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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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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도 훌쩍 넘은 일이다. 집을 떠나는 내 짐 가방 속에 나는 허용된 짐의 무게 때문에 몇 권 안되는 책만 넣을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엄선되어 나와 함께 먼길을 동행 해준 책 중의 하나가 최영미의 산문집 '시대의 우울'이었다. 이후로 나는 우리 말과 글이 고플 때마다 그 책을 읽고 또 읽고, 나중에는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다가 잠이 들기도 했는데, 그렇게 여러 번 읽으면서도 물리지 않았던 것이 참 신기하다. 그 때 나의 정서 코드와 잘 맞았던 이유도 있었겠고, 한번 책을 손에 잡게 되면 쉽게 놓게 되지 않게 하는 그녀만의 어떤 매력이 분명히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첫정이 무섭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녀를 일약 스타처럼 만들어버린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서 부터 시작해서, 이후에 나온 시집 '꿈의 페달을 밟고', '돼지들에게', 가장 최근의 '도착하지 않은 삶', 그리고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화가의 우연한 시선'과 같은 산문집, 그녀가 무척 공들여 쓴 듯 하나 내 기대만큼은 아니었던 자전적 소설 '흉터와 무늬'에 이르기 까지 모두 나의 애장 목록 들이니.
작년에 이 산문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 언제 읽게 되느냐가 문제이지 결국엔 이것도 읽게 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별로 서두름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행 에세이로 소개되는 이 책의 차례를 훑어 보니 대부분 그녀가 이전에 가본 적이 있는 곳들이었다. 그렇지, 언제는 그녀가 여행하면서 기행문을 썼던가, 여행은, 그리고 그림은 하나의 말문을 트는 수단이었지. 자기 모순을 그토록 분명하게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입 밖에 낼 수 있는 강단, 그 차가운 서정이 매력적인, 천상 글쟁이인 그녀 덕분에 나는 Rothko를 알았고, Eves Klein을 알았고, Kollwitz를 알았다.

예술을 알면, 문학을 좋아하면 인생이 복잡해진다. 좋게 말해 인생이 풍요로워진다. 보통 사람들은 밖에 보이는 것만 보고 이렇다 저렇다 미추를 논하는데, 예술가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다른 각도에서 보는 사람들이거든. (120쪽)

이 책의 내용 대부분은 2006년, 그녀 나이 마흔 다섯에 했던 여행 기록이니, 지금의 내 나이이다. 갑자기 힘이 불끈, 혼자서 여행이 여전히 가능한 나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내가 길눈이 밝았다면 헤매지 않았다. 헤매지 않았으면 어느 화사한 봄밤에 친구도 만나지 못했고, 숨은 보물의 맛도 몰랐을 것이다. (28쪽)

꼭 여행지에서의 길눈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살면서, 길을 잃었다는 느낌, 한참 가던 길인데 느닷없이 이 길이 아니었다는 느낌, 그때의 막막함과 절망감, 난 이제 어떻게 하나 울어도 시원찮을 그런 경험을 말하는 것 아닐까.
2부의 예술가의 초상 편의 일부 글은 어딘가 눈에 익다 싶었는데, 작가 후기에 밝히기를 일부는 이전 산문집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에 실렸던 글이라고 한다.
박수근의 그림을 보며 그녀가 던진 물음,

팍팍한 현실을 견뎌내는 모진 목숨의 뿌리는 무엇인가 (183쪽)

의 답을 나 스스로 그녀의 또 다른 페이지에서 찾는다.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한송이 백합꽃잎의 미묘한 향기를 맡아보는걸로 충분하다고. 아니면 한마리 고양이와 주고 받는 따스한 눈길...어쩌면 거기에, 그 관조의 눈빛 속에 길이 있다고. (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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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1-24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도 최영미 팬이었군요. 나도 조금 좋아해요.^^

hnine 2010-01-25 03:40   좋아요 0 | URL
팬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TV나 라디오에 가끔 인터뷰 나오는 것을 보면 생각보다 털털한 것 같기도 해요.

세실 2010-01-25 0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닿는 글을 발견하는 기쁨 참 좋아요. 관조의 눈빛속에 길이 있다고....특히 좋습니다.
여행산문집이 새로 나왔군요. 저도 보관함으로 클릭^*^

hnine 2010-01-25 07:24   좋아요 0 | URL
때로는 떠들썩한 말이나 글보다, 느낌으로 깨닫는 그 속에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이겠지요.
세실님, 이렇게 일찍 들러주시다니, 반갑고 고맙습니다 ^^

gimssim 2010-01-26 0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서른, 잔치는 끝났다> 시집을 좋아해요. 정말 시대의 우울을 '용감하게' 외치는 그녀의 소신 내지는 강단을... 근데 얼마전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를 사서 읽고 좀 실망했어요. 뒷 부분...자기 입장이랄까, 자기 보호를 주장하는 글을 너무 장황하게 실었더군요. 예전의 그 강단은 어디갔나 싶더군요. <길을 잃어야 진자 여행이다>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네요.

