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초반부에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일생일대의 운명적인 사건이 벌어졌던 그 날 밤 이후부터는 정말 숨가빴다.

제목 그대로 속죄에 대한 이야기이다.

속죄란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차원을 넘어서서 지은 죄에 마땅한 벌을 치러야 하는 것인데, 죄가 부른 운명의 질곡(전도 유망한 청년의 삶과 그의 애인의 삶마저 송두리째 아작내 버렸다.)에 비한다면, 그 벌이라는 게 약하다 싶기도 하다.

그리고 훗날에야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 댓가를 달게 받으려 했던 브리오니.

그런데 이 죄가 브리오니 단독의 작품은 아니다. 그녀는 권력 의지를 발휘하고자 하는 욕망이 유난히 강한, 그런 아직 아이였던 것이다. 과오를 저지른  주범이기는 했지만, 본인이 저지른 잘못(강간)임에도 입 다물고 있었던 사람도 있었고, 판단력 없지 않을 법한 어른들 여럿이었건만. 이 죄는 이들의 합작품이다.

모두 3부로 되어 있는 이 작품에서 1부는 사건이 있던 하루의 일을. 2부는 전쟁터에 나간 로비의 시점에서 3부는 속죄를 구하는 브리오니의 시점에서 쓰여졌다.

이 작가의 장점은 전문 직종 혹은 상황 묘사에 아주 뛰어난 점이다.

2부에서는 작가가 정말 2차 대전에 참전해서 낙오병으로 몸소 겪었던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고, 3부에서는 전쟁중에 부상병을 간호하는 간호병으로 호된 직업 훈련을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이 쓴 것만 같다.
작품에서 다룰 직업군의 현장에 뛰어들어 치열하게 연구한 사람만 쓸 수 있는 실감나는 문체의 소유자랄까.


죄를 저지를 당시 브리오니는 제법 글재주가 있는 그러나 자신이 전지전능할 수 있는 작품 속 창작 세계와 현실 세계를 혼동하는 무지한 열두살 영국 명문가의 막내였다.
철이 들고, 자신이 언니와 그 애인에게 엄청난 죄를 저질렀다는 자각을 할 무렵엔 이미 되돌리기엔 늦어버렸던 것.  

속죄를 할 양으로 언니처럼 종군 간호사가 되지만. 속죄의 방식도 다분히 창작의 세계에서 오만했던 어린 브리오니답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인간은 누구나 물질적 존재이다. 쉽게 파괴되지만 쉽게 회복되지는 않는 존재. 몸이 부서져라 부상병들의 간호 일을 하면서 자신이 저질렀던 과오를 절절히 깨달음과 동시에, 작가가 되려는 열망을 접지 않는다. 결과적으로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임했던 간호사의 일을 통해서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으로 깨닫게 되었고, 소설가로서도 대성하게 되지 않았나! 물론 브리오니는 죽기 직전까지도 뼛속 깊에 남겨 있었던 죄책감을 안은 채 살아야했겠지만.

죽은 사람들만 억울한 노릇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고, 어쨌든 브리오니 당신이 이겼어! 싶은 것이다.
브리오니만이 아니라, 미국인 마셜과 브리오니의 사촌 로라 커플은 입에 담을 필요도 없고......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만두 2008-10-06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미운 건 브리오니 부모였어요.

icaru 2008-10-13 10:31   좋아요 0 | URL
그렇죠~ 마치 건수를 찾고 있었던 사람들처럼요...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왜 제목이 이런지 잘 모르겠다. 나이 들면 고교 시절에 느꼈던 감수성과 판이하게 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시절과 영 다른 인간이 되어서 살지는 않을거고, 아니 무엇보다 그 시절과 지금의 나는 별개가 아닌고로. 기억 상실증에 걸리지 않는 한, 한참 지난 후일지라도 살면서 그 불안정을 구가하던 고교 시절의 기억들을 호명하는 날이 적지 않다.

