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어도 얼어도 비틀거려도
미카엘 엥스트룀 지음, 정지인 옮김 / 낭기열라 / 2013년 2월
품절


아빠를 생각하느니…… 차라리 삽을 생각하는 게 나았다.
삽을 생각해.
삽을 생각해.
삽을 생각해.
미크는 어깨를 으쓱했다. 삽……. 뭐라고 말해야 하지? 아빠는 늘 만취 상태, 아니면 숙취 상태, 아니면 둘 다인 상태로 있다고? 아빠는 싸우지는 않지만 많이 운다고? 술에 취하는 횟수와 술을 끊겠다고 약속하는 횟수가 같다고? 그러면 술을 끊겠다고 약속하기와 술에 취하기가 상쇄되어버린다. 아빠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끝이야. 마시래도 더는 못 마셔. 이제 술 끊었어. 아빠는 더는 마실 수 없을 만큼 술을 마신다. 그러고는 또 자기가 그러는 게 넌더리가 나서…… 마신다. 쟁그랑 하고 술병들 부딪치는 소리가 나는 비닐봉지들. 술병들, 곳곳에 술병들, 마개가 열린 술병들, 쓰러진 술병들, 깨진 술병들, 숨겨둔 술병들. 비웃음과 술병들. 고함과 술병들. 울음소리와 술병들. 그리고 지하실에 널린 술병들. 살아야 할 날이 너무 많아. 아빠는 이렇게 말했다. 살아야 할 날이 너무 많아. 술병들이 그걸 줄여주지.
빌어먹을 단어들. 술병, 슐병, 쑬병, 쓸병.
쓰레기.
게우기
삽. -29~30쪽

"미리 정해져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아줌마가 말했다. "언제든 선택할 수 있고, 결정은 네가 내리는 거야."
"제가요? 아니에요. 저는 아무것도 결정 못 하는 걸요. 결정을 내리는 게 누군지도 몰라요. 아마 텡일일걸요."
"네가 이렇게 존재하잖아. 그러니까 네가 결정하는 거야."
미크는 잠깐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자신이 존재한다는 게 어떤 건지 실감 나지 않았다. -41쪽

외로움이 배 속을 갉아댔다. 외로움은 날카로운 비늘이 있는 뱀이다. 그 뱀이 밖으로 날을 세운, 날카로운 비늘을 휘감아가며 배 속을 기어 다녔다. 살을 찢고 긁어대고 살갗을 벗기는 비늘.-44쪽

집에 갈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어디로…… 갈까?
집에 안 가면 어디로 가지? 다들 집에 가는데. -54쪽

고모는 땔감으로 책을 쓰고 있었다. 고모가 난로 안에 책을 차례로 던져 넣고는 놋쇠로 된 덮개를 닫았다.
"곧 따뜻해질 거야."
"책을 넣으신 거예요?"
"다 읽은 책들이야. 책이란 사람이 읽을 때만 의미가 있는 거지. 책이란 건 머릿속에 일어나는 어떤 거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
레나 고모가 책을 한 권 들고는 말을 이었다.
"읽고 난 다음에는 그저 종이만 남겨지는 거야."
"저 많은 책은 다 어디서 난 거예요?"
"좀 유별났던 우리 엄마한테서 물려받았어. 삼천 권. 세어봤지. 저 책들이 겨우내 우리를 따뜻하게 해줄 거야."
"저 책들을 다 읽으셨나요?" 미크가 책 더미와 상자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니, 한참 멀었지. 하지만 많은 책들이 비슷비슷해. 얼마간의 살인과 얼마간의 사랑, 뭐 그런 거지. 또 너무 형편없어서 곧바로 태워버릴 책도 많고."-8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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