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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가족
공선옥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3월
평점 :
얼마 전에 문학동네에서 나온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이라는 소설을 다시 들추어 보다가 로맹가리(에밀 아자르는 필명)가 왜 이 소설을 필명으로 썼는지를 술회하는 부분을 읽게 되었다. 요점은 그런 것이었다. 프랑스 비평계에 대한 일갈. 비평단에 아부하지 않으면 혹평을 사게 되고, 그렇게 되면 제대로 평가받고 부각되기가 힘들다. 이전의 평판을 무력화시키는 의미에서의 필명 사용이었던 것이다.
그때그때의 유행적 코드와 이데올로기에 편승하고 적응을 잘하면 승승장구 살아남기 쉽고,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여의치 않아지는 것.
그런데 여기에 공선옥 보면, 또 그렇지가 않다. 세상엔 많은 작가들이 있지만, 그 중에 공선옥처럼 가난에만 천착할 수 있고, 가난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가도 또 많지 않을 것이다. 매스컴이나 비평가 집단들이 자신을 부각시켜 주건 말건. 작가 후기에도 공선옥 스스로가 말하지 않았던가 (가난 회피의 사회적 심리학)을 거스르면서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가난에 대해 말하는 자신은 유랑 작가일 뿐이라고.
가난과 소외 문제가 소설의 과제로 떠오르는 것은 1970년대 즈음부터일 것이다.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나 아홉 결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처럼 도시의 노동자나 빈민들의 삶과 저항 의지를 묘사하고 사회적 관심을 촉발한 작품들이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은 여전히 실업률은 높고, 신용 불량자가 늘어나며 집 잃고 떠도는 사람이 많아진 시대이건만 가난이라는 문제는 부차적이고 지엽적인 문제가 되고, 나 개인의 가난이 큰 문제일 뿐, 부자가 많아진 것 만큼이나 가난한 자가 많아진 이 현실에 대해선 심각한 문제로 자각을 하지 못한다.
어제 중국 감독 Xiaolu Guo의 다큐멘타리 경쟁 부분 작품 ‘콘크리트 혁명’을 보았다. 자본주의가 밀려 들어와 빠르게 변화하는 중국, 베이징은 새로 들어선 고층 건물들로 즐비하고 이곳저곳에서는 오래된 건물과 집터를 허물고 고층 건물을 짓거나 도로를 건설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변혁과 새바람을 기치로 내걸고, 뚝딱뚝딱 새로운 베이징을 만들어 가고 있지만, 거기서 발생하는 가치관의 변화와 사회적 비용 특히 베이징이 아닌 다른 농촌 지역 출신의 건설 노동자들의 가난하고 남루한 유랑민 같은 삶은 외면되어 왔고, 작가는 공선옥처럼 용감하고도 뚝심 있게 중국 정부가 줄곧 외면해 온 노동자들의 모습에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고 그들의 생계와 미래에 대한 문제를 부각시키고 있었다.
베이징 인구의 전반이 넘는 건설 노동자들. 건설 현장에서의 급여를 고향에 있는 처와 자식들에게 보내면서 골판 위에서 쪽잠을 자고 목돈을 벌어 고향으로 금의환향할 꿈을 꾸며, 만두과 나물로 대충 끼니를 잇고, 공사판의 목재들로 불을 피워 곁불을 쬐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한국의 작가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감동적으로 보여 주는 작가. 공선옥은 영상이 아니라 문자를 통해 우리가 사는 시대를 누구보다 잘 조망하고 있는 다큐멘타리 작가이기도 할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