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의 일이다.
프랑스에서 박사후 과정 연구원으로 세달동안 내가 있던 연구실로 파견나와 있던 Isabelle을 연구실 사람들은 별로 좋아하질 않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내가 보기엔 그저 타지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 플러스, 객식구로서의 자신의 신분을 의식해서 Isabelle이 의식적으로 더 연구실 사람들에게 상냥하게 군다거나, 더 어울리려 든다거나, 그런 타입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일까, 또 굳이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영국과 프랑스 사람들은 참으로 성향이 다르더라는, 내가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겪어 보고 알게 된 것, 그것도 이유가 될지는 모르겠다.

어느 날, 크리스마스 파티 비슷한 자리에서 영국식 유머에 대한 얘기였는지 아무튼 무슨 얘기인가가 오가던 중 우리 연구실의 최고참인 테크니션 영국인 할머니 (인자한 할머니 보다는 터프한 할머니에 가깝다) 가 그나마 친절하게 Isabelle에게 "너희 프랑스 사람들과는 참 틀리지?" 라고 말했더니 Isabelle의 대답, "당신이 프랑스 사람을 알아?" 
허걱~


아래 영화 소개를 보며 문득 그날 일이 한 장면처럼 떠올랐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아직 한편도 보질 못했으면서 내 머리속에는 어떤 선입관이 언제부터 미리 들어와 앉아있다.
보고 싶은 영화로 찜. 

  

위의 Isabelle은 애초 예정했던 세달 기간이 6개월로 연장되어 우리 연구실에 있는 동안 나랑 참 친하게 지냈다. 우리는 서로 동갑이기도 했고, 성격이 매우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내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지 않는 (못하는) 나의 그 멋없는 성격과, 지극히 합리적이면서 변덕이 심하지 않으며, 영화와 박물관, 미술관 다니기를 좋아하는 그녀의 성향이 다행히 조화를 잘 이룬 덕이었다. 어디다 내 놓아도 꿋꿋하게 잘 살아나갈 것 같은, 씩씩한 그녀의 눈에 어느 날 갑자기 눈물이 맺히며, 예전에 한동안 사귀던 연인이 왜 갑자기 자기를 떠났는지 아직도 자기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벌써 10년 전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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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09-05-11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보고 싶던데.
뭔가, 좀 더 괜찮은 댓글을 달고 싶은데 요샌 어찌된게 댓글을 달려다가도 손이 툭 떨어져버리는 것만 같아선. 정말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람들을 판단하는 경우가 참 많죠.

hnine 2009-05-11 20:05   좋아요 0 | URL
저도 Arch님 서재 가서 페이퍼 다 읽고도 뭐라고 댓글을 달아야할지 몰라 멀뚱하게 그냥 나오는 때가 얼마나 많다구요. 심각한 듯 한데 언제나 웃음 나올 대목이 숨어 있는. ^^
전 이렇게 찜 해놓고도 꼭 본다고 장담 못해요.

새초롬너구리 2009-05-11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영화제목이란 은근히도 무척이나 중요한지 모르겠어요. 전 영화 제목때문에 어제 드디어 [타인의 취향]을 보았지요.

과연 '잘'안다는게 뭔지 모르겠어요.

"니들이 게맛을 알아?"란 말, 그건 진짜게가 아닌 게맛의 성분이 더 많은 음식이 재미있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열광시키잖아요.

hnine 2009-05-11 20:08   좋아요 0 | URL
새초롬너구리님, 잘 안다는게 뭔가 부터 생각하는 사람이 뭔가를 안다고 말하면 그건 정말 잘 아는거 아닐까요^^
사실 "네가 날 알아?" 라고 누군가에게 말하는 순간, 그런 나는 나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나, 그런 생각도 해본 적 있어요.
<타인의 취향>이라, 정말 제목때문에 끌릴만한데요.

하늘바람 2009-05-11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상수 감독 영화를 보면 슬퍼져요. 왜냐면 그냥 영화같지 않고 삶같아서요.

hnine 2009-05-11 20:08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그렇게 리얼한가요?

2009-05-11 1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1 2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1 2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2 0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9-05-12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기다리고 있어요.
이사벨, 그녀에게 왠지 끌리네요. 연약하고 사랑스러울 것 같아요, 속으론.
잘 알지도 못하면서 ㅎㅎ

hnine 2009-05-12 21:37   좋아요 0 | URL
이사벨은 우리가 떠올리는 프랑스 여자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아주 당당하고 씩씩하고 독립적인 여자였어요. 제 성격을 딱 뒤집어놓은 듯한~ ^^
어떻게 우리 둘이 그렇게 친할 수 있었나, 지금 생각해도 신기해요.
이 페이퍼 쓰고 나니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지네요.