비교적 잘자란 집 딸래미들의 이야기처럼도 들린다. 부모와 그런대로 잘 지내고, 쇼핑을 즐기고, (카나를 예외로 둔다면, 맞벌이 부모님(바쁜 부모님 때문에 카나 남매는 주로 분식집 같은 데서 끼니를 해결한다. 카나의 뚱뚱한 체형도 그 탓이라는 뉘앙스?)을 둔 그녀. - 뚱뚱한 체형 때문에 등장 인물 중 가장 남다른 감성의 소유자처럼 보였지.- 사탕일기를 쓴다는 건 달리 말하면, 상처 아닌 상처가 많다는 것이다. 외모 때문에 듣는 상처가 그중 다수인 걸 보면, 가장 강력한 것은 어떻게 보면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아버지가 농담처럼 무심코 했던 말-‘책을 반납한 고로,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뚱뚱한 네 몸무게 때문에 집이 내려 앉겠다는 뉘앙스였던듯’ 다행히 속으로 곪아 터뜨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사탕일기를 통해서 아픈 말을 했던 사람들에게 극약 처방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 하지만 모두 다 크고 작은 결함과 불균형을 갖고 있다.

원래 이 시기엔 정상 모델 같은 게 없다. 이 시기 뿐만이 아니라 전생애가 그런 것인지도......

<도쿄 타워>에서 보니까, 작가는 취재대상들을 꼼꼼하게 인터뷰해서 그것을 토대로 글을 쓰는 것 같았다. 아마 이 여고생들 이야기도 그런 과정을 거쳤겠지. 그래서 트랜드라든지 하는 게 반영되었을 터. 그러다 보니 든 생각이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 세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첫째, 일본 여고생들의 일상이란 이렇구나.

둘째, 나의 여고 시절은 어떠했더라.

셋째, 앞으로 내가 부모가 고등학생을 둔 부모가 되었을 때의 그 느낌을 여기서 살짝 맛보게 되는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라, 시티 - 죽은 자의 두 번째 삶이 시작되는 시티!
케빈 브록마이어 지음, 김현우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보같지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 세상을 하직하더라도, 죽어서 또 다른 생을 살게 된다는 게 확실하다면, 지금 이 생에서 뭐하러 안달복달하고 사나....
다음 생에 태어나서는 이전 생애와 좀 다르게 살아보면 될 것을....
만약 그렇다면, 이생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의 그 태도도 조금은 다를 것이다. 죽음을 금기시하지 않을 거고, 이제 가면 언제 오나...그렇게 애닳아하지도 않을 거고, 우리 죽어서 다시 만나자, 라는 약속이 가능할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나? <로라, 시티>에서는 말한다. 이승에 남아 살아 있는 사람들 중에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죽은 자들이 머무르는 ‘시티’가 있다고.
시티에서의 삶이라고 해서 별다를 게 없다. 이승에 살 때처럼 단골 식당에 가서 좋아하던 메뉴로 식사를 즐기고, 따뜻한 햇살을 쪼이며, 커피도 마시고, 공원을 산책하거나 신문을 보기도 하고, 늘 어울렸던 옛 술친구들과 늘 가던 바에 가서 술판도 벌인다. 전생에 살았던 배우자와 함께 살면서 같지만, 조금 다른 느낌으로 부부의 연을 이어가기도 하고. 
 

그러나 인간이 이승에서 영원의 삶을 누릴 수 없듯 시티에서의 삶도 그를 기억하던 이승에서의 마지막 사람이 죽으면 시티에서 사라진다.

이 책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중에서도 심금을 울렸던 것은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의 중요함을 새삼 느끼게 했던 어느 가장의 이야기였다. 죽을 때 가족들이 침대맡을 지켜 주거나,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

이 소설은 죽은 사람들이 머무르는 <시티>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와 타인의 존재를 찾아 남극을 헤매는 로라의 이야기를 교차시켜 가며 보여 준다. 서로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이 두 이야기에 공통점이 있다면 언젠가는 곧 끝이 난다는 즉, '예정된 삶'이라는 것이다.

