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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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의 작품마다 시대의 핫이슈와 맥을 같이 하는 경향이 있는데, 울분은 그 중 6.25 한국 전쟁이다. 작가 노년에 10대와 20대를 회상하며 50년대 초, 유대인이라는 사회적 시대적 배경 카테고리에서의 캠퍼스 생활, 젊은이 특유의 학업에 대한 열정, 종교에 대한 부조리함, 성애에 눈뜸, 혹은 전통적인 가족관(가급적 일찍 결혼해 가족을 만들고 싶어하는 것)과의 사이에서 오는 죄의식(?)을 그리고 있다. 도식적으로 말하기는 뭣하지만, 젊은 주인공은 울분에 관하여 발을 살짝 잘못 디뎠을 뿐인데, 한국 전쟁에서 전사하는 최후를 맞이한다.  

 

주인공은 부모님을 떠나 대학에 가서 법률가가 되려고 한다. 정육점을 하는 부모님의 피가 잔뜩 묻어 악취가 풍기는 앞치마와 같은 성실히 일하는 삶과 멀어지는 길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가르치는 정육점 일을 순순히 배웠지만, 아버지는 그가 피를 좋아하도록 가르치지는 못했다. 미리 걱정하고 염려하며 주인공의 삶에 제한을 두는 광신자 같은 아버지는 공부에 전념하는 아들의 태도를 자랑스러워하며 그의 대학 학비를 대기 위해 보조하던 직원을 내보내면서 열심히 일하셨고, 일을 쉬던 어머니도 정육점 일을 시작하셔야 했다.

 

내가 여기 있고 이 일이 필요하면 내가 하는 거야.”

필요가 없다니까요. 오늘 아침에도 제일 먼저 거기부터 청소하더라고요.”

욕실이 그럴 필요가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머니가 그럴 필요가 있었다. . 어떤 사람들은 일을 갈망한다. 어떤 일이든. 가혹하든 고약하든 상관없다. 자기 삶의 가혹함을 쏟아내고, 마음에서 자신을 죽일 것 같은 생각들을 몰아내기 위해. 어머니는 욕실에서 나왔을 때 다시 나의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네 아버지와 이혼하지 않을 거다. 마커스. 결심했어. 그냥 견딜 거야. 네 아버지를 돕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걸 다 할 거야. 도움이 될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네가 나한테 바라는 거라면, 그게 나 자신이 바라는 것이기도 해. 너는 이혼한 부모를 원치 않고, 나는 네가 이혼한 부모를 갖는 걸 원치 않아. (...) 계속 네 아버지와 살게, 무슨 고생을 하더라도.”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은 역시 깊고 독특한 기쁨이다. 도덕적, 정치적 정당화를 요구하지 않는 흥미롭고 신비로운 인간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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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주커먼 시리즈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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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시작으로 해서 필립 로스의 주커먼 시리즈를 감사하게 하릴없이 사치스럽게 읽겠다!

 

372~373쪽

가끔 돌이켜보면, 내 삶은 지금까지 내가 귀기울여 들어온 하나의 긴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그 수사법은 때로 독창적이고, 때로 즐겁고, 때로 허풍이고(익명의 이야기들), 떄로 정신나간 듯 보이고, 때로 사실 그대로이고, 때로 바늘처럼 날카로웠다. 기억이 미치는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항상 이야기를 들어왔다.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어떻게 생각하지 말아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하지 말아야 할지, 누구를 미워하고 누구를 존경해야 할지, 무엇을 포용하고 언제 도망쳐야 할지, 무엇이 황홀하고, 무엇이 잔혹하고, 무엇이 찬양할 만하고, 무엇이 얄팍하고, 무엇이 불길하고, 무엇이 쓰레기인지, 그리고 어떻게 영혼을 순수하게 지켜야 할지에 대해. 나에게 얘기할 땐 어느 누구도 벽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아마 여러 해 동안 내가 이야기를 들어야만 한다는 듯한 모습으로 돌아다닌 결과일 것이다. 

 

434~435쪽

선생님이 말했다. "그게 말해주는 교훈은 이거라네.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를 이데올로기의 손에 헌납하기로 작정하면, 개인적인 건 몽땅 거품처럼 빠져나가고 이데올로기에 유용한 것만 남는다는 것.

