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대전 Z 밀리언셀러 클럽 84
맥스 브룩스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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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믿지 않습니다. 어리석거나 약해서가 아니라 인간 본성이 그렇죠. 믿지 않는다고 해서 누구든 비난할 생각은 없어요. 내가 그런 사람들보다 더 영리하다거나 더 잘났다고 우기고 싶지도 않아요. 내 생각에 정말 중요한 건 우리가 고향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겁니다. 나는 우연히도 자기 일족이 멸종될까 끊임없이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조상으로 둔 것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이자 사고방식의 일부죠. 우리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어요.-55쪽

진실은 CIA든 미국의 어떤 공식, 비공식 정부 기관이든 간에 그렇게 전지전능하게 모든 것을 꿰뚫고, 모든 것을 다 아는 철인들이 아니라는 거요. 우선 우리에겐 그만한 자금이 없어요. 심지어는 백지 수표를 휘날리던 냉전 시대에도 지구 상에 있는 모든 뒷방, 동굴, 골목길, 매음굴, 엄폐호, 사무실, 가정, 차, 논을 감시할 만한 눈과 귀를 동원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았소. 오해하진 마시오. 우리가 무능하다는 말을 하자는 건 아니니까. 아마 우리 팬들과 비평가들이 오랫동안 우리가 했다고 의심했던 일들 중 일부는 정말로 우리 작품일 수도 있소. 하지만 진주만 시절부터 대공포 시절까지 떠돌던 모든 터무니없는 공모 이론을 합쳐 보면 미국보다 더 강력한 조직일 뿐 아니라 인류 전체의 노력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강력한 조직이 나올 게요.-77~8쪽

우리는 고대의 비밀과 외계인의 기술을 지닌 은밀한 초능력 집단이 아니오. 아주 현실적인 한계와 극단적으로 제한된 재원을 가진 조직일 뿐인데 모든 잠재적인 위협을 추적하느라 그 빈약한 재원을 다 써 버려야 한다는 게 말이 되오? 이 점이 바로 정보기관의 실상에 대한 두 번째 신화를 건드리게 되지. 우리는 우연히 새롭고 그럴듯한 위험을 찾기를 빌면서 마냥 부족한 재원으로 무리하게 일을 벌일 순 없소. 대신 이미 분명하게 존재하는 위협을 찾아 거기에 초점을 맞추는 거지.-78쪽

선생은 경제에 대해 좀 아시오? 내 말은 전쟁 전 알짜배기인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해 좀 아냐 말이오. 그 경제란 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시오? 난 그런 거 잘 모르고, 안다고 떠들어 대는 놈들은 모두 헛소리를 하는 거요. 경제에는 어떤 규칙도 없고, 과학적으로 절대적인 사실도 없소. 돈을 따는 것도 잃는 것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노름과 같은 거지. 그나마 납득이 갔던 유일한 규칙은 워튼 경영대학원의 경제학 교수가 아니라 역사학 교수에게서 배운 거요. 그 양반이 그러더군. '두려움.'
"두려움이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고가의 상품이다."-89쪽

늙는 게 두렵고, 외로울까봐 두렵고, 가난해질까 두렵고, 실패할까봐 두려운 것. 두려움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감정이지. 두려움이 바로 핵심이라는 거요. 인간의 두려움만 건드리면 뭐든 팔아먹을 수 있다. 그게 내 영혼의 진언이었소.-90쪽

당신이 정말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소? 범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냐고? 질병, 실업, 전쟁, 아니면 다른 사회적인 질환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소? 절대 아니지. 그나마 바랄 수 있는 건 사람들이 계속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만 그 문제들을 관리해 주는 거요. 이런 건 냉소주의가 아니라 성숙이라 부르는 거요. 비를 멈추게 할 순 없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지붕을 만들어 놓고 새지 말라고 빌거나, 아니면 최소한 우리에게 표를 던질 사람들은 비를 맞지 않게 해 주는 거지.-99쪽

대통령은 내게 물리적이거나 물류적인 문제에 대처하는 데 필요한 힘을 주셨지. 유감스럽게도 대통령이든, 지상의 그 누구든 내게 줄 수 없었던 것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바꿀 수 있는 힘이었소. 내가 전에 설명했던 것처럼 미국의 노동력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었고, 많은 경우 그런 분리에는 문화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소. 우리 강사들 중 절대 다수가 이민 1세대들이지. 이 사람들은 자기 한 몸 돌보는 방법도 알고 있었고, 최소한의 물자를 가지고 자기들의 능력만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익힌 사람들이오. 뒷마당에 텃밭을 가꾸고, 자기 집을 직접 수리하고, 기계적으로 수명이 다할 때까지 최대한 오래 가전제품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지. 이런 사람들이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우리의 편안한, 일회용 위주의 소비 생활 양식과 결별하도록 가르치는 게 아주 중요했소. 비록 이들의 노동력 덕분에 애초에 우리가 그런 생활양식을 누릴 수 있었지만.-227~8쪽