hnine 2010-01-25 07:27   좋아요 0 | URL
그 시집은 좋아하는 사람도, 또 비호감을 나타내는 사람도 많았던 시집이었지요. 시집 제목을 패러디한 말들도 많이 나왔었고요. 아마 그러면서 시인 자신에게도 자기 입장에 대한 할말이 많이 생겼던듯도 싶어요.
<우연히 내 일기를...>은 제목이 특이해서, 읽을 때 마치 제가 저자의 일기를 엿보는 입장이 되는것인가 하는 생각도 했었어요 ^^

아시마 2010-01-25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한테는 양 극단에 있는 작가예요. 몇몇 작품은 너무 좋고 몇몇 작품은 그야말로 뜨악하구요. <우연히 내 일기를...>은, 글쎄요. 그닥, 싶었고요.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히트할만한 시집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좋은 작품이다 아니다 이걸 떠나서요. 흉터와 무늬에 대한 생각은 저와 비슷하신 듯 해서 반가웠어요. 그쵸, 작가는 무척 공들여 썼다는 느낌인데 기대에는 못미친다 그런 느낌. 전 사실 최영미에 대해서는 큰 기대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낮은 기대치조차. 싶어서 한동안 이 작가 책은 그만 읽을까 싶기도 했다지요.

hnine 2010-01-25 20:01   좋아요 0 | URL
아시마님 말씀이 이해가 가요. 저는 서른 잔치를 끝났다 라는 시집에 너무 푹 빠졌었나봐요. 아직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네요.

같은하늘 2010-01-26 0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서른 잔치는 끝났다> 시집만 갖고 있는데 다른분 서재에서 이 책보니 아주 많이 궁금하더라구요.^^

hnine 2010-01-26 04:47   좋아요 0 | URL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이후의 그녀의 작품들을 거의 다 읽어보았는데, 처음 작품에서 받은 감동이 제일 큰 것 같아요. 이후 작품들을 또 기다려봐야지요.

비로그인 2010-02-08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렇군요.. 잠시 눈을 감고 뭔가를 생각해 봅니다~

hnine 2010-02-09 04:59   좋아요 0 | URL
제가 좋아하는 작가랍니다. 그림에 대한 글도 잘 쓰고, 시도 잘 쓰고...^^
 
이별 잦은 시절
로제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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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로제 그르니에, 그는 현대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문인 중의 한 사람이다. 1919년 생이면서 지금도 프랑스 최고의 명문 갈리마르사에 출근하여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집필활동을 계속 하고 있다는 그가 87세의 나이에 펴낸 소설집이 바로 이 책이다.
모두 10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늘 그러듯이 한편 한편 글을 읽어나가는 과정은 작가를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해서 두가지 재미가 있다.
맨 처음 실린 글이며 이 책의 제목이 되기도 한 '이별 잦은 시절'은, 상황의 지배를 받는 것이 사랑, 그래서 사랑은 결코 영원불변하지 않기 때문에 이별의 잦음 또한 의외의 사건은 아니라는 것을, 연락이 끊긴 연인을 그리움에 못이겨 불안정한 정세에도 불구하고 기차여행을 감내하며 찾아가는 주인공 남자를 통해 말하고 있다. 그렇게 찾아가서 가까스로 만난 여인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의 그 슬픔과 허망함이, 간결한 필치로 투명, 담백하게 표현되어 있다.
우리 나라 정원의 정자같은 곳이랄까, '초당 (草堂)'이란 제목의 단편에서는 주인공 남자가 어느 날 그곳에서 목격한 한 장면때문에 달라진 그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연히 목격한 비행기 사고 현장에서 주워든 그 누군가의 바이올린이 주인공으로 하여금 잊혀진 줄 알았던 예전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미 다 끝났다고, 다시 오지 않을 사람, 또는 사건이라고 생각되었던 그것들을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불현듯 다시 불러들이게 되는 것은 추억의 힘인가.
로제 그르니에 스타일을 조금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다음의 '몽마르뜨 북쪽에' 까지 읽고 난 후였다. 추억과 현실, 그리고 과거의 한 장면과 현재의 상황은 얼마나 다를 수 있는가를 보여준, 역시 수포로 돌아간 어떤 일에 대한 이야기였다.
'암소같이 고약한 사랑'에서는 오랫동안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관찰만이 유일하게 가능했던 외로운 사랑의 이야기, '오스카의 딸' 역시 삶의 기쁨이나 환희가 아닌, 실망, 환멸, 포기, 우수를 느끼게 해주는 이야기이다. 눈물 몇방울 흘릴 가치는 되지 않느냐는 여자의 마지막 말 속에, 사랑은 참 어이없고 비논리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어쩔 수 없었다.

