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가쿠타 미쓰요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는 이의 십중팔구는 나와 책의 개인적인 사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도 리뷰가 될 수 있다면  쓰려고 했었는데 작가의 글을 읽고 나서는 그만... 그녀가 대신 다  해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글

평범하지 않고 좀 이상해 보이는 연인이 있다면, 주위 사람들은 ‘저 사람들 좀 이상하네.’ 또는 ‘정말 좋아하나 봐.’ 그렇게 제멋대로 얘기하다가도 결국 ‘둘의 문제’로 이해해 버리곤 한다. 둘의 관계는 그들 둘 밖에 모른다. 이상하게 보여도, 분명히 그 사람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연인이나 부부라는 게 어떤 건지 우리는 알 도리가 없다. 연애라는 것은 사실 지극히 사적인 것이라, 내 경험을 기준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어떤 순간도 그 기준은 한쪽으로 치우치기 마련이다.

나는 헤어진 애인과 대부분 친구가 된다. 현재 애인과도 만나게 하고 둘이 술을 마시게도 한다. 나는 그런 게 일반적이라고 생각했다. 헤어졌으니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쪽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것 같다. 아직 미련이 남아서, 다시 만나면 마음이 흔들릴까봐 못 만나는 게 아닐까? 나는 헤어진 사람에게는 눈곱만큼도 미련이 없고 만나도 상관할 게 없으니 그저 평범한 친구가 된다. 하지만 몇몇 친구는 그런 내 생각을 이상하다고 했다. 옛 애인과 만나야 하는 현재 애인이 아무렇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애인도, 전 애인을 만나는 일이 평범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아무 문제도 없다. 전 애인과 친구가 되는 게 이상하다는 사람은 전 애인과 헤어지면 만나지 않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경우 ‘당연’하다는 것은 커플인 두 당사자가 공통적으로 인식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쩌다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책과의 관계도 이와 똑같다고 얘기하고 싶다.

운동을 한다, 게임을 한다,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온천에 간다. 그런 일들과 책을 읽는 것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운동이나 게임을 하지 않아도,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아도, 온천에 가지 않아도 아무 문제 없지만, 사람들은 거기에 뭔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 중에는 책 읽는 행위도 포함된다. 그리고 책을 읽는 것은 그런 행위 속에서 가장 특수한 사적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 누군가와 일대일로 교환될 정도로.




책을 읽는 가장 큰 재미는 그 작품 세계에 들어가 온 힘을 다하는 것이다. 한번 책의 세계에 빠지는 흥분을 알 게 된 인간은 평생 책을 읽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 가장 원시적인 기쁨을 이미 유치원에서 얻었던 것이다.




내가 사는 집 옆에는 작은 서점이 하나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시골에 종종 있는, 책을 팔지 않는 서점이었다. 만화와 주간지, 여성잡지에 만화 잡지, 거기에 문방구, 계산대에는 향기가 나는 지우개 함이 있는.

버스를 타고 도시로 나가면 책을 파는 서점이 있었다. 아주 큰 서점. 옷은 필요 없으니 책을 사 달라고 졸랐을 때 어머니가 데려갔던 곳이었다. 책이 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가장 좋아했던 곳도 도서관이었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노란색 카펫,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던 수많은 책, 유리창과 그곳에서 들어오는 햇살, 도서 담당 선생님의 목소리와 웃는 얼굴.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시시하고 재미없는 책과 만났다. 그때 나는 입원해 있었는데, 이모가 그 책을 가져다 주었다. 책이라면 무엇이든 좋았기 때문에 받자마자 읽었다.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내게 재미없다는 말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였다. 크고 컬러로 된 책이었다. 마지막까지 읽고 재미없다는 결론을 내린 나는 그 책을 놓아두고 다른 책을 읽기 시작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책은 읽었다. 읽긴 읽었지만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때의 밀월과는 조금 달랐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책의 세계보다 현실이 더 정신없었던 것 같다. 나는 아주 작은 세계에서 살았는데도 나이와 나 자신, 매일, 친구, 늘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는데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더 쉽게 표현하면 책보다 새 옷이 필요했고, 대형 서점보다 더 가슴 뛰게 하는 장소가 곳곳에 출현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친한 친구가 책 한 권을 주었다. 그림이 있는 작은 책이었다.

