이들을 위한 실버타운이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한 게이들은 자신들의 남은 삶을 행복하게 보내고자 그 곳에 모여서 생활하는 것. 그 곳에 그동안 아버지인 히미꼬와 연을 끊고 살았던 사오리가 그의 애인의 부탁으로 일을 도우러 오게 되며 '메종 드 히미꼬'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기본적으로 사오리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감, 혐오감때문에 그 곳에 있는 다른 게이들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 생활하며 점차 그들을 이해하게 되고 그들의 순수한 모습에 마음을 열게 된다.

  다소 무거운 주제로 가라앉을 수 있었던 영화는 의외로 잔잔하고 편안하게 진행되었다. 때문에 관객들도 별 거부감없이 영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고, 진심으로 '메종 드 히미꼬'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영화는 '게이들도 똑같은 사람이다!'라는 가치를 세뇌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그저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라고 이야기하는 듯 하다. 그들의 삶이 옳은지 그른지, 사회적인지 비사회적인지, 그런 가치판단의 문제는 관객 스스로의 몫으로 남겨두고 감독은 그저 그 속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영화 속에서 사오리는 아버지가 설령 암에 걸려서 죽었다고 해도 볼 생각이 없었지만 돈이 궁했던지라 유산을 물려준다는 말에 일주일에 한 번씩 아르바이트를 하는 셈치고 '메종 드 히미꼬'를 방문한다. 그녀는 정작 아버지를 대면하면서도 '아버지를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를 '용서'하지는 않았을지언정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만약 감독이 '암만 아버지가 미워도 암에 걸려서 죽을 판인데 암암 용서해야지' 라고 생각하고 사오리가 아버지에게 '모든 걸 용서할께요.'라고 말하며 엉엉 우는 장면을 넣었다면 영화는 아주 형편없는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전형적인 우리나라 드라마인가.)


  초반에는 심술맞은 표정이었던 사오리가 결말부에서 환하게 웃는 장면을 통해, 초반부에는 게이들은 죽어버리라고 벽에 낙서를 하던 꼬마가 후반부에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찾고 일을 돕겠다고 '메종 드 히미꼬'로 들어가는 장면을 통해 우리는 그 안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계기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 영화 한 편으로 게이에 대한 인식이 바뀌지는 않을테지만 그들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는 도와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 이해를.