 

437쪽

상대에게 입힐 수 있는 피해, 가할 수 있는 고통을 위해. 그 속에 숨겨진 잔인함을 위해. 잠재된 힘을 입증하는 쾌감. 남을 지배하고, 적을 파괴하는 쾌감. 그들을 불시에 덮치는 거지. 그게 배신의 기쁨 아닌가? 누군가를 속이는 쾌감. 그건 그들이 안겨준 열등감, 그들에게 무시당한 느낌, 그들과의 관계에서 느낀 좌절감을 되갚는 방법이야. 내가 그들이 아니기 때문에 혹은 그들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 자체가 내겐 굴복이지. ... 영웅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네. 평범한 삶이란 매일 수천가지를 놓고 벌여야 하는 싸움의 연속이지.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은 고문을 견디는 것은 고사하고, 별안간 타협을 일체 거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네. 그런 훈련이 안 되어 있거든.

 

529쪽

"지구는 핑핑 돌아! 네이선, 시간은 내 편이 아닐세!"

 

531쪽

한쪽에서 배신을 억누르면 결국 다른 쪽에서 배신이 튀어나온다. 그건 정적인 체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살아 있기 때문이고, 살아 있는 건 모두 움직이기 때문이다. 순수함은 돌처럼 굳은 것이고,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536쪽

더는 아옹다옹 다투고 싶지 않은 모든 것을 내팽개쳤다. 그리곤 살아가고 일하는데 필요한 것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과거라면 내 눈에 턱없이 부족하게 보였을 최소한의 것에서 나는 충분한 만족을 얻기 시작했고, 오로지 글쓰는 일에만 열심히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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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2 10: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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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독서의 힘 - 출퇴근 시간에 만드는 독서습관과 책 읽기
안수현 지음 / 밥북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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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로 출퇴근을 한다. 지하철 안에서 책을 읽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는데, 책을 읽을 때가 몰입의 즐거움이 큰 것은 맞는 듯하다.

 

책을 읽다보면, 그렇게 읽은 책들이 쌓이면 우뚝 솟은 나 자신이 되어 있을거라는 이야기들에는 반신반의한다. 그렇지만 시간을 보내는 한 방법으로써~ 독서만큼 좋은 것은 없는 것 같고, 아무리 바빠도 읽고 싶은 책은 짬짬히 읽을 수 있다. 의지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본능의 영역이 아닐지. 단 이 단계에 이를 만큼 좋아하고 재밌어하는 분야가 있어야겠지만.

 

직장다니며 일하는 젊은(? 내년에 마흔이라니 젊은 거고, 아이도 어리고) 엄마가 자기가 읽은 책들을 인용하며 인생에서 책읽기가 왜 필요하며 그것을 일상에서도 실천하는 노하우를 전하며 책일기를 독려하는내용의 책이었다. 작가 개인으로서는 보통 치열한 도전과 의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일단 작가에게 박수를!!!!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라는 글을 쓴 김정운 교수의 인터뷰 중에서

50대가 된 작가님이 생각하는 성공한 삶은 어떤 삶인가요?

사람들은 돈 많이 벌고 지워가 높으면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일부고요. 성공한 삶의 조건은 재미있느냐 예요. 아침에 일어나면 즐겁고 내일을 생각하면 설레고, 그게 성공한 삶이에요. 그리고 설레는 삶의 조건은 공부하는 삶이죠. 자기 좋아하는 걸 찾아내서 그걸 죽을 때까지 공부하다 보면 매일 즐겁고 가슴 설레는 거예요.“

 

가끔은 손가락질 받고 넘어지고 상처받더라도 내 인생이니까 용기를 내서 내 뜻대로 살아봐야 한다.”

 

하버드대를 졸업한 40대 직장인 1,600여 명에게 당신이 현재 하는 일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과 대학 시절 가장 도움이 된 수업은 무엇인가?’ 물었더니, 뜻밖에도 90% 이상이 글쓰기라고 답했다 한다. ..졸업생들은 막상 사회에 나가 보니 현장 업무의 50% 이상이 글쓰기와 관련되어 있고 직위가 올라갈수록 글쓰기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걸 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글이 써지는 순간이 있다. 그때가 언제였는지 가만히 생각해 본다. 새로운 사건은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한다. 새로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 때 글이 써졌다. 항상 같은 생활 패턴을 하고 같은 사람을 만나서는 새로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책은 새로운 사람의 생각을 만나게 해 준다.”