나는 그것을 단숨에 읽고 굉장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세계로 데려다 주는 것만이 아니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그것은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내가 병원 침대에서 재미없다면 내던진 <어린 왕자>였다. 8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받게 된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후로 나는 재미없는 책을 읽어도 ‘시시하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게 됐다. 이것도 역시 사람과 같다. 100명이 있으면 그만큼의 개성이 존재하고, 또 그만큼의 얼굴이 존재한다. 시시한 사람이란 없다. 유감스럽게도 서로 맞지 않는 사람이 있고 외모에 대한 취향도 다르지만, 그것은 상대가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쪽이 안아야 하는 문제이다. 시시한 책은 그 내용이 시시한 게 아니라 서로 맞지 않거나 이쪽의 편협한 취향에서 벗어났을 뿐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나면 맞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상대와 우연한 기회에 무척 가까워지는 경우도 있고, 이쪽 취향이 변하는 경우도 있다. 시시하다고 치부해 버리는 것은(그것을 쓴 사람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책에 실례를 범하는 일이다.




그건 그렇고, 조금씩 책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나는 대학생이 되어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맛보게 된다. 나는 문학부의 문예 전공이었다. 같은 문학 수업을 듣는 동기나 전공 동기 모두 나보다 50배나 많은 책을 읽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이 당연하게 입에 올리는 작가 이름을 전혀 몰랐다. 그들의 입에 오르는 책 제목도 거의 들은 적이 없었다. 책이 너무 좋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 생각하며 그 대학의 그 과에 들어갔는데 내가 읽은 책이란 턱도 없는 수준이었다.

충격을 받은 나는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과는 친구가 되지 않기로 했다. 상처만 받았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이야기나 연애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만 어울려 놀러 다녔다. 그리고 얻어들은 미상의 작가나 책을 남몰래 읽었다.

무식해서 좋았던 점은 이 시기,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책을 만났다는 것이다. 나는 동기들이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는 작가의 소설을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작가들의 품만 샅샅이 뒤져 읽었다.

이제까지 나는 말을 잘하기 위해, 순수하게 지식을 얻기 위해 책을 읽은 경우는 없다. 15년에 걸쳐 깨달은 것이다. 세상에는 나보다 500배, 1000배나 많은 책을 읽은 사람이 존재하고 그런 사람을 쫓아가려 해도 소용없다. 그런 일을 할 여력이 있다면 지식 같은 건 없어도 상관없는, 나를 부르는 책 한 권을 읽는 게 낫다.

그래, 책은 사람을 부른다.

아주 재미있는 책을 만나면 나는 읽으면서 자주 생각한다. 혹시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도대체 어찌 되었을까?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이 책이 없었다면, 이 책을 만나지 못했다면, 확실히 내가 본 세상은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이 있어서 좋았다. 다행이다. 친구가 없는,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한, 덜 떨어진 아이처럼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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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남자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9월
절판


이 순간, 노리코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운다. 마치 수문이 열린 것처럼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마구 운다. 오랫동안 침묵 속에서 고통을 견디어 온 이 젊은 여자, 자신이 선량하다고 믿지 않는 이 젊은 여자. 오로지 선량한 사람만이 자신의 선량함을 의심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선량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쁜 사람은 자신이 선량하다고 생각하지만, 선량한 사람은 자신이 선량함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남들을 용서하면서 삶을 살아 나가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107쪽

30세 생일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지만 브릭은 평생에 단 한번도 자살을 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그의 유일한 관심사가 되었다. 그 후 이틀 동안 아파트에 혼자 앉아서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고통 없이 가장 효율적으로 떠날 수 있는지 그것만 궁리했다.
- 147쪽