L.SHIN 2009-05-12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국과 프랑스는...오랜 전부터 사이가 그닥 좋지는 않았죠. 오래된 골의 유전이랄까..
하지만 역시 누군가 나에 대해 잘 아는 것 처럼 떠들면 기분이 나쁜 것은 사실이죠.^^

hnine 2009-05-12 16:40   좋아요 0 | URL
그런걸 알고 나서 보니 양국의 국민성도 참 많이 틀린 것 같고요. 제가 아는 프랑스 사람이란 위의 Isabelle뿐인데 그녀의 예를 들어 모든 프랑스 사람들은 어떻더라 하고 얘기하면 안되겠지만요. 휴~ 조심스러워라 ^^
 



 

  

 

 

 



 

 

 

 

 

 

 

 

 

 

 

 



 

 

 

 

 

 

 

 

 

 

 

 

 

오늘 내가 뽑은 그림,  Cy Twombly
King of scribble 이라고 소개되기도 하는 사람이다. 

위의 세 작품 모두 제목은 'Untit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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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분의 부고를 듣다.

중학교 입학해서 받아 본 영어 교과서. 좋아라 여기 저기 들춰보다가 교과서 집필진까지 한사람 한사람 살펴 보고, 이름이 특이해서인지 그 이후로도 그 중 유독 '장 왕록'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학력고사 점수 발표후 그 어느 것에도 의욕을 잃고 집안에 틀어박혀 바깥 출입도 안하고 있을 때 우연히 샘터라는 잡지에서 처음 이분의 글을 보게 되었고, 기억 속의 장 왕록 교수의 따님이란 것을 알고 무슨 나만의 보물을 발견한 양, 나만의 사람을 발견한 양 가슴이 뛰었었다. 그때부터 그 샘터라는 잡지를 한달도 빼놓지 않고 사서 이 분의 글을 꼭 꼭 챙겨 읽었었는데.

나귀님 페이퍼에 쓰신 것 처럼, 이제 생전에 그렇게 그리워 하시던 아버님 '장 왕록'교수님과도 해후하시고, 이승보다 더 기적같은 세상을 누리시겠지. 그러시겠지.


(그래도 마음이 참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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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Journey 2009-05-09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 그림을 보면서 '이 그림들의 제목은 무엇일까?' 궁금해했는데 ... 무제였군요. ^^*
그림의 분위기가 마음에 드네요. ^^

hnine 2009-05-09 21:38   좋아요 0 | URL
가는 선을 이용한 이런 그림 아니면 마치 판화 같은 그림, 이렇게 그림이 극과 극을 달리고 있더군요. 가운데 그림은 연필과 크레용으로 그렸대요. 그리고 하트 모양이 그림 속에 많아요.

스파피필름 2009-05-10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마음이 아프네요.. 무언가 잡고 있던 것을 놓쳐버린 느낌이에요..

hnine 2009-05-10 20:46   좋아요 0 | URL
스파피필름님, 어서 오세요.
누구나 한번 태어나면 죽기 마련이라지만, 아직도 죽음이라는 것에서 슬픔과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어요. 특히 이런 분의 부고를 들을 때는요.

프레이야 2009-05-10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라고 제목 붙이고 싶은 묘한 그림들이네요.
그분의 죽음, 안타깝지요. 명복을 빕니다.

hnine 2009-05-10 20:49   좋아요 0 | URL
이 사람의 그림 속의 그 많은 하트는 바로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나봐요. 혜경님 덕분에 알게 되었네요.

장 영희 님의 마지막 저서 제목이 의미심장하지요. 하루 하루 주어진 삶을 기적처럼 소중히, 감사히 여기며 살아야겠어요. 아무리 힘든 일이 있더라도, 열심히 살아야겠어요...

세실 2009-05-10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그림은 하트가 그려져 있군요. 낙서 같기도 합니다.
장영희 교수님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 참 좋아하는데.....
마음이 많이 아파요.
고통없는 행복한 삶 영원히 누리시길 빕니다.


hnine 2009-05-11 07:27   좋아요 0 | URL
어린아이들의 낙서를 많이 닮았지요? ^^
두번째 그림에도 하트가 있어요.