그녀에게 이건 마치 무슨 지진이 일어나서 섬 전체가 물속에 가라앉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135쪽)

나이 사십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마음이 끌리는 남자를 만났는데 그가 이미 결혼한 남자였다면? '난처한 일'이라는 짧은 이야기 속의 여자 주인공의 느낌을 표현한 구절이다. 한때 누구나가 느껴보았을 순간적인 감정에 대한 표현에 공감이 되어 옮겨 보았다. 그 남자의 결혼 생활을 유지시키면서 그와 계속 가깝게 지내기 위해 주인공 여자가 택한 방법과 그 결말이 마치 오 헨리의 단편을 읽는 느낌을 주기도 하는, 반전으로 인한 재미와 허무함을 동시에 주는 글이었다.
'어느 날 피아프와 콕토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피아프도 콕토도 아니었고 주인공의 동료여자 클로드에 관한 것이었으리라. 한때 대단했던 기자로서 명성을 날리던 끌로드는 술과 동성애에 탐닉하며 기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고,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가리는 가면으로서 보이는 거만한 태도를 주인공 남자는 알아본다. 그르니에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상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즉, 한때 누리던 명성, 미모, 부,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 말이다. 인간은 그들이 누리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무척 다른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누리고 있는 그것들은 영원 지속되는 것이 아니며 예측할 수 없는 변화를 늘 내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에 그렇게 집착할 일은 아님을 말하려는 것으로, 나는 그렇게 받아들인다.
'한시간 동안의 바느질'에서 바느질은 천을 꿰매는 바느질이 아니다. 갑작스런 사고로 병원에서 눈의 상처를 꿰매야 했던 주인공 노인에게 행해진 치료 행위로서의 바느질이다. 사사로운 하나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 소재를, 어떠한 미사여구 대신 상황 묘사와 주인공의 심리 묘사에 집중하는 작가는 아마도 장황하고 화려한 문학적 표현 사용을 좋아하는 타입은 아닌 듯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작가를 알아가는 재미는 글을 읽어가는 재미에 못지 않다.
이 책에서 내가 제일 공감이 되고 마음에 들었던 글은 마지막에 실린 '비밀'이라는 단편이다. 선택된 말없음에 대한 은근한 찬양이라고나 할까. 비밀이란 단지 감추고자 하는 부끄러운 그 무엇만이 아니라, 가장 개인적이고 귀중한 것을 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주인공에게서 작가 그르니에의 생각을 읽는다. 적대적인 세상과 마주하여 침묵을 지키는 태도를 고수하는데서 느끼는 음울한 희열과도 같은 쾌감이라는 주인공의 생각에 동의를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말없이 태어나, 말없이 살다가 말없이 죽어서 그보다 더 말없이 땅속에 묻혔다. (194쪽)

이런 묘비명을 남기고 싶은가 당신? 자신의 침묵에 대한 동의와 공감을 얻기 위해 주인공은 말의 향연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각종 문학 서적을 뒤지듯 읽는다. 그가 거기서 건져 올린 문장들을 옮겨와 본다.

우리는 계절이 지난 뒤에도 살아남듯이 우리의 감정들을 넘어서 살아남는다. -발레리 라르보-

그 시절에는 실패한다는 것은 내게 유일한 덕목처럼 보였다. -조지 오웰-

자조에도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모든 것에 대비할 수 없을 지경이다. -조셉 콘라드- 

어떤 사람들에게는 무해하다는 사실 자체가 벌써 해를 끼친다. -멜빌-

과연 그가 자신의 유언장에 남기고 싶언던 말은 무엇일까. 바로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행복이 일종의 사기라고 선언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두고 그는 또 고민한다. 그건 그토록 행복을 열망하는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하여.

다 읽은 후 책 뒤의 역자 해설까지 한줄 한줄 눈에 힘주어 읽는다. 알려져있다시피 번역자 김 화영은 까뮈에 대한 연구로 공인받은 분. 까뮈와 친분이 두터웠던 로제 그르니에를 알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여러 문호 중에서 특히 체호프를 좋아하여 그의 것이면 뭐든지, 그의 결점마저도 좋아한다고 했다는 로제 그르니에, 그리고 체호프를 한번 따라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닮아가기 마련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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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3 1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3 16: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3 2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0-01-24 05:26   좋아요 0 | URL
소라게가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일찍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래도 편안히 잘 자고 일어났어요.
매일 아침이 새로운 시작이라던데 오늘 할 일들을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비로그인 2010-01-24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일까요? 말씀해주신 책 내용과는 조금 동떨어져있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은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영화에 닿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적어 주신 글의 느낌과 영화감독이 전해주는 화면의 느낌이 닮아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hnine 2010-01-24 05:23   좋아요 0 | URL
제가 본 영화는 쥴리엣 비노쉬가 나온 세가지 색 중 '블루'가 기억나는데 좋은 영화였지요, 음악 영화라고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지만요.
바람결님에게 음악과 글과 영상은 별개가 아니시잖아요 ^^
 