 

수필 문학의 꽃을 피운 공로자로 인정받는 영국의 수필가 찰스 램은 인도회사에서 회계원으로 일하다가 50세가 되어서야 정년퇴직했다. 몇 년 후 그는 자유롭게 쓰고 읽을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 자신을 축복해준 동료 여직원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바빠서 글을 쓸 수 없다는 사람은 시간이 있어도 글을 쓰지 못합니다. 좋은 생각도 바쁜 가운데서 떠오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타케오 와타나베 미국 브라운대 인식언어 및 심리학과 교수팀은 학습 능력에서는 노인과 젊은이 사이에 별 차아기 없지만 꼭 필요한 정보만 선별하는 능력에서는 노인이 젊은이보다 확연히 떨어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공부를 어렵게 느낀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연구진이 실험을 진행한 9일 동안 실험 초기보다 후기에 노인의 인지 능력이 훨씬 향상됐다고 한다. 반복해서 훈련할수록 노인들의 시각 판별력이 젊은이들만큼 좋아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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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박성관 옮김, 와이다 준이치 사진 / 문학동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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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 대해 말하는 것의 어려움

 

아인슈타인의 관한 책들은 ... 그는 물론 천재입니다만, 그의 어디가 어떻게 뛰어났는지에 전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선 그의 연구 성과인 상대성이론이나 양자론을 한마디로 간결하게 가르쳐주길 바라는 사람이 많은데요, 그거 참 곤란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듣는 사람이 물리학이나 수학에 대해 어느 정도 기초 지식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전해야 할 내용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과학의 최첨단 이론은 예비 지식을 갖추지 않은 상대에게 한마디로 전달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과학에 관련된 책들도 어느 정도 수준의 독자를 대상으로 할 것인지 먼저 설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전달할 수 없는 그런 면이 있습니다. 최첨단 일보직전까지는 모두 이해하고 있어서 최신의 연구 성과만을 전하면 되는 사람인지, 아니면 초보의 초보에 대한 해설부터 시작해서 최신 연구 성과의 엑기스만을 전달하면 되는 사람인지.... 대단히 폭넓은 선택지가 있고, 그래서 어느 길을 선택했는가에 따라 이야기의 수준도, 또 분량도 모두 달라지는 것. 그렇기 때문에 과학 분야의 책을 읽을 때는 그 저자가 어떤 수준의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쓴 책인지 재빨리 판단하고, 자신이 그 수준의 독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나서 읽지 않으면,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을 읽게 되기 일쑤입니다. 수준이 너무 안 맞는 책을 읽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설명 수준이 적절한지 아닌지가 더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이 판단은 단지 과학만이 아니라 다른 영역의 책을 읽을 때에도 늘 중요합니다.

의사소통에 있어서도 우선 상대의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서로 가늠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화제라도 그 화제에 대해 약간의 대화를 통해서 상대의 이해 수준을 판단하고, 그에 맞는 대화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입니다. 공학적인 세계에서 서로 다른 종류의 온갖 시스템들을 서로 연결시킬 때 먼저 규격을 맞추고 시작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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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박석무 엮음 / 창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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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36~37/39~40, 정약용 지음 박석무 편역, 창비

 

오직 독서만이 살아 나갈 길이다.

 

이제 너희들은 망한 집안의 자손이다. 그러므로 더욱 잘 처신하여 본래보다 훌륭하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기특하고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폐족으로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하는 것 한 가지밖에 없다. 독서라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깨끗한 일일 뿐만 아니라, 호사스러운 집안 자제들에게만 그 맛을 알도록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촌구석 수재들이 그 심오함을 넘겨다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드시 벼슬하는 집안의 자제로서 어려서부터 듣고 본 바도 있는 데다 중간에 재난을 만난 너희들 같은 젊은이들만이 진정한 독서를 하기에 가장 좋은 것이다. 그들이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뜻도 의미도 모르면서 그냥 책만 읽는다고 해서 독서를 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독서를 하려면 반드시 먼저 근본을 확립해야 한다. 근본이란 무엇을 일컬음인가. 학문에 뜻을 두지 않으면 독서를 할 수 없으며, 학문에 뜻을 둔다고 했을 때는 반드시 먼저 근본을 확립해야 한다. 근본이란 무엇을 일컬음인가. 오직 효제(孝悌)가 그것이다. 반드시 먼저 효제를 힘써 실천함으로써 근본을 확립해야 하고, 근본이 확립되고 나면 학문은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들고 넉넉해진다. 학문이 이미 몸에 배어들고 넉넉해지면 특별히 순서에 따른 독서의 단계를 강구하지 않아도 괜찮다.

