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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평점 :
출간 후 50년이 지나서야 기적처럼 부활해 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이 소설의 홍보 문구를 보고 처음에는 '다소 과장 섞인 찬사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대체 어떤 소설이길래' 싶었기에 '어디 한 번 보자' 하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다가 나도 모르게 빨려들어가듯이 이야기에 몰입했다. 담담하게, 그리고 때로는 휘몰아치듯이 이어지는 이야기에 몇 번씩 답답함에 가슴을 치면서도 자꾸만 '내가 스토너였다면' 하고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사실 <스토너>는 독창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한 남자의 삶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라는 소설의 시작처럼 스토너는 전쟁이라는 혼란 속에서도 일상을 견디어가는 삶을 택해 눈에 띄지 않게 '살아가는' 남자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50년이 지난 뒤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이러한 개략적인 줄거리 때문이 아니다. 스토너라는 한 남자의 모습에서 고독한 인간의 뒷모습이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농사일을 도우며 묵묵히 살아온 스토너는 아버지의 제안으로 농과대학에 진학하나 2학년 때 영문학 개론 강의를 듣고 책을 읽고 급기야 "넌 교육자가 될 사람"이라는 타과 교수의 말을 듣고 생각지도 못한 인생의 길에 들어선다. 그는 결국 아버지의 뒤를 잇는 농부가 아닌 공부를 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자의 길로 들어서 한눈팔지 않고 그 길을 걷는다. 공부를 하고, 한 여자의 남편이 되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스토너의 삶은 그렇게 특별한 굴곡 없이 '평범하게' 흘러간다. 히스테릭한 아내의 모습에도, 동료 교수와의 트러블에도, 아이와의 관계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어긋나도 스토너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때로는 그 감정을 속으로 삭이며, 때로는 애써 무시하며 살아간다. 타인을 대하는 자신의 서투름을 받아들이고, 때로는 학생들을 향한 애정이나 연구에 대한 열정에 스스로 놀라기도 하지만 그의 인생은 흔들림 없이 이어진다. 하지만 "앞날에는 즐겁게 여길 만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뒤를 돌아보아도 굳이 기억하고 싶은 것이 별로 없었"던 그의 삶에도 사랑이라는 반짝이는 순간은 찾아온다. 반짝이는 빛이 사라지는 순간, 그의 등은 더욱 굽어들고, 굽어진 몸만큼 그는 내면으로 침잠한다.
"이 소설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스토너의 삶을 슬프고 불행한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의 삶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나은 삶을 살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에 어느 정도 애정을 갖고 있었고, 그 일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했으니까요"라는 작가의 인터뷰처럼 스토너는 종신교수라는 직책도 얻었고, 고독하긴 하지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도 있으며, 삶을 뒤흔든 사랑에도 빠져봤으니 그럭저럭 괜찮은 삶을 살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그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그의 이야기에 눈물짓는 것은 그가 '슬프고 불행한' 삶을 살기 때문이 아니다. 스토너가 그랬듯 우리의 삶도, 아니 나의 삶도 그렇게 고독하게 흘러가고 있어서였다.
스토너가 인생의 마지막에 그랬듯 나 또한 책을 놓으며 "넌 무엇을 기대했나?"라고 자문했다. <스토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만 한다고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책은 아니다.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한바탕 울음을 터트리게, 그리고 조금은 어깨에 힘을 뺄 수 있게 도와주는 책이다. 결국 고독하고 상처받은 우리를 치유해주는 건 사람임을, 문학임을 <스토너>를 통해 다시 한 번 느꼈다. 스토너라는 이름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