인생의 이런저런 순간에, 모든 가족은 아주 기이한 사건을 겪게 된다. 가령 끔찍한 범죄, 홍수와 지진, 기괴한 사건, 기적적인 행운 등이 그런 것이다. 비밀이나 감추고 싶은 약점이 없는 가족은 아무도 없다. 여기자는 그의 얘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많은 가족 혹은 대부분의 가족은 그럴지 모르지만, 모든 가족이 그렇다고 볼 수 없다. 그녀는 자기 가족의 사례를 들면서 단 한번도 기이한 사건, 혹은 예외적 사건이 벌어진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무슨 소리, 알렉이 말했다. 한번 집중해서 잘 생각해 봐. 그러면 뭔가 나오게 되어 있어. 그러자 여기자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래 한 가지 있기는 한데, 라고 대꾸했다.
-167쪽

그녀가 자신의 내부에 많은 고통을 감추고 있다는 걸 알았어. 평상시에 소니아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어. 부드럽고, 상냥하고, 충실하고, 남을 잘 용서하고, 생기발랄하고, 정말 엄청난 사랑의 바탕을 갖고 있었지. 하지만 그녀는 때때로 정신이 딴 데로 팔려 있었어. 심지어 대화 중에도 그러곤 했지. (중략)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녀의 본능이나 충동은 아주 깊었어. 오싹할 정도로 말이야. 그런데 자기 자신과의 관계는 기이할 정도로 천박했어. 그녀는 착한 마음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잘 교육을 받지는 못했어.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고, 그 어떤 것이든 아주 오래 집중하지 못했어.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음악을 빼고 말이야.
-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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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9-01-12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 오스터도 많이 늙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던 작품이다.
 
웨하스 의자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엄마는 모딜리아니를 좋아했다. 그가 그린 여자를. 불행해 보여서 마음에 든다고 했다. 목이 길고, 안구가 없는, 불행해 보이는 여자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그녀들은 어쩌면 행복했는지도 모른다. 돈 많은 남편이 있었거나, 자랑 삼을 아이가 있었거나, 그래서 그녀들 모두가 행복했는지도 모른다. 또는 불행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우리 엄마가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도.

그녀의 엄마는 화가였다. 괜찮은 아내였고, 두 딸의 괜찮은 엄마였고, 게다가 요리도 잘했다. 엄마는 딸들이 자신과 비슷한 인생-가정을 이루고, 아내나 엄마가 되어-을 살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38세 미혼이지만, 사귄지 6년이 되어가는 깊이 사랑하는 골동품 가게와 헌책방 두 가게를 운영하는 돈이 좀 있는 애인이 있다. 글의 중반에 스리슬쩍 애인이 자신의 딸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미루어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유부남이다.

애인이 유부남이라는 것이 작품 전면에 부각되지 않지만, 세상이 인정하지 않을 커플로서의 갖힌 듯한 폐쇄적인 느낌에 깊이 시달려 하는 ‘나’의 심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나’는 자신을, 애인의 인생의 사랑방을 빌려 더부살이하고 있는 사람처럼 느낀다. 그의 옵션으로, 그의 인생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격리되어 있는 것처럼, 현실에서 떨어져 나와 있는 것처럼. 애인은 친절하지만, 친절하면 할수록 ‘나’는 자신이 가공의 존재인 것처럼, 그의 공상의 산물인 것처럼 느낀다.  

애인과는 주기적으로 여행을 떠난다. 필리핀의 섬 등등 해외 국내 가리지 않고. 한번은 애인이 맘조르카 섬에 둘이 가서 살자는 이야기를 한다. 그 섬에는 가본 일이 없다. 하지만, 애인과 함께라면 거기서도 잘 해내 갈 수 있으리란 것을 안다.
그들은 그곳에서 꿀처럼 행복하리라. 파도처럼 자유롭고, 바람처럼 고독하리라.
‘나’와 애인의 계획은 완벽하다. 아무 문제없다. 다만, 그날이 영원히 오지 않으리란 것을  ‘나’가 알고 있다는 그 한 점만 제외하면.