남극에서 어디가 다른 인간이 살고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한 채 방황하는 로라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가슴을 조리며 읽었지만, 사실 면면히 주시하게 되는 것은 그녀가 빙원에서 사투를 벌이는 가운데 벌이는 의식의 흐름이다. - 난, 이부분에서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의 끝부분이 자꾸 떠오르던데 -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그녀의 의식은 과거로 과거로만 달려간다. 어릴 적 단짝 친구 미니링스와의 대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끝에 했던 한마디 '영원히는 아니지만, 오래 걸리기는 했지.'를 묘비명으로 쓰겠다는 생각을 한다.

젊은 작가임에도 삶을 관조하는 힘이 남달랐던 것 같은 작품이다.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보는...

이 책을 빌어서 말하자면, 진정한 삶이란 이렇게 바뀐다.
처음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 되기를 기다리는 고독이었다. 만약 남편이 함께 있으면 그녀에게 필요한 고독은 흩어지고 말았고, 혼자 있을 때 생길지도 모르는 멋진 일도 기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젠 남편도 그녀의 고독의 일부였다. 마치 아주 오래전 그들이 처음 만나 서로를 알아갈 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8-09-24 2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랑스적인 삶 - 제100회 페미나 문학상 수상작
장폴 뒤부아 지음, 함유선 옮김 / 밝은세상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현재도 재밌게 읽었지만, 이 책의 주인공처럼 50대에나 그 쯤에 다시 읽어보게 된다면, 이것도 또 하나의 인생 교본이구나! 하면서 크게 감응하게 될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책엔 보통 사람이 겪는 일상의 문제들이 다 불거져 나오니까.

살아가면서 우리 모두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 말이다. 이를테면,  남녀의 사랑, 자기 정체성의 위기, 노동을 제대로 한다는 것, 늙어가는 것에 대한 고민, 잃어버린 환상 등등

주인공의 인생이 꼭 프랑스의 국가적인 풍토 안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특별한 삶인 것은 결코 아니다. 한 개인으로서 겪게 되는 50여년과 그 50년간의 다섯 번 정권 교체 - 정치인의 집권 흥망과 부침을 교묘하게 섞어 짠 재주가 돋보이기는 하나, 언급한 정치인 중에 드골과 미테랑, 시라크만 누군지 들어는 봤고 나머지 인물들은 당최 모르겠다 하더라도 감동이 줄어들 이유는 없을 것이다.


-드골 장군의 집권기

아주 뛰어난 아이가 아니었다 해도, 부적과도 같은 신기한 장난감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명성이 자자했을 아름답고 늠름하고 인내심 있던 10살짜리 형은 갑작스러운 급성 맹장염의 합병증으로 죽게 된다. 형의 빈 자리가 너무나도 컸던 가족. 소년의 어린 시절은 우울했다.  

형이 없어서 어떤 성경험이나 지식을 들을 수 없었던 데다가 형의 죽음으로 인해 괴로움에 짓눌려 말하기를 거부하는 부모와 함께 살던 주인공은 제법 논다는 동급생 날라리를 통해 최소의 지식을 얻는다. 그 친구는 다비드. 비뚤어진 성격에 상상력도 풍부했고, 최소한의 윤리 의식이나 억제하려는 심리도 전혀 없고, 대단히 건강하기까지 한 대부분의 사람보다는 조숙한 삶을 사는 아이였다.

동급생 친구의 명언들

“제기랄 엄마라도 예뻤으면 어떻게 했을 텐데.”

