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설처럼 - 우리시대의 지성 5-016 ㅣ (구) 문지 스펙트럼 16
다니엘 페낙 지음, 이정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아이를 가진 부모라면 누구나 내 아이를 이런 아이로 키우고 싶다는 바람이 다 있을거라 생각된다. 내 경우엔 두가지, 책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해주자는 것과 어릴 때 어디든 여행을 많이 해보게 하자는 것이었다.
책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고 해서 내가 아이에게 책을 많이 사준 것도 아니다. 내가 읽을 책도 필요하고 또 아이 데리고 먼데 갈만큼 부지런하지도 못하여 아이 데리고 도서관에 자주 갔다. 나는 내 책을 고르고 아이는 자기 읽고 싶은 책을 맘껏 뽑아 읽도록 했다. 아이가 무슨 책을 골라 읽는지 흘끔 넘겨 보고 나도 아는 책이면 책 내용에 대해 아이와 얘기도 나누고, 그 일은 아이가 열 세살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한 일은 거기까지가 전부이고 한번도 독후감을 써보라고 해본 적이 없다.지금 아이들의 엄청난 독서량에 못미쳐서 그랬는지 어릴 때 난 한권 읽으면 반드시 독후감 노트에 기록을 하여야 했는데 책 한권 읽고 나면 숙제가 하나씩 늘어나는게 싫었었다. 독후감을 써서 좋은 점은 잘 알고 있는데도 빨리 다음 책 읽고 싶은데 그거 쓰느라 머리를 써야하는게 귀찮았고 어떤 때는 독후감을 쓰는 동안 책 읽은 후의 그 생생한 감동이 한풀 꺾이기도 했다. 만약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서 선생님께서 숙제로 내주시면 해야겠지만 내가 집에서 따로 독후감 쓰도록 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 학교에서도 지금까지 독후감 쓰라는 숙제를 내주지 않는다. 대신 책 읽고 난 후 그 내용에 대한 퀴즈를 풀게 하는데 퀴즈를 푸는 동안 책 내용이 한번 정리되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책을 읽은 후 지금 이렇게 기록을 남기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것의 필요성을 안다는 것이고, 그것이 그리 귀찮거나 싫지 않다는 것이다. 누가 시켜서 해도 그럴까?
이 책의 제목만 보면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이 들수도 있는데 제목을 풀어서 얘기하자면 소설은 그냥 소설로 읽게 하라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어린이 책으로 <까모와 나>, <늑대의 눈> 등의 어린이책으로 우리 나라에도 많이 알려진 다니엘 페낙이다. 학교 교사로서 학생들의 책 읽기 교육을 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는데 책의 첫장에 다음과 같은 말에 저자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난다.
'부디 이 책을 강압적인 교육의 방편으로 삼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교육자'를 자처하지만, 실은 우리는 아이에게 성마르게 빚 독촉을 해대는 '고리대금업자'와 다를 바가 없다. 말하자면 얄팍한 '지식'을 밑천 삼아, 서푼어치의 '지식'을 꿔주고 이자를 요구하는 격이다. (61쪽)
우리는 다그치고 또 다그친다. 맙소사, 불과 열댓 줄 남짓한 글의 내용을 내 아이가 이해하지 못한다니! 도저히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우리가 무슨 바닷물을 통째로 삼키라는 건가, 읽어봤자 기껏 열댓 줄일 뿐인데. 이야기꾼이었던 우리는 이제 몇 줄, 몇 장까지도 꼬장꼬장 챙기는 회계 감사원이 되어버렸다.
"좋아! 그렇다면 이제 텔레비전 볼 생각일랑 아예 하지도 마!"
그렇다. 변명할 여지가 없다, 텔레비전이 보상이라는 지위로 격상됨에 따라, 당연히 독서가 억지로 해야 할 고역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에게서 나온 우리 스스로의 발상이었다는 사실을. (65쪽)
어른들은 읽기를 익히게 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강구하는 데에만 열을 올린다. 그럴듯한 공부방을 꾸며주고, 독서 카드를 만들고, 출판사를 무색케 할 만큼 온갖 전집류로 도배를 한다.
조급하게 얻으려고 서두르지 않는 것이 곧 가장 확실하고 빠르게 얻는 길이다. (67쪽)
이 모든 것이 다 아이를 위해서 그런거라는 말은 제일 하기 쉬운 변명이다. 그게 아이를 위한 것일까,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있는지.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없는 사람과 바쁜데도 책을 읽는 사람이 있다. 저자는 책 읽는 시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책 읽는 시간은 언제나 훔친 시간이다 (글을 쓰는 시간이나 연애하는 시간처럼 말이다). 대체 어디에서 훔쳐낸단 말인가? 굳이 말하자면 살아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의무의 시간들에서이다.
책을 읽는 시간은 사랑하는 시간이 그렇듯, 삶의 시간을 확장시킨다.
만약 사랑도 하루 계획표대로 해야 하는 것이라면, 사랑에 빠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누군들 사랑할 시간이 나겠는가? 그런데도 사랑에 빠진 사람이 사랑할 시간을 내지 못하는 경우는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독서란 효율적인 시간 운용이라는 사회적 차원과는 거리가 멀다. 독서도 사랑이 그렇듯 그저 존재하는 방식인 것이다. (161쪽)
알만한 사람은 공감할 구절이다.
아이들이 자연스레 책읽기에 길들게 하려면 단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즉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책을 읽어주는 것은 선물과도 같다.
읽어주고 그저 기다리는 것이다.
읽고 또 읽어주면서, 아이들의 눈이 열리고 아이들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차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163쪽)
청소년들에게 서로 책에 대해 이야기 할 시간을 갖게하는 것도 좋은 일이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이 유익할 수 있는 과정이긴하나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토론, 혹은 이야기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작품이다. 또한 독서를 하면서 가장 먼저 누릴 수 있는 권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다.
어쩌면 그동안 내가 아이에게 따로 독서지도라는 것을 해오지 않은 것에 대한 구실을 찾기 위해 이 책을 읽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그 충분한 변명거리를 이 책에서 찾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책읽기에 대한 그 어떠한 효율적인 방법도 책읽기에 대한 흥미를 앞지르게 하면 안될거라는 것, 그것은 대부분 동의하리라 생각한다.
이제, 이 책과 반대 입장에서 쓴 책도 한번 찾아 읽어봐야겠다. 생각이 한쪽으로 굳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