사치스럽고 달콤하고 가냘프고 고독한  ‘나’

 

한없이 다정한 애인에게 매몰되어 가는 자신을 보면서 애인과 헤어지려 하고, 죽으려도 해본다. 우산 디자인과 스카프 염색을 주로 하는 화가인 나. 일에 빠져 있는 시간을 그러저럭 좋아한다. 그러던 나는 가을 학기부터 대학의 강의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좋은 돌파구가 될 수 있을려나. 

‘나’는 자신이 가르치는 입장에 서려 한다는 것에 우선 놀란다. 그렇지만, 학생 시절에, 미래가 없는 중년 여성이라 여겼던 여선생이 자꾸 떠오른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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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거리스 러브
야마모토 후미오 지음, 한희선 옮김 / 창해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사랑에 설탕이 없다. ‘사랑’이 들어갈 자리에 ‘인생’을 넣어도 된다. 시대에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

여기 열 명의 여자 각자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여자들이 안고 있는 특유의 고민과 질병에 공감한다. 질병은 여성에게 인내의 한계를 알려 주는 신호가 되기도 한다. 이들의 이야기에는 어느 것 하나 행복한 앞날이 펼쳐지겠구나 하는 느낌으로 끝나는 것이 없다. 하지만, 당신의 결단에, 서툴게나마 품어보는 용기에 동지로서 박수를 보낼 따름이다. 평화롭게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왔다고, 누가 자부할 수 있나, 전쟁이 없는 게 곧 평화는 아닐 거다. 

평화와 행복을 가장하지 말자고, 껍질을 깨뜨리고 밖으로 나오자고 말하는 것 같은 이야기들.

그녀의 냉장고 _ 골다공증

도회에 사는 스물다섯살의 아름다운 여자, 그런데 골다공증이 있단다. 그것은 흡사 그녀가 사는 방처럼, 겉보기에는 아름다워 사람들의 눈을 끌지만, 냉장고 문을 열면 안쪽에는 커다란 공허함-인스턴트 냉동 식품 외엔 먹을거리가 없다. 살 찌면 안 되니까.-이 가득 들어 있다.

나는 말야 어릴 때부터 점점 못생겨지는 엄마의 모습을 봐왔어. 게다가 아빠에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어. 엄마는 일도 취미도 없이 매일 텔레비전 앞에서 뒹굴며 과자 따위를 먹을 뿐이었지. 점점 엄마의 얼굴이 변했어.

그런데 당신이 온 거야. 처음 봤을 때 어쩜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나 했어.

그녀란, 골다공증을 앓는 여자의 열 살 연상 새엄마.

추하거나 약하거나 쓸모없는 것은 매장된다. 그 원인이 뭐든 간에. 그것이 도태다. 그녀는 결코 도태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게 틀림없다. 지방을 쌓아두지 않을 것, 동성에게도 이성에게도 매력적인 여성이 될 것. 나도 그렇게 해온 것이다. 장난이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한 싸움이었다.

새엄마는 아름답고 상냥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행복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나날을 보낼 작정이었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일을 열심히 하는 남자’는 변함없이 일에 열중해서 젊은 아내나 딸에게는 관심이 없다. 그리고 남편에게 젊음으로만 어필했었는데, 나는 ‘젊음’을 잃어가고 있다. 열 살 어린 딸의 냉장고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냉장고에도 제대로 된 것이 들어 있지 않다.


돌고래 요법 _ 돌발성 난청

그 여자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담임을 몇 번이나 했었지만, 어느 반이나 반드시 그런 아이가 있었다. 부잣집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교풍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아이나, 어떤 계기로 성적이 오르지 않게 된 아이. 그리고 부모에 대한 반발심으로 일부러 공부를 안 하는 아이도 있었다.