물구나무 과학 문지푸른책 밝은눈 1
전용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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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전공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하게 되는 실험실이나 연구실로부터 걸어 나와 이렇게 과학을 일반인들에게 설명하고, 다른 학문과의 연관성을 파헤치고, 과학의 의미를 전달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많지는 않다. 그래서 더 주목해서 그들의 일을 보게 된다.
저자 전성훈 역시 천문학을 전공하고,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더 공부했으며 과학잡지 기자로 일하면서 '과학 문화'에 대한 연구와 저술 활동을 해온 분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과학은 짐작을 넘어서는 학문이고 그러기 위한 노력이다. 자연과 그 자연의 현상들을 대상으로 하며 여기에는 그 자연속에 살아가는 생물들도 포함되니 우리 인간도 물론 과학의 대상이라고 할수 있다, 몇가지 한계점을 제외한다면.
이 책은 과학 월간지에 2년 동안 연재되었던 내용에 그 밖의 다른 곳에 발표했던 글 몇가지를 묶어서 나온 것인데 저자는 머릿말에서 여러 대학 교수님들의 자문을 받았으며, '한국 문화 상징 사전',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 등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책을 읽어보면 우리 나라에서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말들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보인 글이 많다. 엄마손이 약손인 것은 사랑을 확인하는 행위라는 것 외에도 배를 따뜻하게 하고 장운동을 자극해서 배탈을 낫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 송편을 찔때 솔잎을 넣고 찌는 이유는 솔잎의 향에는 세균을 죽이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며, 아이를 가졌을 때 입덧을 하면 뱃속의 아기가 잘못될 확률이 적다는 말의 근거로서 입덧은 뱃속의 아이에게 아무 것이나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한 보호 차원의 전략이라는 것, 가루눈이 오면 춥고 함박눈이 오면 포근하다는 우리 옛말은 싸락눈과 함박눈이 만들어지는 방법 상의 차이를 볼때, 차가운 공기에서 만들어져 결정이 커지지 못한 경우에 싸락눈이 만들어지고, 상대적으로 따뜻한 공기에서 형성된 눈은 결정들이 단단하지 않아서 함박눈이 만들어져서 눈이 잘 뭉쳐져 눈싸움이나 눈사람 만들기에 적격이다. 시험 전날 먹는 찹쌀떡의 효과는 심리적인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과학적으로 밝혀진 효과는 없다는 얘기를 하면서 불안감에 대한 주술 효과에 대해 설명하면서 인용한 프레이저의 저서 '황금가지'의 내용은 적절하였다. 만약 아들, 딸 가려낳게 허용이 된다면 아들보다는 딸이 많아질 이유, 이것은 나도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라 흥미로왔다. 아들, 딸을 구별하여 낳으려면 생식세포중 X염색체를 가진 정자와 Y염색체를 가진 정자를 분리할 수 있어야 하는데, 원심 분리를 하면 무게가 덜 나가는 Y염색체 포함 정자세포가 모이는 윗층에는 각종 세균이나 기형 정자까지 혼합되어 있어 쓸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란다. 이것은 지금까지 시행된 경우의 데이터를 봐도 증명이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예로부터 행해오던 '대추나무 시집보내기'의 원리도 재미있다. 식물은 잎과 가지에 탄수화물의 비율이 높아지면 꽃눈을 많이 만들어낸다. 따라서 잎과 가지에 형성된 탄수화물이 뿌리 쪽으로 이동해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대추나무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두면 (대추나무 시집보내기라고 불리는 것) 돌이 관다발을 파고 들어가 양분의 이동을 방해하기 때문에 잎과 가지에 탄수화물을 많이 보존할 수 있고 그러면 과실을 늘리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란다. 관상은 어디까지가 과학인가 라는 글에서는 통계적인 연관성과 과학적 인과성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구분해주어 혼동하기 쉬운 둘의 차이를 확실하게 해주었다. 동면중인 동물을 일부러 깨워 훼방을 놓게 되면 다시 동면에 들어가게 되더라도 다시 깨어나지 못하고 죽어버리게 되는 이유는, 동면에 들어가고 깨어나고 하는 과정에 광장한 에너지 소모가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것 처럼 남자 없이 임신하는 무염수태가 실제로 일어난다면 그렇게 태어난 아기는 모두 여자 아이여야 한다는 것도 충분한 근거로 설명되어 재미있었다.
지금이야 바닷물의 조석 현상이 중력과 달의 위상때문에 일어나는 것임이 증명되어 알려져 있지만 19세기 다산 정약용은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오로지 관찰만으로 조석 현상의 본질을 알아냈다고 한다. 심오한 과학 이론 없이도 본질을 정확히 꿰뚫을 수 있는 것이 관찰의 힘이고, 자연은 관찰과 경험의 눈으로 볼때 그 위대한 힘을 인간에게 더해준다는 저자의 그 말에 공감하여 꼭 기억해놓고 싶다. 과학에 대한 책을 읽다가 이처럼 저자의 어떤 통찰이 담긴 구절을 만날때의 감동은 특별하다.
읽는 사람에게 재미를 느끼게 해주기 위해 다소 과장과 요란스런 설명이 곁들여진 과학 서적이 많이 나오고 있고, 또 굳이 그것에 반대하는 입장도 아니다. 일단 재미가 있어야 읽게 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지나치지만 않으면 된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편류를 타지 않은 듯, 과장됨 없이, 무난하고 평이하게 쓰여져 있다. 딱딱하지 않은 말로, 쉽게 쓰여져 있어 이해가 쉬어 술술 읽혔으면 그 본분은 다하지 않았나 싶은, 대견하고 기특한 책이다. 

 (좋은 책 읽게 해주신 책세상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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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미 2010-01-21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도 주문해야지~~
나도 다린 엄마한테 ㄱㅅ 땡큐 ~~

hnine 2010-01-21 20:53   좋아요 0 | URL
나온지는 꽤 된 책이야. 경은이랑 함께 읽어도 좋겠다~

비로그인 2010-01-21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오한 과학 이론 없이도 본질을 정확히 꿰뚫을 수 있는 것이 관찰의 힘이고, 자연은 관찰과 경험의 눈으로 볼때 그 위대한 힘을 인간에게 더해준다. 그 내용이 제 머릿속에서도 잠시 머뭅니다.