“먼저 냉장고에서 한두 시간 전에 그걸 꺼내. 정상 온도에 맞추기 위해서 말이야. 그 다음에, 아주 넓은 칼을 들고 구멍을 만들어 고기 한 가운데에. 중앙에 딱 맞게. 너무 커서도 안돼. 아주 정확하게 말야. 그 다음에는 앞치마를 두르고 바지를 내리고 파티를 시작할 수 있어. 빌어먹을 엄마가 가끔 고기를 마늘에 재워놓거든. 어쩌다 마늘 조각이 있는데, 집어넣고 그 위에서 한참 비비고 나면 성기에서 이틀 동안 냄새가 나는 거야.”

                                                               

-퐁피두 대통령 집권기

치과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연상녀와의 연애. 커다란 다리와 풍만한 가슴 아래에서 마치 순진한 어린아이가 유모의 가슴에서 노는 서투른 소년 같은 기분이 되고 마는, 성욕 분출의 시기이다. 이 때, 3개월 동안 임시직으로 건축 현장의 유급 휴가 창구에서 일한다. 첫 달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에게 직장에서 느끼는 소외감, 눈의 피로, 꼼짝 않고 일해서 생긴 어깨 통증에 대해 이야기하자, 어머니가 말한다.

“자, 오늘 오후에 철학자 알랭이 쓴 글을 읽었단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네 생각이 났다. ‘식욕은 가고 세탁은 다 되었다. 인생은 좋은 냄새가 난다.”




-미테랑 대통령 집권기

그의 아내 안나는 재력가 출신의 자제이다. 욕조회사와 스포츠 신문사의 사장인 아버지, 몸치장이 화려한 의사 어머니. 

그의 아내는 아버지의 욕조 회사를 물려받는다. 그리고 새로운 미션도 받는다. 이를테면 이미 번창하는 회사를 해마다 10퍼센트씩 성장시키는 것, 그녀가 첫발을 잘못 내딛기를 숨어 기다리는 사원과 50여명의 간부들과 맞서는 것,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지금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스파와 저쿠지 식의 제품을 내놓기 위해 카탈로그를 샐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내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면서, 그는 곧 자신의 일을 포기하고 아이들을 위해 내 시간을 바치기로 하였다. 조용히 아이들을 키우는 데 몰두하기로 했다. 예전에 그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아내도 즉각 젖먹이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다는 죄의식에서 벗어남을 느꼈다. 


“넌 지나치게 운이 좋았을 뿐이야. 그게 네 판단과 상식을 망쳤어.”

그의 어머니의 말이다.

그의 인생이 순탄한 것. 그게 뭐가 문제냐고?  그가 나무 사진들을 찍어 편집한 책 두 권이 미친듯이 팔려 나가는 시점에서부터 이야기를 하면 될까?


-책 두 권이 기적적으로 팔린 덕분에 나는 세상살이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을 수 있었다. 내 가족과, 때로는 나 자신과도 나는 그 무엇에도 연루되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과 어떤 계획도 함께 하지 않았다. 이따금 내 자신이 아무에게도 관심이 없고 누구의 관심도 끌지 않는 특별한 계급을 대표하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어떤 인간도 내 작업의 범주 안에 결코 들어오지 못하도록 주의하면서 말없이 한 자리에 서 있는 나무를 찍는 것이 내 인생이었던가? 내 사진들은 전 세계로 팔려 나갔다. 그제야 나는 뱅상과 마리(자식들)의 사진을 찍은 적이 한번도 없으며, 더구나 안나와 어머니 사진도 찍은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나무껍질을 찾아 지구를 누비고 다녔지만 정작 내 주변과, 나와 같은 문지방을 넘는 각종의 삶에는 소홀했다. 이제 마흔 살이 되었지만 나의 감정은 여전히 대학을 막 졸업했을 때와 다름없었다.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도 거의 못 봤는데 아들은 벌써 치수가 39나 되는 신을 신었다. 나는 한 번도 생계를 위한 노동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오래전부터 궁핍을 모르고 살았다. 원한 것도 아니었으며 의도한 바도 아니었지만, 나는 가차 없이 기회주의적인 한 시대의 순수한 산물이었다. 노동이 용기 없는 사람들에게나 가치가 있을 뿐인 그런 시대의 산물이었다.