또한 나는 천지간에 의지할 곳 없이 외롭게 서 있는지라 마음 붙여 살아갈 것이라고는 글과 붓이 있을 뿐이다. 문득 한 구절이나 한 편 정도 마음에 드는 것을 만났을 때 다만 혼자서 읊조리거나 감상하다가 이윽고 생각하길 이 세상에서는 오직 너희들에게나 보여 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너희들 생각은 독서에서 이미 연()나라나 월()나라처럼 멀리 떨어져 나가서 문제를 쓸데없는 물건 보듯 하는구나. 쏜살같은 세월에 몇 년이 지나면 나이 들어 신체가 장대해지고 수염도 텁수룩해질 텐데 갑자기 얼굴을 대면하다 해도 밉상스러워지기만 하지 아버지의 책을 읽으려고나 하겠느냐. 내가 보기에는 천하에 불효자였던 조()나라의 조괄(趙括)은 아버지의 글을 잘 읽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어진 아들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너희들이 참으로 책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내 저서는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내 저서가 쓸모없다면 나는 할 일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마음의 눈을 닫고 흙으로 빚은 사람처럼 될 뿐 아니라 열흘이 못 가서 병이 날 것이고 이 병을 고칠 수 있는 약도 없을 것인즉, 너희들이 독서하는 것이 내 목숨을 살려 주는 것이다. 너희들은 이런 이치를 생각해 보거라.

 

독자

주제

목적

두 아들

독서의 중요성을 알고, 독서에 힘쓰기를 바람.

폐족의 처지에서 자식들에게 살아 나갈 방도를 가르치기 위해 씀.

매체

필자의 입장

글의 유형

 

유배를 당해 자식과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

편지글

* 1, 2문단은 2007 개정 천재교육 독서와 문법36p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59~60, 정약용 지음 박석무 편역, 창비

 

남의 도움을 바라지 말고 도와줘라

 

너희들은 편지에서 항상 버릇처럼 말하기를 일가친척 중에 긍휼히 여겨 돌보아 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개탄하더구나. 더러는 험난한 물길 같다느니, 꼬불꼬불 길고 긴 험악한 길을 살아간다느니 한탄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미워하는 말투니 큰 병통이다. 전에 내가 벼슬을 지낼 때에는 조그마한 근심이나 질병의 고통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돌봐 주게 마련이어서 날마다 어떠시냐며 안부를 전해 오고, 안아서 부지해 주는 사람도 있고, 약을 먹여 주고 양식까지 대 주는 사람도 있어서 너희들이 이런 일에 익숙해진 것 같다. 그래서 항상 은혜를 베풀어 줄 사람이나 바라면서 가난하고 천한 사람의 본분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남의 도움이나 받으면서 살라는 법은 애초부터 없었다. 더구나 우리 일가친척은 서울과 시골에 뿔뿔이 흩어져 있어 은정(恩情)을 입을 수도 없었다. 지금 와서 공박하지 않는 것만도 두터운 은혜일 텐데 어떻게 돌봐 주고 도와주는 일까지 바라겠느냐? 오늘날 이처럼 집안이 패잔(敗殘)하기는 했지만 다른 일가들에 비하면 오히려 부자라 할 수도 있겠다. 다만 우리보다 못한 사람을 도와줄 힘이 없을 뿐이다. 남을 돌볼 여력이 없으나 그렇게 극심하게 가난하지도 않으니, 바로 남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될 처지라는 뜻 아니겠느냐? <중략> 마음속으로 남의 은혜를 받고자 하는 생각을 버린다면 저절로 마음이 평안하고 기분이 화평스러워져 하늘을 원망한다거나 사람을 원망하는 그런 병통은 사라질 것이다.