뭔가를 밝혀내거나 찾으려 하는 사람들에게는 관찰하는 눈과 끈기가 있어야 하나봅니다..

hnine 2010-01-21 20:54   좋아요 0 | URL
그러려면 한곳에의 집중력도 필요하겠고요. 산만한 이 정신으로 뭘 할수 있으랴, 한숨이 푹... ^^

꿈꾸는섬 2010-01-23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쉽게 설명해주는 과학책은 재미도 있지만 세상을 보는 눈도 트이게 해주는 것 같아요. 참 좋으네요.^^

hnine 2010-01-23 12:37   좋아요 0 | URL
세상을 보는 눈을 트이게 해준다는 말씀 맞아요. 과학에 대한 설명만 있으면 그건 교과서와 다를 바 없겠지요. 교과서가 별로 재미없는 이유가 그런 것 아니겠어요? ^^

bookJourney 2010-01-23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의 리뷰는 언제 읽어도 명쾌해서 좋아요~~~ ^^

hnine 2010-01-24 05:33   좋아요 0 | URL
책세상님, 이 책 아주 재미있게 읽었어요.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

같은하늘 2010-01-26 0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했던 것들을 쉽게 밝혀주는 책인데요~~

hnine 2010-01-26 04:50   좋아요 0 | URL
평소 저는 궁금하게 생각지도 않았던 것들이 더 많았어요. 그냥 그러려니 하던 것들에 대해 궁금증을 갖는 것, 거기가 출발점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창비세계문학세트>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필경사 바틀비 - 미국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허먼 멜빌 외 지음, 한기욱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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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평소 문학선집에 탐닉해온 사람도 아니다. 최근 들어 몇 출판사에서 기획한 세계문학선집이 선을 보이고 있고 그 중 창비에서 펴낸 열권 중 미국 편을 읽어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고 기회였다. 미국 문학 하면 몇 작가의 이름이 떠오르긴 하지만 이렇게 한권으로 몰아서 읽어서 느껴지는 것이 확실히 있었다. 기획자에 의해 어떻게 선택이 되었느냐의 영향도 물론 있겠지만 그 나라 작가들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읽어지는 경향이라는 것이 나 같은 문외한에게도 느껴진다는 것은 역시 문학도 예술도, 시대적인 배경과 상황을 벗어나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모두 열 한 작가의 열 한 작품이 실려 있는데 너새니얼 호손이나 에드거 앨런 포우, 마크 트웨인, F. 스콧 피츠제럴드 처럼 이름이 친숙한 작가도 있었지만 샬롯 퍼킨스 길먼이라든지 스티븐 크레인 같은 사람은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된 이름이었다.
읽으면서 나름대로 '+' 갯수로서 각 작품의 등급을 매겨 보기도 했다.
우리에게 '주홍글씨'로 잘 알려져 있는 너새니얼 호손의 작품으로 이 책에 실린 것은 '젊은 굿맨 브라운'이라는 단편이다. 그 시대 종교적인 배경 지식이 있어야 제대로 이해가 될 작품인데 상징적, 우화적 표현 기법때문에 더 이해가 쉽지 않을 수 있겠다. 비슷하면서 다른 두 세계의 내면적 갈등, 표리 부동 등을 그린 내용. 글 중에 '짙붉은'이란 단어를 보았다. 우리 말에 이런 단어가 있었던가, 아니면 역자의 고민 끝에 탄생한 말일까. (++++)
에드거 앨런 포우'검은 고양이'는 많이 알려진 작품인데, 이것 역시 인간의 한 모습이라고 인정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섬뜩함 이면에 감춰진 인간의 본성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하였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
이 책의 타이틀이 되기도 한 허먼 멜빌'필경사 바틀비'에서 작가는 나 자신의 양심, 또다른 나, 무의식적인 자아에 대한 것을 필경사 바틀비라는 존재를 통해 묘사했다고 말하면 어떨까. 떼어내버리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이유없는 연민의 감정이 드는 알 수 없는 근원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했다. 바틀비의 최후는 결국 자아와 타협하지 못하고, 공존시키지도 못하면서 내치지도 못하는 약한 인간의 한계를 그렸다고 생각한다. (+++++)