"지금이야말로 이상을 좇아야 할 유일한 때요. 우리가 지금 가진 거라곤 이상밖에 없으니까. 우리는 단순히 우리의 육체적 생존만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명을 살리기 위해 싸우고 있소. 우리는 유럽이 지니고 있는 지주 같은 사치품이 없소. 우리게엔 공통된 유산도 없고, 천 년에 걸친 역사도 없소. 우리가 가진 거라곤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는 꿈과 약속밖에 없소. 우리가 가진 거라곤……(기억해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우리가 가진 건 우리의 이상뿐이오."
각하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자네도 알겠지. 미국이 존재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이 나라를 믿고 있기 때문이고, 만약 그 믿음이 우리를 이 위기로부터 보호해 줄 만큼 강하지 못하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떤 미래를 꿈이나 꿀 수 있겠나? -240~1쪽

대통령도 미국이 강력한 지도자를 원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이 나라의 종말을 의미하는 거야. 사람들은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하지. 내 생각은 달라. 나는 수많은 나약함과 도덕적 타락을 목격했어. 도전에 맞서 분연히 일어나야 할 사람들이 그럴 수 없었거나 그렇게 하지 않았어. 탐욕, 공포, 우둔함, 증오 때문이었지. 전쟁 전에도 그걸 목격했고 지금도 그게 보여.-241쪽

에이디에스(ADS), 그게 나의 적이었지. 자각 증상 없는 사망증후군(Asymptomatic Demise Syndrome) 또는 종말론적인 절망 증후군(Apocalyptic Despair Syndrome)이라고나 할까, 말하는 상대에 따라 다르겠지. 이름이 뭐든 간에 그것이 전쟁 초기 막다른 상황에 몰린 몇 달 동안 기아, 질병, 인간 간의 폭력, 혹은 좀비가 죽인 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 아무도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지. 우리는 로키 산맥 방어선을 안정시켰고, 안전지대를 위생 처리했는데도 하루에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어 나갔어. 자살은 아니었어. 물론 자살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아냐, 이건 경우가 달랐어. 어떤 사람들은 아주 작은 상처를 입었거나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을 앓고 있었고, 건강 상태가 완벽한 사람들도 있었지. 이 사람들은 그냥 밤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다음 날 영영 저세상으로 가버린 거야.-258쪽

문제는 심리적인 거였지, 포기해 버리고 내일을 맞고 싶지 않았던 거야. 내일은 더 많은 고통을 겪게 될 거라는 걸 아니까. 믿음, 버텨내고자 하는 의지를 상실하는 일은 모든 전쟁에서 발생하기 마련이지. 평상시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긴 하지만 이렇게 대대적인 규모로 발생하는 건 아니지. 이건 그야말로 글자 그대로 무력감, 혹은 무력하다고 인식하는 거야. 나도 그런 기분을 이해할 수 있어.-259쪽

거짓말이 아니냐고? 괜찮아. 그렇게 말해도 돼. 그래, 그건 거짓말이고 때로는 거짓말이 나쁜 게 아냐. 거짓말은 사실상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냐. 거짓말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불처럼 사람들을 따뜻하게 데워 줄 수도 있고, 태워 죽일 수도 있지. 정부가 전쟁 전에 우리에게 한 거짓말들, 우리를 계속 아무것도 모르는 행복한 바보들로 만들려고 했던 거짓말들은 우리를 태워 버린 거짓말들이지. 그것 때문에 우리는 했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했어.-269쪽

진실은 이런 거야. 우리가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전부는 아니더라도 우리 대부분은 결코 미래를 보지 못했을 거야. 진실은 우리가 인류라는 종족의 황혼기에 서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고, 그 진실이 매일 밤 수백 명을 얼려 죽이고 있어. 그 사람들은 밤새 그들을 지켜 줄 따뜻한 뭔가가 필요했던 거야. 그래서 나는 거짓말을 했고, 대통령도 했고, 모든 의사와 신부와 소대장과 부모들이 거짓말을 했지.
"우리는 괜찮을 거야."
그게 우리의 메시지였어.-269~270쪽

그 영화에서 영웅들의 암울한 면을 보여 주던가? 그 영화에서 일부 '영웅'들의 마음에 숨겨진 폭력과 배신과 잔혹함과 비행과 끝을 알 수 없는 사악함을 보여 주던가? 아, 물론 아니겠지. 왜 그래야 했겠나? 그게 바로 우리의 현실이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촛불을 끄고 이승을 하직해 버린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마티는 대신 또 다른 면, 사람들을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게 하고, 누군가 그들에게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 주기 때문에 사력을 다해 살아남게 만드는 면을 보여 주기로 한 거야. 그런 거짓말에는 또 다른 이름이 있지. 그건 희망이라고 부른다네.-271쪽

무지가 우리의 적이었어요. 거짓말과 미신, 오보, 허위 정보가 적이었죠. 가끔은 정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무지가 수십억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무지가 좀비 전쟁을 일으켰어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고 있었다면 어땠을지 한번 상상해 보세요. 만약 지금 우리가 결핵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 그때 좀비 바이러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면 어땠을지 한번 상상해 보세요. 세계 시민들이, 아니면 적어도 이 시민들을 보호할 책임을 진 사람들이 자신들이 맞선 상대에 대해 정확히 알고만 있었더라도. 무지가 우리의 진정한 적군이었고 냉엄하고 확실한 정보가 무기였어요.-3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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