-2006년 5월 12일에 본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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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로 저택의 비극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51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교향 옮김 / 해문출판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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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는 애거사 크리스티 소설의 대표적 탐정인 포와로가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포와로는 이 사건에서는 철저히 방관자적 태도를 보이며 마지막 순간에 사건을 정리하는 역할만 담당하고 있다. 때문에 포와로가 등장하지만 포와로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등장하지 않고 있다. 나같은 포와로 안티(?)에게는 다행이지만 포와로를 아끼는 분들께는 그만큼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책의 제목처럼 이야기는 할로 저택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할로 저택에 살고 있는 레이디 앙카엘과 헨리 경, 그들의 저택에 주말을 맞아 친척들이 찾아온다. 성공한 의사이며 재치가 있어 생명력이 넘치는 존 크리스토, 그리고 그와는 정반대로 바보 같고 어리숙하며 남편을 절대적으로 받들며 살고 있는 그의 아내 저다, 크리스토의 애인이자 유명한 조각가인 헨리에타, 그리고 젠틀하지만 내성적인 에드워드, 옥스퍼드에 다니고 있는 사춘기라 그런지 까칠한 데이비드. 이들의 주말은 여느 때처럼 평화롭기만 했다. 하지만 이웃에 사는 여배우인 베로니카 크레이가 성냥을 빌리기 위해 찾아오며 일은 틀어지기 시작한다. 15년 전 존과 베로니카는 한 때 약혼했던 사이. 하지만 베로니카의 이기적인 생각에 존은 결국 그녀와 헤어졌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는 베로니카를 담고 살았던 존. 하지만 존은 베로니카를 만남으로 오히려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짐을 덜었고, 삶에 대한 의욕도 되찾는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존에게 거절당한 베로니카는 "당신을 죽이고 싶을만큼 당신이 증오스러워요"라는 말을 내뱉는다. 그녀의 말 때문이었을까? 존은 그 날 총에 맞아 죽게 된다. 총에 맞은 채 누워있는 존, 그리고 그 옆에서 총을 들고 서있는 저다. 너무나 명확해보이는 상황이었지만 조사를 해보니 저다가 들고 있던 총과 존을 쏜 총은 달랐다. 파고 들어갈 수록 복잡해지는 사건. 겉으로 보기엔 사람 좋아보였던 존. 그런 존을 죽인 것은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그의 죽음을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이 책에는 독특한 캐릭터들이 포진해 있다. 우선, 이야기에서 가장 매력적으로 묘사되는 인물은 레이디 앙카엘이다. 겉으로 보기엔 다른 사람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자기만의 통찰력을 가진 여자. 하지만 정작 그녀의 내면으로 들어가면 지독하게 자기 중심적이고 잔혹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녀가 존의 죽음에 대해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며 그녀의 친척인 미지는 '살인 잔치'라고 표현할 정도. 가장 입체적이고 카리스마있는 캐릭터가 아닐까 싶었다. 다음으로 전형적인 예술가인 헨리에타. 그녀 역시 자기 중심적인 생활을 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의리(?)를 지키는 모습도 보여준다. 그 외에 늘 존의 그늘에 가려져있는 에드워드, 존에게 복종하여 살아가고 있는 저다 또한 꽤 독특한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워낙 오랜만에 읽어서 그런지, 아니면 번역 상태가 형편없어서 그런지 읽으면서도 재미보다는 짜증이 더 많이 났던 책이었다. 내가 갖고 있는 게 1994년에 나온 중쇄인데, 그 때쯤이면 맞춤법 통일안도 발표되었을터인데, '-읍니다, -쟎아요'와 같은 종결어미는 물론이고 어마어마한 맞춤법 오류를 발견해낼 수 있었다. 한 두개 정도면 그러려니할텐데 이건 뭐 한 페이지에서도 두어개씩 나오는 판이니. 게다가 무슨 번역자 검토판도 아니고 (정말일까요?)와 같은 부분도 있었고, 어울리지 않게 '-이랑게'라는 종결어미까지. 왠만하면 번역상태에 트집잡지 않는 편인데 이건 정말 해도해도 너무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1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기에 이런 부분을 다 반영해서 새로운 판을 찍었으리라 믿지만 새로운 판형이 아닌 구판을 읽는 내 입장은 날도 더운데 사서 열받았다. 

  늘 회색 뇌세포 자랑을 하던 포와로가 처음으로 호적수라 일컫는 상대가 과연 누구인지 궁금하다면, 그리고 한 남자의 죽음이 그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궁금하다면 재미있게 볼 수 있을 듯 싶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다른 작품과 분위기는 좀 달라서 살짝 어색함도 들었던 책. 그 당시에는 연극으로 상영되었다고 하는데 포와로가 처음 현장을 봤을 때 느낀 것도 무대 장치라는 느낌이었으니(자기를 환영하기 위해 일부러 살인 현장을 꾸며놓은 줄 알았던 포와로) 연극으로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덧) 서점에서 확인해본 결과, '-읍니다, -쟎아'의 경우 '-습니다, -잖아'로 고쳐져 있었다. '-이랑게'는 여전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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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7-07-29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정한 책읽는 재미는 추리소설이죠! ㅎㅎ
정아무개님도 한 번 맛들이면 빠져나오기 힘드실껄요? ㅎㅎ
제 친구가 가장 기억에 남는 번역은 '체스'를 '서양장기'라고 해놓은 거라나 뭐라나.
서양장기도 틀린 건 아닌데 그걸 보자마자 책 읽기 싫어졌데요 ㅎㅎ

asdgghhhcff 2007-07-29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매지님 포와로 안티세요? ^^
전 포와로가 좋던데.. ㅋㅋ
우수꽝스러운 모습에 잘난체 하는 모습이 나름 귀엽고, 인간미가 넘친다고 할까요 ^^ㅋ

이매지 2007-07-29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긴 것도 달걀같이 생긴 게 맨날 회색 뇌세포 운운이나 하고 ! 으으으.
대략 이런 식의 반감이랄까 ㅎㅎㅎ
하지만 마음 속 깊이 미워하지는 않아요~
만약 그랬다면 포와로가 나오는 책은 손도 안댔을껄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