그 여자는 지금은 그런 아이를 도와주려고 했던 게 잘못이었다고 느낀다. 이렇게 귀가 안 들리게 된 후 비로소 노력하라는 말의 잔혹성을 알게 되었다.

억지로 착한 사람인 척 하는 바람에 무리가 갔다. 그래서 귀가 들리지 않게 된 것이리라. 그녀는 그렇게 해석했다. 그래서 자진해서 외톨이가 되어 고독한 일상에서 평온을 찾았다. 타인과 관계하지 않으면 자신의 약한 면을 보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름 하늘색 _ 알코올 의존증

일류 고등학교의 열등생인 주인공은 알코올 의존증이 심하다.  현에서 최고 명문인 이 학교에 모인 우수한 아이들이 그녀를 친구로 보아 주는 것은 그녀의 소꼽친구 사키가 있기 때문이다. 사키는 귀엽다. 사키는 사람이 좋고, 센스가 좋다. 그들은 장장 13년간 소꼽친구다. 사키와 같은 고교에 들어가기 위해 중학교 때는 죽어라 공부했다. 우리 집은 아빠가 없다. 어려서는 할머니에 의해 키워졌다. 할머니가 이모집으로 가시게 되고, 엄마와 둘어서만 생활하게 되니까 처음에는 좀 쓸쓸했다. 하지만 가족애로 묶여 있던 부분이 해방되는 것을 느꼈다. 방이야 어질러져 있다 한들 사람이 죽는 것도 아니고, 열여덟에 그녀가 그 나이에 이렇게 술을 마실 수 있게 된 것은 엄마도 술을 아주 좋아해서 어릴 적부터 때때로 같이 반주를 마셨기 때문이다. 마시는 동안에 시시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재미있게 느껴지고, 화장실에 갈 때마다 평형 감각이 이상해지는 것을 자각한다. 그녀에게는 류이치라는 남자 친구가 있다.

고등학생과의 섹스에만 연연하는 삼류대학생 류이치. 처음에는 그의 바보스러움에 질렸지만 요즘에는 그런 그에게 편한함을 느낀다. 사실 주인공은 우월감을 남자 친구에게 갖고 있다. 당연히 자신이 훨씬 머리가 좋은 좀더 나은 인간일 거이다. 해서, 이 남자는 절대 사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만나게 해도 둘이 사랑에 빠질 일은 없다. 그래서 그를 친절히 대할 수 이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그녀는 공부에 대한 노력을 그만두기로 했다. 머리가 나쁘다. 그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받아들이기로 했다. 필사적으로 공부하고자 했던 마음을 포기하니 갑자기 주위를 냉정하게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구나. 이런 사람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좋은 기업에 취직하거나 관료가 되어 나라를 움직이는 거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 묘하게 감탄했다.

그들이 사회라는 체스를 두는 사람이고 그녀나 류이치 같은 인간이 체스의 말이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돈을 잔뜩 써서 면밀하게 마케팅 회의에 회의를 거듭해 만든 상품을,  같은 인간이 ‘이것 굿인데,’ 라고 말하면서 사들이고, 그렇게 해서 경제라는 녀석이 발전하는 것이다.

사키는 최고로 강한 체스를 둘 수 있는 사람이다. 그녀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째서 친구가 되어버린 걸까. 어째서 좀더 빨리 깨닫지 못했을까. 좀더 빠른 시기에 그래서 고교 입시 때 떨어졌다면 지금의 이런 기분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사키가 그녀를 보는, 먼 나라의 굶주린 아이를 보는 듯한 눈.

같은 여자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여자인 그녀는 평생 사키의 친구로 남을 수 있으니까.