그리고 이 작품, '캘레바래스 군의 명물, 뜀뛰는 개구리'. 이것이 제목이다. 그 유명한 마크 트웨인의 작품 중에서 짧디 짧은 이 글이 선택된 의도가 궁금했다. 짧은 글 중에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의 위트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의 안목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가 전부였으니. (++)
다음 작품은 미국 문화와 유럽 문화를 비교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다는 작가 헨리 제임스'진품'인데, 헨리 제임스는 미국 태생이지만 이 소설의 배경은 영국이고 발표한 곳도 영국의 문예주간지였다. 자신들이 진짜 진품이라 주장하여 귀족 모델로 써줄 것을 부탁하기 위해 화가의 작업실을 찾아온, 멋진 외모와 옷차림의 모나크 부부가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귀족으로서 손색없는 그들의 외모와 차림새에도 불구하고 화가는 오히려 하급 출신의 모델을 귀족처럼 꾸며 그린 그림으로 더 좋은 평을 받게 되는데, 진품과 진품처럼 보인다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런 생각꺼리를 주는 내용이었다. 끝까지 귀족 모델 일에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모나크 부부의 모습에서 보여지는 쓸쓸함의 정체는 또 무엇인지, 사람 사는 세상에 과연 진품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지 생각하며, 이 세상에 진품 아닌 사람은 없다고 결론을 지어보았다. 자기 모습대로 살아가기만 한다면 말이다. (++++)
이 책에 수록된 유일한 여성 작가 샬롯 퍼킨스 길먼 '누런 벽지'를 읽기 전에 우선 어린 시절에서부터 생의 마감까지가결코 순탄치 않아보이는 저자의 이력에 눈길이 머물렀다. 여자는, 아니 인간은 어떻게 미쳐가는가. 그 집에 이사올 때부터 맘에 안들던 그 방의 누런 벽지. 다른 방을 사용하고 싶다는 것을 포함해서 그 여자의 생각이나 의견은 가족 그 누구에게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여자는 마침내 그 벽지 속에서 어떤 여인의 형상을 발견하고 나중에는 결국 행동과 거주의 제약을 받고 있는 자신과 그 여인을 동일시 시키는, 착란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해설에서 언급된 것처럼 여성의 사회적 활동 영역에 대한 가부장적 제약의 의미까지는 아니더라도, 자기 실현에 제약으로 작용하는 사회적, 심리적 요인과 상황들을 그려보게 한다. (++++)
찰스 W. 체스넛 '그랜디썬의 위장'의 원제는 'The Passing of Grandison'이다. Grandison이 글 중의 흑인 노예 이름인 것은 금방 알았는데, passing과 우리말 '위장' 사이에 금방 연관이 안되어 의아함을 안고 읽기 시작한 작품이다. 내용을 다 읽고 나니 좀 이해가 되는 듯 하지만 '통과, 간과, 눈감아주기'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passing을 '위장'이라는 뜻으로 까지 의미를 확장시켜 받아들이는 일이 내게는 영 어색하다. 번역자는 많이 고심하여 붙인 제목일텐데 말이다. 흑인 정체성을 지닌 미국인으로 자란 저자 찰스 체스넛은 흑인을 중심으로 한 인종 문제, 흑인 지위 향상과 관련된 소설들을 많이 써냈다고 한다. 이 작품 역시 백인 노예주의 얄팍한 이기심과 위선, 그리고 거기에 이용당하는 그랜디썬이라는 흑인 노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예상치 못하던 반전으로 마무리 되는 것이 명쾌하고 색다른 울림을 준다. 편견과 선입관에 사로 잡혀 있던 것은 글 중의 백인 노예주 뿐 아니라 결말 부분에 놀란 반응을 보이는 독자들 당신들도 마찬가지라는 듯. (+++)
스티븐 크레인 자신이 특파원으로 일하던 시절의 체험을 바탕으로 썼다는 작품 '소형 보트'는, 타고 있던 증기선 코모도어호가 침몰하자 거기서 탈출해나와 겨우 욕조만한 소형 보트에 의존하여 표류하는 네 사람의 이야기이다. 생명을 보장받을 수 없는 급박하고 불안한 상황을 겪어나가는 과정을, 사람들의 구체적인 심리묘사보다는 상황의 사실적인 묘사 방식을 택하여 그려나간다. 결말 부분의, 마지막에 살아서 구조되지 못한 한 사람은 누구일까 하는 것은 읽는 사람의 추측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
셔우드 앤더슨은 Death in the woods로 귀에 익은 작가이다. '나'가 화자가 되어, 제목처럼 '달걀'이라는 특이한 소재를 통해, 양계업, 식당업을 거치면서 성공을 꿈꾸는 자기 가족의 이야기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미국적 정신이 아버지를 사로잡은 것이다. 아버지 역시 야망을 갖게 된 것이다. 별로 할 일이 없는 긴긴 밤이면 아버지는 생각할 시간이 있었다. 그게 아버지를 파멸시킨 원인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과거에 그리 쾌활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으니 앞으로는 쾌활한 인생관을 갖기로 결심했다. (262쪽)
 
   

