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제사 모신지 십년이 넘어가니 이제 음식 준비하는 것은 별로 부담도 가지 않는다.
시동생네 한 가족 우리집으로 오는게 전부이니 음식도 많이 할 필요 없고, 잘했다 잘못했다 책 잡을 사람도 없다.
미리 장 봐다 놓으면 자동인형처럼 바로 손이 그리로 가서 일 시작하게 될 거라는 걸 안다. 그래서 일부러 추석 하루 전날까지 버티다 장 봐왔다. 중간에 딱 한번 자리에 앉고 계속, 집중적으로 한나절 일하니 음식 준비는 거의 끝냈는데 그건 송편을 직접 만들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만들어진 송편을 사기로 했다는 말에 아이는 실망했다. 그동안 몇번 집에서 직접 만들어본 것이 재미있었나보다.
다 끝내고 방에 들어와 책상 앞에 앉았다. 창문 너머 달을 봤더니 구름인지 안개인지, 가려서 뿌옇게, 경계가 흐려있다.
추석 당일.
집에서 차례 모시고, 아침 식사 차려내고, 조금이라도 일찍 출발해야 길이 덜 막힌다고 해서 산같은 설겆이 더미 그대로 쌓아둔채 산소로 출발. 그랬음에도 아침부터 고속도로가 얼마나 막히던지. 가다 서다 반복하여 겨우 산소에 도착했는데, 날도 더워 아이들은 땀을 뻘뻘 흘리고, 좀처럼 땀 안흘리는 남편의 얼굴에도 땀이 송글송글했다.
돌아오는 길은 그래도 도로 사정이 나았으면 했으나 갈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막히는건 마찬가지였다. 아침 먹고 출발해서 집에 돌아와 점심겸 저녁을 차린 것이 오후 5시 반. 남아있는 산같은 설겆이, 남편이 해준다고 하는데 7시간 운전한 사람에게 또 설겆이를 시킬 수 없었다. 다 하고 방에 들어와 책상에 앉으니, 아! 이젠 달이 보인다. 신선한 달걀을 프라이팬에 탁 깨뜨려 넣었을때처럼 경계가 또렷한, 둥그런 달이!
달 보며 소원을 빌 여력도 없어 사진 찍어야지 생각만 하며 그냥 쳐다보고만 있는데 아이가 들어온다.
"너, 지금까지 컴퓨터 앞에 있었지?"
피곤함이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로 날아가려는 순간이다.
"오기 마치의 모험 읽고 있었는데 무슨 내용이 이래요? 이 사람과 결혼했다가, 또 다른 사람과 바람이 나고, 헤어지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고. 하는 일도 계속 바뀌고."
"그러니까 소설 거리가 되는거지."
"만나고 사귀는 사람이 계속 바뀌니까 읽으면서 헛갈린다니까요."
"맞아. 그래서 옆에다 종이 놓고 Family tree 같은거 그려가며 읽어야되는 책들 있어."
"제가 지금 그러고 있어요."
매일 회사에 출근해서 정해진 일을 해야하는 직장인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는데 엄마는 대부분 집에서 일을 해도 되니 좋겠다는 둥, 요즘은 남자 아이들까지도 스키니 바지 입는 것이 유행인 이유를 모르겠다는 둥, 점점 포동포동해져가는 아들과 수다를 떨고 있는데 아들 눈에 이미 내 눈이 졸음으로 풀려있었나보다.
"이불 깔아줄까요?"
아들이 깔아준 이불 위에 그대로 누워버리니 나가면서 방에 불도 꺼준다.
"고마워."
올해 추석은 이렇게 가는구나. 바로 스르르 잠의 나라로.
추석날 좋았던 것이라면, 부모님 안계신 남편이 오랜만에 형제를 보고 좋은지 평소보다 말이 많아지고 더 자주 웃는 것.
추석날 힘들었던 것이라면, 음식도 아니고 설겆이도 아니고 한낮의 더위도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꼼짝없이 차 속에서 보내야했던 일곱 시간이다.
성묘 가면서 본 논의 벼가 아직은 파랬다.
곧 누렇게 익어가겠지.
군데군데 알록달록 알미늄 허수아비가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 제법 이리 흔들 저리 흔들하며 제 임무를 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