김점선 화가의 부음에도 많이 안타까웠는데, 장영희 교수님까지...
허무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네요.

야클 2009-05-11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 '문학의 숲을 거닐다'출간시 사인받으러 교보문고까지 갔던 기억이 납니다.조간신문에 실린 그분 기사들 보다가 마음이 참 아프더군요.

hnine 2009-05-11 14:42   좋아요 0 | URL
야클님 서재에 쓰신대로 그동안 몸과 마음 고생이 많았을 얘기들을 지나치게 감정적이지 않게 차분하면서도 밝게 써내려 간 글들, 갑자기 운명하신 아버지 장 왕록 교수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글들이 기억에 남아요. 아버지에 이어 영문학자로서의 길을 멈추지 않고 싶은 마음, 언젠가는 나아서 다시 학생들 앞에 서리라 했던 것들도요.
좋은 곳으로 가셨기를, 그 말 밖에 할 말이 없어요.
 

 

조금있으면 아이 생일이 돌아온다. 생일 선물로 DVD를 사줄까 하고 검색하다가 '한반도의 공룡' 시리즈와 '그리스 로마 신화' 세트, 일단 이 두 가지를 골라 놓았다.     

 

 

 

       

 

          

 

 

 

  

 

 

 

 

  

 

 

 

 아이에게 어느 것이 더 좋은지 고르라고 했더니 대뜸,
"유치해요." 이러는거다. 그야말로 허걱~

지난 주말엔 마트에서 계산을 마치고 돌아나오는데 뒤따라오던 아이가 투덜투덜거린다.
계산대 아주머니께서 자기에게 '아가' 라고 하셨다는거다.
자기는 이제 아기가 아닌데 그렇게 부르신다며.  

어제는 아이와 동네 수퍼엘 다녀오는데 돌아오는 길에 놀이터를 지나게 되었다. 꼬마들이 한창 재밌게 놀이터에서 놀고 있길래, 엄마 먼저 들어갈테니 너도 놀다 들어올테냐고 물었더니, 자긴 이제 저런 놀이터에서 안 논단다. 어린애들이나 저런 놀이터에서 노는 거라고. 

음...이제 아홉살.
그래, 그런 주장을 할만한 나이지. 

아 참, 그런데 다린!
이제 아기 아니라면서 밤에 잘 때마다 엄마가 옆에 같이 누워 토닥토닥 해줘야 잠자는건 뭔데? 그러다가 할일 남겨놓고 엄마도 그대로 잠들어버려 낭패본 날이 하루 이틀인지 알아? (ㅋㅋ)
그리고 또 있다. 한반도의 공룡이랑 그리스 로마 신화 비디오가 유치하다면서 결국 만화 Droopy 비디오를 골라놓은건 또 뭐고.  
(Droopy는 엄마도 좋아하는 만화이기때문에 모르는 척 사주기로 했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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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5-08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치해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
허걱 이라고 표현하신 글에 저도 허걱.. ㅎㅎㅎㅎㅎㅎ
다린이가 이렇게 많이 컸네요. 나인님..
아기라고 부르면 아이들이 싫어하더라구요. 저는 은근 마음 다해서 다정스럽게 말해주는 건데도... 그게 자신들을 우습게 여긴다고 생각하나봐요..

다린이가 보여줄 앞으로의 기적들에 아마도 더 많이 기쁘고 놀래고 행복하실 것 같아요. 아홉살.. <아직 엄마 품에 있지만..> 그 나인 정말... 눈치도 빤하고 알거모를 거 다 알아갈 나이 맞는거 같아요. ^^

hnine 2009-05-08 22:13   좋아요 0 | URL
아이가 있으면 이런 작은 일들로 웃을 일이 있어서 좋아요.
진지하게 말하는 폼이 더 웃기거든요.
그런데 저 '유치'라는 단어는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네요 ^^

조선인 2009-05-08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람이는 4살인데도 아기라고 부르면 성내는걸요.

hnine 2009-05-08 21:56   좋아요 0 | URL
ㅋㅋ 해람이가 9살이면 어른 대접 해줘야겠는걸요? ^^

프레이야 2009-05-09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린이가 부쩍 자라고 있군요.^^

hnine 2009-05-09 15:11   좋아요 0 | URL
커가는게 대견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그렇네요.