미국적 정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이 책의 다른 작품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이 작품에서 그런 주제가 잘 드러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인용해보았다. 야망, 그리고 쾌활한 인생관이라. 프래그머티즘이라는 철학의 한 분야를 이루기도 한 이런 정신들은 지금도 여전하지 않은가.
글에서 출세하고자 하는 야망, 즉 그 미국적 정신이 아버지를 다른 사람으로 바뀌게 하고, 부자연스런 그 행동이 달걀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어떻게 나타나고, 어떤 결말을 가져오는지를, 어떻게 보면 냉소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저자는 그 당시 그 미국적인 꿈이라는 것을 어떻게 보고 있던 것인지 짐작케 한다. 그것이 미국이란 나라의 건립과 위상에 큰 기여를 했음과 동시에 문제점을 안고 있기도 했었음을, 그래서 각 개인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는지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
F. 스콧 페츠제럴드는 워낙 '위대한 개츠비'로 유명한 작가여서 그런지 여기 실린 작품 '겨울꿈' 역시 어딘가 '위대한 개츠비'를 연상시키는 플롯이다. 신분의 차이가 나는 여자를 소년 시절부터 줄곧 갈망해온 주인공 남자는 결국 노력에 의해 사회적인 성공을 이루지만 그녀에 대한 그의 오랜 꿈은 이루어지질 못하고, 물질적인 성공이 그것을 대신할 수 없음을, 자신이 정말 가슴 속에 간직해오던 꿈은 그것이 아니었음을 통탄하며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가을에 오히려 어딘가 찬란한 구석이 있듯이 봄에는 뭔가 음울한 구석이 있다고 표현한 (274쪽) 그에게 겨울꿈은 성공에 대한 꿈이며, 그 꿈 속에는 한 여인을 자기 여자로 만들고 싶은, 자기방식의 사랑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자기와는 너무나 다른 성격과 사고 방식을 가진 그녀를 감당할 용기와 자신이 없어 결국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그가 꿈을 영원히 잃어버렸다고 깨달은 것은, 그녀를 포기한 그 순간이 아니라 몇년 후, 별로 행복하지 않다는 그녀의 소식을 들었을 때이니 그동안 그녀는 그의 마음 속에서 여전히 꿈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녀를 정말 사랑했을까, 아니면 소유하고 싶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위대한 개츠비'에서와 비슷하다. (+++)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윌리엄 포크너 '에밀리에게 장미를'이란 작품. 이야기 속에서 에밀리는 사랑스런 이름만큼 행복한 일생을 살지 못한 여인이다. 한때 마을의 최상류층이었던 그녀의 집안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사람의 발길이 끊긴, 폐쇄적인 공간이 되어가고, 그 공간만큼이나 폐쇄적인 삶을 살아가는 그녀가 거기에 있다. 섬뜩한 결말이 섬뜩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울하기까지 한 이 이야기를 포크너는 어떻게 소재로 택하여 쓰게 되었을까. 한때의 번성하던 집안, 또는 개인의 운명이 어떻게 바뀌어질 수 있는지, 단순히 한 여자의 불행한 일생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기 보다는, 그것을 사회적 배경과 연관시켜 보여주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 

요란스럽지 않으면서 무게감 있고, 그렇지만 부담가는 두께나 부피가 아니어 좋았고,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손으로 몇번 쓰다듬어 보게 하던 매끌한 종이질도 마음에 들었다.
다 읽었다고 하니 옆에서 아이가 "어떤 책이요? 그 모자 그려있는 책이요?" 하고 묻게한 표지 그림, 혹은 사진도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으로 읽어본 '책을 엮으며', 그리고 뒤의 '번역자 해설' 속에 전해지는 책에 대한 정성은 읽으면서도 충분히 느꼈던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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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1-20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들 너무나 유명한 작가들이라서 뭐라 덧붙일 필요도 없겠지만, <에밀리에게 장미를>은 정말 굉장하지요? 기겁할만큼...

hnine 2010-01-20 11:32   좋아요 0 | URL
이 세계문학전집중 미국 편만 유일하게 전부 국내에서 발표되었던 작품이라고 하네요. 브론테님은 이미 다 읽으셨나봐요. 저는 귀로만 익었을뿐 이번에 비로소 처음 읽은 작품이 대부분이거든요 ^^ 이번에 아주 좋은 기회였어요.

이네파벨 2010-01-20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책 소개 너무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 확 와서 꽂히는 책이네요.

너대니엘 호손의 "Young Goodman Brown"...

어린 시절 집에 있던 문학전집의 귀퉁이에서 우연히 발견해 읽고서..그 이후로....호손을 저의 가장 좋아하는(깊은 인상을 준) 작가의 전당이 고이 모셔놓게 되었죠. 대학생이 되어서인가...이 단편을 다시 보고 싶어서 호손 단편집 원서로 사서 읽었는데...휴우...영어가 무척 어렵더군요. 고어투에..낯선 단어들...(아마 번역하는 분도 고생 꽤 하셨을 거라 짐작되어요.)

이 책, 꼭 사서 읽어보고 싶네요. 허먼 멜빌, 윌리엄 포크너도 좋아하는 작가....

hnine 2010-01-20 19:46   좋아요 0 | URL
young goodman brown은 번역문으로 읽는 것도 제겐 쉽지 않았어요. 상징과 비유를 생각하며 읽느라...
어린 시절이라면 얼마나 어린 시절에 그 깊은 감동으로 호손을 만나셨던 것일까요.
허먼 멜빌과 윌리엄 포크너도 좋아하는 작가시라니, 이 책 꼭 읽으시겠네요.

비로그인 2010-01-20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밀리를 위한 장미(에밀리에게 장미를' 이라고 번역되었군요) 전 너무나도 슬펐던 느낌이. 그 숨결까지도 박제하고 싶었을 그 여인이 너무 안되어서. 너무 깜깜해 보여서 슬펐어요.



