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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의 도시
폴 오스터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바다 저 편. 폐허의 도시로부터 온 편지. 이 편지 속에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점점 삶에 대해 망각하고 있는 사람들의 절망이 절망이 아닌 것처럼 되어버린 장소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외부 사람의 눈으로 바라봤을 때일 뿐. 이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정작 자신들의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노동의 고통에 대해 너무도 익숙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하루하루를 인간다움과는 멀게 살아가고 있다. 도시에서 인간다움을 지키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과 외부에서 특파원인 오빠를 찾기 위해 이 곳에 들어왔다가 오빠는 찾지 못하고 점점 더 절망적인 삶에 젖어가는 안나 블룸이라는 이 여성만이 오직 제대로 된 사고를 하고 현실에 맞서 싸우려고 노력할 뿐이다.
단순히 자신의 욕심을 위해, 자신의 몸 하나 건사하기 위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을 빼앗고, 그들이 잠시라도 틈을 보이면 그들을 무너뜨리려고 한다. 폐허의 도시 속에서 잠시 한 눈을 팔면 먹고 살기 위해서 가지고 다니는 수레마저도 누가 훔쳐가버리는 것처럼.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수레를 허리에 묶고 거리를 다녀야하는 주인공처럼 끊임없이 주위를 경계하고, 내가 가진 것을 뺏기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간다. 하지만 이런 삭막한 삶 속에서도 남을 도우려고 하는 일부의 사람은 아직까지 존재한다. 모든 것이 무너졌지만 그래도 한 줄기 희망은 남은 상태. 온갖 범죄가 저질러지면서도 한 편에서는 불우이웃돕기 성금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궂은 일도 하는 우리의 삶과 과연 무엇이 다를까?
과연 폐허의 도시가 디스토피아인가? 혹은 현대사회가 붕괴된다면 이렇게 될 것인가를 떠나서 이 책 속에는 폴 오스터가 좋아하는 요소들이 많이 등장한다. 배고픔이나 추위와 같은 기본적인 조건이 부재한 상황, 고립이라는 특수한 상황, 부정적인 세계를 벗어나려는 주인공의 노력. 이런 점들은 폴 오스터의 여러 작품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요소가 아닐까 싶다. 때문에 폴 오스터의 다른 작품들을 읽기 전에 이 책을 읽는다면 다른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좀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왔다갔다 뒤죽박죽 순서대로 읽어서 영 엉망으로 정리되버린 것 같지만)
여담이지만 이 책은 편지의 형식으로 쓰여진 책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갈 수록 주인공은 편지가 점점 더 작은 글씨로 쓰여진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런 점을 반영해서 책의 결말 부분에서는 글씨의 크기를 조금 줄여서 독자가 실제로 안나 블룸이라는 여성의 편지를 읽는 것처럼 느낄 수 있게 해줬다면 좀 더 생동감있는, 좀 더 센스있는 편집이 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폴 오스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좋아할 법한 책이지만 폴 오스터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 책으로 처음을 시작하는 것은 그리 권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폴 오스터 입문으로는 <달의 궁전>이나 <뉴욕 삼부작>이 제격이라는 생각) 하지만 이왕 이 길고도 절망적인, 하지만 약간의 희망이 섞인 편지를 읽을 참이라면 이 책만을 위한 온전한 시간을 빼놓기를. 중간에 끊어버리기 힘들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