러브포토 2009-05-10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오~
두루피~!

hnine 2009-05-10 23:18   좋아요 0 | URL
곧 다린이도 완벽하게 흉내내게 될꺼임~^^

러브포토 2009-05-11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총총총총...(엉금엉금 기어오는 모습)
스윽~(90도 방향으로 고개 돌리는 모습)
"우리 할머니께서 늘 말씀하셨지..... 중얼중얼....."
으흐흐흐......

세실 2009-05-11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규환이는 지금도 아가라고 부르면 좋아합니다. 막내라 그런가요. ㅎㅎ 어리광쟁이랍니다.
설거지하는 다린이 의젓합니다. 든든하시겠어요.

hnine 2009-05-11 20:20   좋아요 0 | URL
규환이에게 아가라고 많이 불러주세요. 부르는 어감도 좋지 않나요? 다린이가 뭘 몰라요 ㅋㅋ
설거지에 이어 요즘은 가서 두부 한모 사오라는 심부름도 시킨답니다 ㅋㅋ
 



 

 

 

 

 

 

 

A young boy cries as he waits for his father, in a truck at a refugee camp in Mardan, in northwest Pakistan, Thursday, May 7, 2009. Thousands of residents are fleeing fighting between the army and Taliban militants in the Swat Valley, in Pakistan's northwest.
(AP Photo/Greg B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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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나를 미치게 할 때 - 화내거나 짜증내지 않고 아이 마음과 소통하는 법
에다 레샨 지음, 김인숙 옮김 / 푸른육아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원제도 그대로이다. 'When your child drives you crazy'. '아이가 나를 미치게 할때'란 우리말 제목은 그러니까 번역본으로 나오면서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따로 붙여진 제목은 아닌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라면 아이들이 주는 기쁨과 행복도 크지만 또 그 기쁨과 행복을 주는 바로 그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 순간 엄마를 그야말로 미치게 할 정도로 화나게 하는지도 알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그렇게 화가 날 지언정 그것이 아이가 의도한 바는 아니다. 아이는 단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자 했을 뿐이다. 부모에게 반항하기 위해, 보란듯이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는 시기가 아직 아닌 아이들의 어떤 행동이 결과적으로 엄마를 화나게 했을 때에는 늘 말하듯이 그 행위 자체만 문제 행동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이 나타내는 아이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머리'와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요점은 그것인데 400쪽이 넘는 분량의 이 책에서는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았을까.
하나의 요점으로 정리가 되는 것이 육아라면, 하나의 확실한 정답이 있는 것이 육아라면 아마 이렇게,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 소리가 그 소리 같은 이야기들로 이 두터운 분량의 책이 쓰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또 하나, 아이들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다보면 바로 아이를 키우는 사람의 문제가 불겨져 나오기 때문이다. 육아가 꼭 아이를 키우는 것인가? 육아란 아이를 통해 이미 다 자란 것 같은, 이 엄마가 다시 세워지는 과정이라는 것도 아이를 키워본 엄마들은 모두 알 것이다. 그래서 육아책이 이렇게 두터워 질 수 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거짓말이라는 행위 하나를 봐도 아이들이 하는 거짓말은 어른이 하는 거짓말과 동기부터가 다르다고 한다. 아이의 동기는 현실에 대한 이해 수준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진짜와 가짜가 헷갈리는 상황에서 상상력과 구분이 힘들게 꾸며대는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거짓말을 처음부터 옳고 그름의 문제로 연관지어 야단치기 보다는 거짓말로 인해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신뢰의 개념을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주는 편이 낫다.
아이가 자라면서 엄마의 잔소리가 많이 가는 것 중의 하나인 버릇없는 행동에 대한 것도, 버릇없는 행동과 '나쁜 아이'를 연관지어 야단을 치지는 말아야 하며, 예의바른 행동은 아이의 행복감과 안정된 정서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내 아이가 행복한가'를 관심있게 살펴야 한다.
사실, 아이의 어떤 행동을 심하게 야단치고 있을 때, 지금 내가 아이의 그 행동을 바로 잡아 주기 위해 야단을 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때를 기회로 엄마된 나의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인지 살펴 봐야 한다. 그동안 감춰져 있거나 자신도 모르던 분노가, 내 앞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는, 내가 분출하는대로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존재 앞에서 아무 여과 없이 그대로 폭발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사실들을 알았을 때 절망하고 무력해질 것이 아니다. 부모도 아이와 함께 성장해나간 다는 것을 인정하고 노력하는 편이 낫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남의 말에 귀기울이며, 책을 읽고, 고민하는 것, 이런 과정들은 부모가 된 이상 어느 한 시기가 아니라 일생을 두고 노력해야할 중요하고도 가치있는 일 아닐까. 그래서 뭐가 얼마나 달라지겠냐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건 어떻게 보면 내가 관여할 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 중에서 어떤 작은 변화라도 생긴다면 감사할 일이고, 어느 한가지를 위해 중단없는 노력을 기울이려 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스스로를 격려해주고 싶다. 내 자신이 얼마나 모자라는 존재인지를 알고 있기에.
아이를 키우며 부모가 듣는 잔소리중 제일 많이 듣게 되는 것 중의 하나, '일관성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엄마의 입장에서 나는 이 소리를 들으면 벌써 신경이 곤두선다. 엄마도 인간인 이상, 항상 일관성 있게 행동할 수 만은 없는 것이다. 어찌 이리 무지막지한 요구가 엄마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진단 말인가.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앞 일을 예상할 수 있고, 사람들이 모두 똑같을 때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육아에 있어 일관성을 유지하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이 책 중의 말이 그래서인지 얼마나 위안이 되던지. 엄마도 잘 못 행동할 때가 있고, 실수도 하는 평범한 인간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또 늘 똑같은 기계처럼 행동하는 것보다는 합리적인 목표를 세워 묵표에 맞는다면 상황에 따라 필요한 조정을 할 수 있는 것이 오히려 더 바람직하다고 조언한다. 아이가 생기 넘치고 호기심 왕성하고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면 인간은 늘 똑같을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이 책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감히 말한다. 피임의 방법이 과거에 비해 점점 더 쉬워지고 부모가 되는 것을 본인이 선택할 수 있게 되어가는 시대에, 부모가 되어 아기를 갖는 것이 기쁘지 않다면 아예 낳지 말아야 한다고. 그게 올바른 생각이라고. 아기를 낳고 키우며 얻는 기쁨은 요즘에 다들 생각하는 기쁨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갖고 싶은 것을 얻고, 자기가 원할 때 원하는 일을 하고, 힘들게 노력하지 않고 화가 나거나 조급해 하거나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이 기쁨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이에게서 얻는 기쁨은 아닐거라고.