 

저울 위의 작은 아이 _ 비만

'나'는 화려한 동급생들과 친구 되기에 성공했고, 패션 잡지를 매번 샅샅이 읽으면서 공부햇다. 조금씩 체중을 줄이고 화장품과 구두를 사들였으며 남자와 잘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배웠다. 친구 미나미는 남자들이 말하기를, 별로 미인(비만 타입)은 아니지만 아주 상냥하고 성격이 좋다. 그애와 있으면 남자들은 안심을 한다. 도회적인 타입의 여자에게 데이트를 신청하려면 구실이라든지 데이트 코스 같은 걸 생각해야 하지만, 그녀는 방긋방긋 웃으면서 들어주며, 화를 내거나 짜증내는 일이 거의 없고, 언제나 만나도 그녀는 기분이 좋다.

미나미는 말한다.

“세상에 맛있는 음식과 재미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데, 그걸 즐기지도 않고 굶고 있다니.” “있지 정말 재미있어. 세상은 인기를 끌고 싶으면 살을 빼라고 여자들을 부추기잖아.하지만 마르든 뚱뚱하든 미인이든 추녀든 인기 없는 여자는 인기 없어.” “맞아 나한테는 내가 없으니까.”

“있지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 사랑받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어. 다들 사랑을 받고만 싶어해. 이야기를 들어주고, 긍정해주고, 머리를 쓰다듬고 귀엽다고 말해주길 바라지. 난 그걸 해주는 거야 단지 그것뿐이야.”

그녀는 생각한다. 살이 찌더라도 미나미처럼 되지 않을 것이라고. 게다가 미나미도 그저 ‘인기가 있을’ 뿐이다. 다른 사람이 뭔가를 넣지 않으면 그녀는 그저 껍데기 뿐이다. ‘내가 없다’는 말은 그런 의미일까. 그들은 자각을 못했지만 병들어 있다. 누가 우리들을 선별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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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
온다 리쿠 지음, 오근영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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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가 온다 리쿠가 ‘나, 머리 겁나 좋아! 이야기 구도를 이렇게 겹겹이 이중 창문으로 된 액자(이런 게 실제로 있나? 모르겠으나) 소설도 만들 수도 있어. 메롱~’ 하는 것만 같은 소설이다.

제대로 구도를 이해하며 읽고 있는 건지 확신이 들지도 않으면서 되돌아가 그림을 맞춰 보며 따져볼 노력을 하지 않게 되었던 것은, 죽죽 흘려 읽으면서 나름 온다 리쿠의 문체로 충족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연극의 이라는 장르에 수반되는 그러니까, 극작가와 같은 항상 더 나은 작품으로 관객의 기대에 부응해줘야 하는 창작 직종에 전념하는 사람들의 비애랄지, 배우가 오디션을 앞두고 갖게 되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이랄지, 연극이라는 예술 장르 자체에 대한 삽화들을 작중 인물의 입을 빌어, 온다 리쿠만의 어투로 들려 주는데에서 그만, 재미를 다 보았다고 생각했고, 이것으로도 난 족하다 라고 여겼다.


이건 개인 취향일 것이다만, 이렇게 작가가 쓰고 있는 이야기의 모티브로 보여 지는 것이 구체화해서 이야기 내부 속에 유사 연극의 형태로 있고, 사실 그 결말 또한 기승전결을 갖춘 단순하게 똑 떨어지는 구조가 아니라, 이렇게 혹은 저렇게 결말을 낼 수도 있었을 법했지라고 독자들에게 손안의 카드를 다 내보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에 사실은 좀 질색하는 편이다. 어떻게 보면, 작가만이 치열하게 고뇌해야 하는 수고로움 같은 것을 소재로 과대 포장해서 독자들에게 선사해 주고 있는 게 있는 거 아냐! 싶은... 그렇다. 이건 복잡한 걸 즐기지 못하는 개인 취향이다.

마지막에 이르러 모든 비밀이 밝혀지는가 싶은 순간, 다시 한번 모든 것을 뒤집으며 독자를 다시 미궁에 빠져들게 한다. 그런 모호한 느낌을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온다 리쿠가 의도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옮긴이의 말에 내심 아리송하고 미진했던 느낌에 대한 혐의를 완전히 풀어주지도 못하겠다.

