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제는 화장품과 닮은 점이 많다. 수첩을 가방 속에 집어넣은 뒤 계산대로 향하며 아사요는 생각했다. 양쪽 다 효능만 읽어보면 엄청 대단한 제품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직접 써보기 전에는 자기 몸에 맞는지 어떤지 결코 알 수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세상 어딘가 자기한테 꼭 맞는 특별한 제품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게 하는 면까지 똑같다. -11쪽
이름이란 지금껏 우리가 해온 것처럼 누구 것인지를 나타내기 위한 것만이 아냐. 마음속으로 수없이 불러보고, 노래하듯 되뇌어보고, 아무도 모르게 몰래 써보기도 하는 거야.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란 그것만으로도 행복의 주문이 도리 수 있어. -39쪽
소메야 씨의 이야길 듣기 전까지, 결혼식이란 별 볼일 없는 웃음과 눈물을 실은 컨베이어 벨트라고 생각했었어요. 주섬주섬 이것저것 집어 먹고 있는 동안, 두 시간 남짓한 그 시간 동안, 즉석 부부 한 쌍 탄생 하는 식으로...-69쪽
이대로 가다간 생활에 치어 말라죽어버릴 것 같다. 이런 무미건조한 생활에 물기를 더해줄 뭔가가 없을까? 대단한 걸 바라는 게 아니다. 온몸에 행복의 비를 뿌려달라는 게 아니다. 자신이 식물들에게 주는 물처럼 그저 약간의 물기를 더해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없을까? 바싹 말라붙은 마음의 표면이 촉촉하게 젖을 수 있을 정도로 그저 약간이면 되니까. 남편이 있고, 아이가 있고, 평범한 결혼생활을 보내고 있는 여자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사치스러운 걸까? -90~1쪽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으면 언젠가 끝도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위해선 그 전에 끝내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있다. -102쪽
아무리 똑바르고 착한 아이라 할지라도 계속해서 삐딱이라고 불리다보면 언젠가는 정말로 삐딱해지고 만다. 이름에는 마법의 주문과도 같은 힘이 있어서 사람의 성격을 불리는 대로 바꾸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109쪽
사랑이란 섹스를 포장한 포장지일 뿐이라고 하시즈메 게이지는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백화점의 포장지처럼 무늬만 장미 꽃다발인 점도 아주 닮았다. 내용물이 그저 그렇다보니 예쁜 포장지라도 필요한 것이겠지. -173쪽
뭐든지 얽매여 있는 이 세상에 연애와 섹스만이 개인에게 남겨진 몇 안되는 자유인 것이다. 누구에게도 강요당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결과를 보고할 필요가 없다. -174~5쪽
속궁합은 노력으로라도 개선해갈 수 있지만, 책을 읽지 않는 남자를 독서가로 만드는 건 무리다. 남자들이란 자신의 생활 스타일에 대해서는 바보스러울 정도로 완고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지적 호기심을 지닌 남자 또한 거의 전무에 가깝다. 지아키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나 바 같은 곳보다 서점쪽을 훨씬 좋아했다.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빼곡히 꽂혀있는 책꽂이들에선 거의 에로틱에 가까운 흡입력을 느꼈다. 어떤 남성이 열중해 있는 책은 그 사람의 학력이나 직업보다 훨씬 더 깊이 있게 그 사람의 인물됨을 말해준다. -239쪽
십대 때부터 지아키의 연애 습관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연애란 그런 게 아닐까? 처음에 잘 먹혔던 기술을 질리지도 않고 언제까지고 우려먹는 것. 아무리 실패를 거듭해도 그렇게 많은 기술을 몸에 익힐 리는 없는 것이다. 사랑에는 0 아니면 1밖에 없다. 상대와 헤어진 순간 모든 것은 리셋 된다. 지아키가 느끼고 있는 이 설렘도 첫사랑 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248~9쪽
"어차피, 지금까지 읽은 책 이야기죠?" 지아키는 소녀처럼 혀끝을 내보였다. "네, 그래요. 하지만 그걸로 가장 잘 알 수 있는 걸요. 당신이 어떤 사람이고, 뭘 좋아하는지, 그리고 마음속으로 어떤 삶을 꿈꾸고 있는지." 지아키는 창밖을 보고 있는 다카오에게 말하고 싶었다. 이렇게 많은 책들이 쓰이고 있는 건 바로 그 때문이라고. 책은 하나하나가 작은 거울이어서 읽는 사람의 마음속을 비추는 힘이 있다고. -254~5쪽
나이 차이가 많이 나든 적게 나든 결혼이란 한 번 시작되면 그저 공동생활이다. 거기에 로맨틱한 무언가가 개입될 여지는 손톱만큼밖에 없다. -263쪽
나 같은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좀 우습지만, 거꾸로, 다들 연애니 이벤트니 하는 것에 얼마나 휘둘리며 살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어. 달력에 무슨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자동적으로 연애를 하다니. 우리가 무슨 컨베이어 벨트도 아니고 말이야. -296쪽
마유미는 생각했다. 왜 눈앞에 있는 간단한 사실을 깨닫는데 십 년이나 걸려버렸을까? 어른이 된 몸에 마음이 따라 오는데 왜 십 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을까?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리광을 부리며 자라왔고, 쾌적함 속에 자신으로부터 눈을 돌리는 데 필사적이었다. 그건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퉁이 저 편에서 갑작스레 다가오는 현재라는 시간에 몸도 마음도 붙을어 매여, 내내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깨달은 순간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 새로운 해와 새로운 사람은 분명 또다시 찾아오는 것이다. 고세가 말한 대로 기회는 언제나 있다. 지금의 마음가짐을 잊어버리면 되풀이해서 생각해내면 된다. -309쪽
연애 단편을 쓰는 게 저한테는 잘 맞는 것 같습니다. 꼭 작은 케이크를 예쁘게 마무리하는 파티쉐 같은 느낌이에요. 전 과장된 이야기보다는, 보통 여성이 보통 남성에게 마음이 이끌리는 그 순간이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들 연애를 하고 있는 줄 착각하지만, 알고 보면 다들 쓸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생에서 연애의 찬스랑 그리 몇 번 없는 것이죠. 그 순간을 모아담는 것이 즐거워요. -작가의 말-3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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