나도 길게 산 것은 아니지만, 인생은 어떤 형태로든 대가를 치루게 하는 것 같다. 세상은 공평하다고나 할까?

내 가족 모두를 생각했다. 그 의혹의 순간에, 그토록 많은 사람이 나와 함께 있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에, 그들은 나에게 어떤 도움이나 위안도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놀라지도 않았다. 인생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묶어놓고서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존재의 시간에,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기보다는 차라리 단지 그 무엇이라는 것을 믿게 하는 보일 듯 말 듯한 가는 줄에 지나지 않으니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5-03-17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 - 제135회 나오키 상 수상작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들녘 / 2007년 6월
구판절판


"어느 날, 여자 대학 동기한테서 전화가 왔어. 그 친구가 ‘다다, 네 와이프가 바람피우고 다녀’라고 하더군. 나는 웃어넘겼어. 우리 부부와 잘 아는 친구여서 농담하는 줄 알았지."
"그런데 정말 바람을 핀 거군."
"그래. 내가 가벼운 기분으로 ‘너 바람피운다며?’ 하고 넘겨짚었더니 아내의 얼굴이 순식간에 파랗게 질렸어."
아내를 믿고 있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았다. 친구가 농담한 것이라 흘려듣고, 그 이야기는 가슴 속에 묻어 두는 편이 나았다. 다다는 마음속에 싹튼 의심에 굴복했다.
(중략) 물론 다다는 충격을 받았고, 화도 냈다. 하지만 화를 낸 진짜 이유는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이 아니라, "왜 그녀는 그러게 순순히 바람 핑누 걸 인정하는가" 라는 의문 때문이었다. 다다는 알고 싶지 않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다. 정말로 다다를 사랑한다면, 필사적으로 부정해 주기를 바랐다. 아내가 부정했다면, 다다는 믿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 사건 직후에 아내가 임신한 걸 알았어. (중략) 아내는 ‘당신 아이야. 믿어 줘.’라고 하더군. 그래서 나는 믿었어. 어리석다고 생각하냐?"
-324쪽

"그렇게 즐겁게 뭔가를 기다린 적이 없었어. 아기가 태어났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지. 그런데 침대에 누워 있던 아내는 내 얼굴을 보는 순간 그렇게 말하는 거야. DNA 감정을 하자고."
그때 비로소 다다는 배신감을 느꼈다. 그녀는 진실을 밝혀서 다다의 의심을 완전히 없애고 싶은 마음에서 제안했겠지만, 다다에게는 아내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모두 짓밟는 것과 다름없는 말이었다.
"필요없다고, 당신이 내 아이라고 했잖냐고 난 거절했어. 아내가 아무리 애원해도 그 제안은 들어줄 수 없었어.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하지만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채로 두어서 아내를 괴롭히고 싶다는 마음이 전혀 없었던 건 아냐. 그래서 사실을 밝혀내려는 아내를 만류했는지도 몰라."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건 아내의 배신에 대한 다른 방식의 복수였다. 시간이 지난 후에야 다다는 그때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325쪽

"파국은 바로 찾아왔어. 생후 한 달 만에 갑자기 아기가 죽은 거야. 아기가 열이 잇는 것 같다고 한밤중에 아내가 날 깨웠어. 내가 아기를 돌볼 테니 쉬라고 했지. 아침이 돼서도 열이 떨어지지 않으면 병원에 데리고 가자고. 아내를 걱정이 되어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더라고. 아기는 젖을 먹자마자 쌔근쌔근 잠들었어. 난 자장가를 불렸지. 아내를 위해. 퍼뜩 정신이 들었을 때 아기는 이미 이 세상에 있지 않았어."


-32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