116

‘남는’ 연극 말이야. 실제로 왜 이런 시시한 연극이 남아 있는 걸까 하고 젊을 때는 나도 생각했어. ‘우리 마을’이나 ‘인형의 집’ 같은 것. (중략) 하지만 역시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거지. 대체로 단순한 구도가 남는 거야. 다른 말로 하자면 여백이  있는 것 여러 가지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 말이지.

119

오디션이라는 게 항상 그렇지. 받기 전에는 정말로 싫은 게 오디션이야.

긴장해서 불안에 떨며 구역질을 할 정도로 계속 열에 들뜬 사람처럼 비일상적인 상태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지. 너무 싫어서 도망치고 싶어 내 경우는 그래.

하지만 끝나면 아쉬운 걸, 사랑스러운 거야.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 걸, 저렇게 했으면 좋았을 걸 하고, 헤어진 연인처럼 끊임없이 끝난 오디션을 생각하는 거야. 그리고 다시 오디션을 받고 싶어지는 거야.

120

다들 화장술이 뛰어나고 옷 입는 센스도 좋아져서 얼굴 생김새가 미인인가 아닌가보다는 총체적인 인상이나 패션 감각이 더 중요해지고 있지.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빼어난 미인이라는 이미지가 없어졌지.

121

오늘날 아름다움과 행복은 비례하지 않아. 아름다움과 야심도 비례하지 않아. 오히려 아무것도 갖지 않은 사람의 야심이 더 굉장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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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자신의 일이 끝났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본 적 있어? 아직 없겠지. 아직 젊고, 한참 물이 올라 있는 이 때가 자신의 일에 대한 반응을 느끼는 시기지. 언젠가는 체력이 다해 사고력이 떨어지고 자신의 직업에서 은퇴할 때가 오겠지. 그런 때의 일을 아직 상상해본 적 없겠지?

하지만 늘 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도 있어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야 하는 사람, 만드는 것 하나하나가 남들의 평가 대상이 되고 그것이 다음 일을 얻는 기준이 되는 사람. 항상 고갈을 두려워하는 사람. 항상 만들어내는 일을 괴로워하는 사람. 세상에 그런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어.

정말, 생각할 때마다 무서운 직업이에요. 주문을 하면서 몇 번, 보면서 몇 번. 내용의 질이나 평가가 노골적으로 관객수에 필적하죠.

분명 오랫동안 글을 쓰다보면 나름대로 기술은 늘 것이고 약간의 요령은 얻을 수 있겠지만, 그 이상 새로운 것을 쓰기 시작할 때의 공포는 커지게 마련이죠. 전작을 능가하는 작품을 써야 한다는 부담은 점점 크게 다가오지요. 무엇보다도 스스로 기대하는 작품의 수준이 점점 높아져서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힘들어진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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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내부의 정원은 도시의 모형. 우리가 사는 세계의 축도. 사람들은 늘 둘러싸이고 싶어한다. 타인으로부터의 시선을 차단하고 관리당하고 안전하고 기분 좋은 장소로 도망치고 싶어한다. 그러는 한편 사람들은 둘러싸여 있다는 것에 폐쇄감과 고독을 느낀다. 그래서 사람이 모이는 장소로 나가 많은 사람들 속의 한 사람임을 화인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그리고 내부 정원은 항상 ‘보여지는’ 운명에 있다. 애당초 사람의 시선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공간인 것이다. ‘보여진다’는 의식은 늘 허구를 갖고 있다. 내부 정원은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 쌍방에게 연기를 강요한다. 그러므로 허구는 내부 정원 밖으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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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설 2008-11-05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머리 겁나 나뻐~ 이러면서 못 읽겠습니다 ㅎㅎ

icaru 2008-11-10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미설 님은 좀 다르게 느껴지실 지도 모르죠~ 저 작가가 쓴 것 중에서는 별로였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