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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가쿠타 미쓰요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는 이의 십중팔구는 나와 책의 개인적인 사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도 리뷰가 될 수 있다면 쓰려고 했었는데 작가의 글을 읽고 나서는 그만... 그녀가 대신 다 해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글
평범하지 않고 좀 이상해 보이는 연인이 있다면, 주위 사람들은 ‘저 사람들 좀 이상하네.’ 또는 ‘정말 좋아하나 봐.’ 그렇게 제멋대로 얘기하다가도 결국 ‘둘의 문제’로 이해해 버리곤 한다. 둘의 관계는 그들 둘 밖에 모른다. 이상하게 보여도, 분명히 그 사람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연인이나 부부라는 게 어떤 건지 우리는 알 도리가 없다. 연애라는 것은 사실 지극히 사적인 것이라, 내 경험을 기준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어떤 순간도 그 기준은 한쪽으로 치우치기 마련이다.
나는 헤어진 애인과 대부분 친구가 된다. 현재 애인과도 만나게 하고 둘이 술을 마시게도 한다. 나는 그런 게 일반적이라고 생각했다. 헤어졌으니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쪽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것 같다. 아직 미련이 남아서, 다시 만나면 마음이 흔들릴까봐 못 만나는 게 아닐까? 나는 헤어진 사람에게는 눈곱만큼도 미련이 없고 만나도 상관할 게 없으니 그저 평범한 친구가 된다. 하지만 몇몇 친구는 그런 내 생각을 이상하다고 했다. 옛 애인과 만나야 하는 현재 애인이 아무렇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애인도, 전 애인을 만나는 일이 평범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아무 문제도 없다. 전 애인과 친구가 되는 게 이상하다는 사람은 전 애인과 헤어지면 만나지 않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경우 ‘당연’하다는 것은 커플인 두 당사자가 공통적으로 인식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쩌다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책과의 관계도 이와 똑같다고 얘기하고 싶다.
운동을 한다, 게임을 한다,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온천에 간다. 그런 일들과 책을 읽는 것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운동이나 게임을 하지 않아도,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아도, 온천에 가지 않아도 아무 문제 없지만, 사람들은 거기에 뭔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 중에는 책 읽는 행위도 포함된다. 그리고 책을 읽는 것은 그런 행위 속에서 가장 특수한 사적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 누군가와 일대일로 교환될 정도로.
책을 읽는 가장 큰 재미는 그 작품 세계에 들어가 온 힘을 다하는 것이다. 한번 책의 세계에 빠지는 흥분을 알 게 된 인간은 평생 책을 읽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 가장 원시적인 기쁨을 이미 유치원에서 얻었던 것이다.
내가 사는 집 옆에는 작은 서점이 하나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시골에 종종 있는, 책을 팔지 않는 서점이었다. 만화와 주간지, 여성잡지에 만화 잡지, 거기에 문방구, 계산대에는 향기가 나는 지우개 함이 있는.
버스를 타고 도시로 나가면 책을 파는 서점이 있었다. 아주 큰 서점. 옷은 필요 없으니 책을 사 달라고 졸랐을 때 어머니가 데려갔던 곳이었다. 책이 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가장 좋아했던 곳도 도서관이었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노란색 카펫,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던 수많은 책, 유리창과 그곳에서 들어오는 햇살, 도서 담당 선생님의 목소리와 웃는 얼굴.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시시하고 재미없는 책과 만났다. 그때 나는 입원해 있었는데, 이모가 그 책을 가져다 주었다. 책이라면 무엇이든 좋았기 때문에 받자마자 읽었다.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내게 재미없다는 말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였다. 크고 컬러로 된 책이었다. 마지막까지 읽고 재미없다는 결론을 내린 나는 그 책을 놓아두고 다른 책을 읽기 시작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책은 읽었다. 읽긴 읽었지만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때의 밀월과는 조금 달랐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책의 세계보다 현실이 더 정신없었던 것 같다. 나는 아주 작은 세계에서 살았는데도 나이와 나 자신, 매일, 친구, 늘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는데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더 쉽게 표현하면 책보다 새 옷이 필요했고, 대형 서점보다 더 가슴 뛰게 하는 장소가 곳곳에 출현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친한 친구가 책 한 권을 주었다. 그림이 있는 작은 책이었다.
나는 그것을 단숨에 읽고 굉장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세계로 데려다 주는 것만이 아니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그것은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내가 병원 침대에서 재미없다면 내던진 <어린 왕자>였다. 8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받게 된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후로 나는 재미없는 책을 읽어도 ‘시시하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게 됐다. 이것도 역시 사람과 같다. 100명이 있으면 그만큼의 개성이 존재하고, 또 그만큼의 얼굴이 존재한다. 시시한 사람이란 없다. 유감스럽게도 서로 맞지 않는 사람이 있고 외모에 대한 취향도 다르지만, 그것은 상대가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쪽이 안아야 하는 문제이다. 시시한 책은 그 내용이 시시한 게 아니라 서로 맞지 않거나 이쪽의 편협한 취향에서 벗어났을 뿐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나면 맞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상대와 우연한 기회에 무척 가까워지는 경우도 있고, 이쪽 취향이 변하는 경우도 있다. 시시하다고 치부해 버리는 것은(그것을 쓴 사람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책에 실례를 범하는 일이다.
그건 그렇고, 조금씩 책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나는 대학생이 되어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맛보게 된다. 나는 문학부의 문예 전공이었다. 같은 문학 수업을 듣는 동기나 전공 동기 모두 나보다 50배나 많은 책을 읽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이 당연하게 입에 올리는 작가 이름을 전혀 몰랐다. 그들의 입에 오르는 책 제목도 거의 들은 적이 없었다. 책이 너무 좋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 생각하며 그 대학의 그 과에 들어갔는데 내가 읽은 책이란 턱도 없는 수준이었다.
충격을 받은 나는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과는 친구가 되지 않기로 했다. 상처만 받았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이야기나 연애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만 어울려 놀러 다녔다. 그리고 얻어들은 미상의 작가나 책을 남몰래 읽었다.
무식해서 좋았던 점은 이 시기,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책을 만났다는 것이다. 나는 동기들이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는 작가의 소설을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작가들의 품만 샅샅이 뒤져 읽었다.
이제까지 나는 말을 잘하기 위해, 순수하게 지식을 얻기 위해 책을 읽은 경우는 없다. 15년에 걸쳐 깨달은 것이다. 세상에는 나보다 500배, 1000배나 많은 책을 읽은 사람이 존재하고 그런 사람을 쫓아가려 해도 소용없다. 그런 일을 할 여력이 있다면 지식 같은 건 없어도 상관없는, 나를 부르는 책 한 권을 읽는 게 낫다.
그래, 책은 사람을 부른다.
아주 재미있는 책을 만나면 나는 읽으면서 자주 생각한다. 혹시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도대체 어찌 되었을까?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이 책이 없었다면, 이 책을 만나지 못했다면, 확실히 내가 본 세상은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이 있어서 좋았다. 다행이다. 친구가 없는,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한, 덜 떨어진 아이처럼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