여러 날 밥을 끓이지 못하는 집이 있을 텐데 너희는 쌀되라도 퍼다가 굶주림을 면하게 해 주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눈이 쌓여 추위에 쓰러져 있는 집에는 장작개비라도 나눠 주어 따뜻하게 해 주고, 병들어 약을 먹어야 할 사람들에게 한 푼이라도 쪼개서 약을 지어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가난하고 외로운 노인이 있는 집에는 때때로 찾아가 무릎 꿇고 모시어 따뜻하고 공손한 마음으로 공경해야 하고, 근심 걱정에 싸여 있는 집에 가서는 얼굴빛을 달리하고 깜짝 놀란 눈빛으로 그 고통을 나누고 잘 처리할 방법을 함께 의논해야 할 것인데, 잘들 하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이런 몇 가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집에서 너희들이 위급할 때 깜짝 놀라 허겁지겁 쫓아올 것이며, 너희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 달려올 바라겠느냐? 남이 어려울 때 자기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서 남이 먼저 은혜를 베풀어 주기만 바라는 것은 너희들이 지닌 그 나쁜 근성이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로는 평상시 일이 없을 때라도 항상 공손하고 화목하며 삼가고 자기 마음을 다하여, 다른 일가들의 환심을 얻는 일에 힘쓰되 마음속에 보답받을 생각을 갖지 않도록 해라. 뒷날 너희에게 근심 걱정할 일이 있을 때 다른 사람이 보답해 주지 않더라도 부디 원망을 품지 말고 바로 미루어 용서하는 마음으로 그분들이 마침 도울 수 없는 사정이 있거나 도와줄 힘이 미치지 않기 때문이구나.’라고 생각할 뿐, 가벼운 농담일망정 나는 전번에 이리저리해 주었는데 저들은 이렇구나!” 하는 소리를 입 밖에 내뱉지 말아야 한다. 만약 이러한 말이 한 번이라도 입 밖에 나오면 지난날 쌓아 놓은 공과 덕이 하루아침에 재가 바람에 날아가듯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독자

주제

목적

두 아들

남의 도움을 바라지 말고 도와주는 사람이 되라.

남의 도움을 바라는 두 아들을 훈계하고 오히려 남을 도와주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해 씀.

매체

필자의 입장

글의 유형

 

유배지에서 일가친척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한탄하는 아들들의 편지를 받음.

편지글

* 2009 개정_중등 비상() 1단원 창작의 기쁨 선택 학습으로 수록된 제재입니다.

* 맥락 분석의 내용은 올백 교재를 보고 작성하였습니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117~118, 정약용 지음 박석무 편역, 창비

 

우리는 폐족이니 더욱 노력하라

 

너희들의 편지를 받으니 마음이 놓인다. 둘째의 글씨체가 조금 좋아졌고 문리도 향상되었는데, 나이가 들어가는 덕인지 아니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덕인지 모르겠구나. 부디 자포자기하지 말고 마음을 단단히 먹어 부지런히 책을 읽는 데 힘쓰거라. 그리고 초서나 저서(著書)하는 일도 혹시라도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해라. 폐족이 되어 글도 못 하고 예절도 갖추지 못한다면 어찌 되겠느냐. 보통 집안 사람들보다 백배 열심히 노력해야만 겨우 사람 축에 낄 수 있지 않겠느냐? 내 귀양살이 고생이 몹시 크긴 하다만 너희들이 독서에 정진하고 몸가짐을 올바르게 하고 있다는 소식만 들리면 근심이 없겠다. 큰애가 4월 열흘께 말을 사서 타고 꼭 온다 하였는데, 벌써 이별할 괴로움이 앞서는구나(18022월 초이레지은이).

 

독서의 참뜻

 

종 석()이가 2월 초이렛날 되돌아갔으니 헤아려 보건대 오늘쯤에나 집에서 편지를 받아 보겠구나. 이달을 맞아 더욱 마음의 갈피를 못 잡겠구나. 내가 너희들의 의중을 짐작건대 공부를 그만두려는 것 같은데 정말로 무식한 백성이나 천한 사람이 되려느냐? 청족으로 있을 때는 비록 글을 잘하지 못해도 혼인도 할 수 있고 군역(軍役)도 면할 수 있지만, 폐족으로서 글까지 못 한다면 어찌 되겠느냐? 글하는 일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배우지 않고 예절을 모른다면 새나 짐승과 하등 다를 바 있겠느냐? 폐족 가운데서 왕왕 기재(奇才)가 많은데 이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고 과거 공부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과거에 응할 수 없게 됐다고 해서 스스로 꺾이지 말고 경전 읽는 일에 온 마음을 기울여 글 읽는 사람의 종자까지 따라서 끊기게 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란다. 지난해 10월 초하룻날 입은 옷을 아직까지 그대로 입고 있어 몹시 군적스럽구나(1802217지은이).

 

독자

주제

목적

두 아들

폐족의 처지라도 공부의 뜻을 꺾지 말고 학문에 정진해라.

폐족이 되어 글공부를 포기하려는 자식을 타이르고 가르쳐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함.

매체

필자의 입장

글의 유형

 

유배를 당해 자식과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자식들이 글공부를 포기하고자 하는 의중을 읽음.

편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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