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술 1 - 시원한 한 잔의 기쁨
하라다 히카 지음, 김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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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이 시국이라 일주일에 절반 정도는 도시락을 싸와서 혼밥을 하기 시작했다. 약 15분 정도 여유롭게 도시락을 먹으면서 잠시 마스크를 벗고 여유를 부렸지만 뭔가 좀 심심해서 짧게 볼 만한 드라마가 없을까 찾다가 일본드라마 <오늘 밤은 코노지에서>를 보게 됐다. 20분 남짓 길이라 부담없이 볼 수 있는 이 드라마는 <고독한 미식가> <와카코와 술>처럼 퇴근 후 술 한잔을 즐기는 직장인의 모습을 잘 담고 있었다. 우연한 계기로 코노지(우리로 치면 디귿자 모양 테이블이 있는 술집)에 입문한 주인공이 이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삶에 대해서 배우고, 직장인으로서도 한 뼘 성장해간다는 이야기인데 퇴근 후 한 잔의 술에 피로를 씻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면서 볼 만한 드라마가 아닐까 싶었다. <오늘밤은 코노지에서>를 본 뒤 '얼른 날이 좋아져서 밖에서 술 마시고 들어가고 싶다!'를 외치다가 만나게 된 책이 바로 하라다 히카의 <낮술>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 쇼코 또한 퇴근 후 한 잔 마시고 집에 들어가는 게 루틴인 평범한 직장인이다. 다만 그 일이라는 것이 9-6 근무가 아니라 밤 근무라 퇴근 후 한잔이 낮술이 되어버린다. 주인이 자리를 비워서 홀로 남겨진 반려견, 아픈 아이, 노모, 혼자 보내는 밤이 적적한 중년 여성 등 다양한 이들의 곁을 지키고 퇴근하고 집에 가면서 마시는 한 잔의 (낮)술. 고정적인 일이 아니고 의뢰인의 요청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일이다보니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대부분 하룻밤 짧은 인연에 그치는 사람들의 삶에 잠시 들어가 시간을 함께하며 쇼코는 점점 자신과도 마주해 힘을 얻게 된다.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라 어떤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하라다 히카의 소설을 읽으며 오래전 하루키의 에세이 제목처럼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을 수 있었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통장에 돈이 쌓여야, 값비싼 물건을 사야 행복한 게 아니다. 하루 일을 마치고 고단한 하루 끝에 접하는 맛있는 음식, 그리고 거기에 잘 어울리는 술 한 잔(그리고 지금은 좀 힘들지만 좋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면 어느새 하루의 피로가 싹 씻기고 움츠러들었던 가슴도 조금 펴지지 않은가. 책 속에서 쇼코는 혼자서 고기덮밥, 회정식, 우설, 바쿠테, 장어덮밥, 오므라이스, 전갱이튀김 등을 곁들여 한잔 술을 마시며 오늘 하루도 잘 보냈다고, 고생했다고 한 끼 식사로 작은 위로를 찾는 것만 같았다.


맛있는 음식이란 건 정말 근사하다.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포근하게 해주니까. 우리는 부족한 인간이고 지금껏 그래왔듯 앞으로도 분명 실수를 저지를 것이다. 그래도 오늘은 그럭저럭 잘해냈다. 그러면 된 것 아닐까. 이후에도 문제는 얼마든지 생기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 _247쪽


직장에서 인간관계를 쌓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쇼코의 경우에는 대부분 한 번의 인연으로 그친다. 그래서 가끔 '그 사람은 어떻게 지내려나'라는 생각이 들지만 '아니, 나 같은 사람을 부르지 않는 게 행복한 일일지도 모르지. 나를 부르지 않는 건 고객이 행복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하자. 상대가 잊었더라도 내가 기억하면 되니까.' 쇼코는 지금껏 심야에 자신을 불러준 고독한 사람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45쪽)한다. 하지만 '지킴이'를 부르는 '고독한 사람들'처럼 쇼코 역시 (따뜻한 음식만큼) 사람의 온기를 필요로 한다. 이혼 후 남편과 함께 살던 시부모의 집에 딸을 맡기고 나와 혼자 사는 상황. 아이를 키우기에는 자신보다는 남편 쪽의 환경이 더 좋다고 판단해 혼자 살고 있지만 언젠가 경제적 기반을 다져서 아이와 다시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문 기술도 없고 경단녀 쇼코가 할 만한 일은 그리 많지 않아 일단은 친구를 도와 '지킴이' 일을 하며 길을 찾는 중이다. 어찌 보면 쇼코가 지킴이로 일을 하고 다양한 삶을 접하고 혼밥과 낮술을 즐기는 이 시간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시기일지도 모른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다가 마침내 일어나 자신의 길을 찾으려는 힘을 내는 쇼코의 모습 때문에 책을 읽고 나면 역자의 말처럼 쇼코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지도 모르겠다. 오늘 하루도 쇼코도, 우리 모두도 잘 살아냈다.


'나는 살아 있고 건강하다. 기운 내자. 주저앉아 있을 수 없지.' 자, 오늘도 꿋꿋이 살아가자. _208쪽


뱀발.


<낮술>에서 쇼코가 하루를 마무리하는 가게는 모두 진짜 있는 식당이라고 한다. 일본의 한 독자가 이 장소들을 직접 방문해서 쇼코가 먹었던 메뉴들을 먹었다는데 언젠가 상황이 좋아지면 겸사겸사 나도 쇼코의 흔적을 좇아 소중한 한끼를 맛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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