벌써 다 읽으셨군요. 전 폴란드편 절반 정도 읽는 중인데, 아, 정말 이렇게 슬픈 단편집 모음은 처음이에요. 궁상과 처량이 아닌, 슬픔의 기개가 이렇게도 펼쳐지는구나, 싶어요. 놓쳤으면 일평생 이런 느낌 알지도 못했겠지, 싶을 정도로 멋집니다.

hnine 2010-01-20 19:50   좋아요 0 | URL
'에밀리를 위한 장미'라는 미화된 제목 속의 이야기는 Jude님 말씀대로, 그리고 위의 브론테님 말씀대로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지요.
이 책 때문에 전집 읽는 맛을 알아가려고 하는데, Jude님 덕분에 폴란드 편에 급관심입니다 ^^ Jude님 리뷰 기다리고 있을께요. 또 얼마나 아름다운 리뷰를 올려주시려나요...

비로그인 2010-01-20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passing과 관련된 책을 읽은 적이 있어요. Passing이란 단어가 인종적인 텍스트에선 인종을 속이고 다른 인종인양 행세를 하는 사람을 말하더군요. 주로 20세기초 이전 미국에서 차별을 받지않기 위해 백인이라고 거짓말을 하던 흑인 피가 약간 섞인 혼혈을 가리키지요. 체스넛은 passing을 소재로 삼은 대표적인 작가 중 한사람이고, 요즘 출간된 필립 로스의 human stain도 비슷한 내용이더구만요..

hnine 2010-01-20 21:48   좋아요 0 | URL
아, 그래서 '위장'이라고 번역될 수 있었던거군요.
manci님의 설명을 읽고 이해가 안되던 한 자락을 걷어내고 나니, 이 작품에 점수를 더 주어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요.
감사합니다.

꿈꾸는섬 2010-01-20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메인에 뜨는 요책 전집이 궁금했는데 나인님의 리뷰를 보니 역시 갖고 싶단 생각이 크네요.^^

hnine 2010-01-21 03:02   좋아요 0 | URL
전집 다 가지면 참 좋겠지요.
전 서평단 도서로 받아서 읽었어요.
 
아, 호동왕자 (반양장) 책읽는 가족 12
강숙인 글, 양상용 그림 / 푸른책들 / 2007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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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많이 들어서 알고 있으나 정작 생각해보니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결말이 지어졌는지는 기억에 없다. 역사동화를 주로 많이 써오고 있는 동화작가 강숙인님의 '아, 호동왕자'를 읽어가다보니 쉽게 쓰여진 이유도 있고 물흐르는 듯한 이야기 전개, 그리고 장면이 눈 앞에 보이는 듯한 묘사 때문에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TV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호동왕자는 고구려 3대왕의 아들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 즉 고구려, 백제, 신라 중 가장 먼저 세워진 나라가 고구려이니 아직 신라, 백제는 건국되기도 전의 이야기이다. 실제 있었던 일이라기 보다는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로 믿고 있는 쪽이 지배적인데 '삼국사기'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다른 일 때문에 삼국사기를 들추어 보던 중 여기에 실린 호동왕자에 대한 짤막한 글을 본 저자가 순간적으로 이 이야기를 나만의 방식으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1999년 겨울, 마침내 호동왕자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웃한 부여에 비해 신생국이었던 고구려는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낙랑국을 넘보게 되고 그 방법으로 왕자인 호동을 낙랑국의 공주 '예희 (여기서는 예희로 나오는데 다른 책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나오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 확실한 이름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와 혼인을 하게 한 후 낙랑국의 자명고를 찢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 명령대로 할 경우 예희의 생명은 온전치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버지인 고구려왕의 분부대로 해야했던 호동왕자는 그야말로 사랑보다 나라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을 한 것이며, 호동의 뜻을 따를 경우 자기 나라인 낙랑국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알면서도 자명고를 찢고만 낙랑의 공주는 그 반대의 경우라서 확실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그 당시 역사적 상황, 호동의 야망, 왕의 첫째 왕비를 둘러 싼 주위 세력간의 알력등, 저자에 따라 여러 방면에 촛점을 맞춰 펼쳐나갈 수 있을 이야기를 저자는 호동과 예희 사이의 비극적인 사랑, 그리고 마루와 호동, 마루와 예희 사이의 드러나지 않은 감정 전선에 주요 비중을 두어, 사랑이란, 꿈이란, 현실이란 무엇인가, 이들 앞에서 사람들은 어떤 결정과 판단을 하게 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책을 읽다가 붓으로 그려진 삽화가 나오는 페이지를 만나면 마치 어릴 때 보던 역사 만화가 떠오르기도 했고, 제목의 '호동왕자' 앞에 '아'라는 감탄사를 넣어 '아, 호동왕자'라고 붙임으로써 책을 처음 대할 때의 느낌이 많이 달라지는 효과가 있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이상이면 아이도, 어른도 가볍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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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Journey 2010-01-13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찜하고, 이 책도 보관함으로 슝~. 연초부터 보관함이 터질 것 같아요. ^^;

hnine 2010-01-13 02:24   좋아요 0 | URL
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어요. 워낙 술술 읽히는 책이라 시간있으면 도서관에 앉아서 다 읽고 올수도 있겠더라고요.

순오기 2010-01-15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정판으로 다시 올렸군요.^^

hnine 2010-01-15 04:39   좋아요 0 | URL
예, 그래서 순오기님이 달아주신 댓글을 저만 알게 되었습니다. 허락해주셔서 그렇게 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