여러 세대가 함께 살면서 '내가 아이 키울 때는 말이다~' 라며 어떤 조언을 들려줄 어른이 옆에 없다. 예전처럼 아이를 많이 낳지 않으니 시행착오의 여지도 없다. 그야말로 한번 잘못하면 꽝이라는 생각에 아이 키우는 부모는 늘 조바심이다. 육아책은 아마도 끊임없이 나올 것이고, 그 소리가 그소리네 어쩝네 하면서도 아마 나 같은 사람은 계속 그런 책을 끼고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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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5-07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가 나를 미치게 할때가 그토록 많아서 400쪽이 된 건 아니겠지요? ㅎㅎㅎ

농담이구요, 일관성을 유지하는 엄마, 아이의 행동에서 아이의 마음을 볼 수 있는 엄마, 자신의 분노를 아이에게 표출하지 않는 엄마가 되는 길은 참 멀기만 합니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하는 hnine님 모습이 존경스럽지요.

hnine 2009-05-07 21:19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솔직히 중복된 내용이 많은 감이 없지 않아 있어요. 그럼에도 다 읽고서 보니 중간 중간 제가 표시해놓은 곳이 꽤 있더라구요.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한다고 말씀하시니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어져요. 제가 아이에게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의 대부분이 바로 저의 분노를 표출하는 경우에 해당하는, 정말 누구보다 노력과 수양이 필요한 엄마랍니다.

fallin 2009-06-15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읽었어요 ^^ 책을 찾던 중에 hnine님의 서평보고 반가운 맘에 인사드립니다.
저도 꼭 읽어봐야겠어요!

hnine 2009-06-15 14:17   좋아요 0 | URL
fallin님, 반가와요. 오랜만이시지요? 잘 지내시고 계셨으리라 생각은 했습니다만 가끔씩 궁금했습니다.
이 책은 워낙 두꺼워서 읽는 동안 살짝 지루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아이를 낳아서 잘 키워보겠다는 각오가 제대로 서있지 않다면 아이를 낳지 말아라' 제가 읽어본 육아서 중에 이렇게 당당하게 말한 책은 이 책이 처음이어서 인상적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