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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여름
아카이 미히로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수사물을 좋아해 가상으로나마 다양한 범죄 사건을 접하면서 과연 어떤 범죄가 가장 악질일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물론 법적으로야 타인의 생명을 앗는 살인이 가장 중한 죄겠지만 '악질'이라면 역시 유괴가 맨 먼저가 아닐까. 그 어떤 범죄가 그렇지 않겠냐마는 돈을 매개로 한 가족의 삶 자체를 뿌리부터 흔들고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삶의 흐름을 틀어버린다는 점에서 살인보다 유괴가 더 잔인할지도 모른다. <저물어 가는 여름>은 바로 그 유괴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익히 봐온 것 같은 아이가 유괴된 가족의 이야기도, 유괴 사건을 공모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아버지가 유괴범인 딸의 인생을 둘러싼 독특한 이야기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도자이 신문사의 사장은, 자신의 회사에 신입 기자로 내정된 여학생(히로코)이 유괴범의 딸이라는 사실을 타 주간지에서 보도하려는 정보를 접하고 인사국장에게 확인하나 이는 사실로 밝혀진다. 빼어난 인재라 사장은 히로코를 놓치고 싶어하지 않지만, 편견 없이 채용한 것은 기쁘긴 하나 용납할 수 없기도 하다는 사주의 입장 때문에 이십 년 전의 유괴 사건은 재조사에 착수한다. 현역 기자가 조사하기엔 무리가 있는 건이라 편집자료실에 좌천되어 있던 전 사회부 기자인 가지가 이 조사를 도맡는다. 가지는 이십 년 전 사건을 다시 들춘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싶어하지만 "만에 하나의 가능성도 없"지만 "가능성 제로라는 것은 없는 법"이라 반쯤 재미로 임무 수행을 시작한다.
범죄자의 딸이라고 하면 나도 모르게 범죄를 저지른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자신의 가정환경을 비관하는 아이를 그리게 된다. 하지만 <저물어 가는 여름> 속의 히로코는 다르다. "그런 일류 호텔에 저 같은 유괴범의 딸이 출입해도" 괜찮냐는 농담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영어와 중국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하고, 때묻지 않은 어리숙함과 입사하지 않겠다고 강단 있게 이야기하는 인물이다. 실력과 인품을 모두 갖췄기 때문에 도자이 신문사의 사람들뿐 아니라 나도 '이 아가씨 매력 있네'라고 점점 히로코에게 빠져들었다. 하지만 히로코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따뜻한 것만은 아니다. 책 초반에 히로코의 양아버지가 한 말처럼 "주어진 조건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이 편견으로 둘러싼 조건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어떨까. 편견을 실력으로 부숴버리겠다고 마음을 다잡아도 결국엔 자포자기하게 되지 않을까. 어쩌면 이야기 초반에 입사를 반려하고 친구들에게 농담처럼 자신의 부모에 대해 인정한 히로코의 마음 한 켠에는 그런 마음도 있었으리라. 도자이 신문사 입장에서도 히로코란 인재는 탐낼 만하지만 히로코 입장에서도 분명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는 시기다. 하지만 이 어떻게든 지켜주고 싶은 아이를 위한 20년 전 유괴 사건의 조서는 역시 녹록치 않다.
생후 1주일 된 영아가 납치되고 희안하게도 범인은 부모가 아닌 종합병원의 원장에게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아기는 죽는다"는 협박장을 보내고 돈을 요구한다. 접선 현장에서 영리하게 도망친 범인의 흔적을 수신기로 다시 찾아내지만 결국 범인은 차로 도주하던 중 수십 미터 낭떠러지로 떨어져 사망한다. 죽은 범인의 집에서는 범행을 뒷받침하는 자료는 여럿 나왔지만 아이는 발견되지 않았고 사건은 흐지부지 종결되어버린다. 가지는 20년 전의 증인들을 다시 만나고 새로운 증인들을 찾아냄으로 조금 다른 각도에서 조사를 진행한다. 그렇게 얼마 되지 않는 사건의 잔재를 쫓아 결국 가지는 이 사건에 공범이 있었음을 밝혀낸다. 그리고 이어지는 충격적인 결말. 초반에는 약간 늘어지지만 사건을 조사해가는 과정에서 점점 긴장감이 더해지고 결말부 공범과의 대면에서 '이런 발상도 가능하구나' 하는 신선함을 느꼈다.
오래된 사건을 재조사한다는 점에서 미국드라마 <콜드케이스>가 떠올랐는데 두 작품 모두 기본적인 한계는 오랜 시간이 지난 사건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너무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20년 전이 아니라 2년 전, 두 달 전, 심지어는 이틀 전의 기억마저도 가물한데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은 세부적인 디테일까지도 마치 방금 본 것처럼 생생히 기억한다.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어서 기억에 남았다손 쳐도 역시 이런 소재는 이 부분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싶었다. 하지만 이런 태생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저물어 가는 여름>은 신인 작가가 쓴 작품이라기에는 생각보다는 탄탄했고, 신인다운 패기(?)가 느껴져서 좋았다. 책 말미에서 이 책의 편집자는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결말의 정서는 권선징악의 쾌감이 아닌 서글픔과 회한이다"라고 마무리하는데, 그 말처럼 책을 놓고도 하나의 사건으로 한순간에 인생이 바뀌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무더위도 조금씩 꺾이는 정말로 '저물어 가는 여름'날 밤. 맥주 한 잔 마시며 읽으면 씁쓸함이 더해질 책이다.
덧) 책 속에서 범인들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천국과 지옥>의 원작인 <킹의 몸값>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저물어 가는 여름>과 <킹의 몸값>을 함께 읽는 것도 재미를 더할 듯 싶다. 유괴 사건을 어떻게 다르게 다룰 수 있는지 다양한 관점에서 비교하며 보는 즐거움이 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