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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10년도 훌쩍 넘은 일이다. 집을 떠나는 내 짐 가방 속에 나는 허용된 짐의 무게 때문에 몇 권 안되는 책만 넣을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엄선되어 나와 함께 먼길을 동행 해준 책 중의 하나가 최영미의 산문집 '시대의 우울'이었다. 이후로 나는 우리 말과 글이 고플 때마다 그 책을 읽고 또 읽고, 나중에는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다가 잠이 들기도 했는데, 그렇게 여러 번 읽으면서도 물리지 않았던 것이 참 신기하다. 그 때 나의 정서 코드와 잘 맞았던 이유도 있었겠고, 한번 책을 손에 잡게 되면 쉽게 놓게 되지 않게 하는 그녀만의 어떤 매력이 분명히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첫정이 무섭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녀를 일약 스타처럼 만들어버린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서 부터 시작해서, 이후에 나온 시집 '꿈의 페달을 밟고', '돼지들에게', 가장 최근의 '도착하지 않은 삶', 그리고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화가의 우연한 시선'과 같은 산문집, 그녀가 무척 공들여 쓴 듯 하나 내 기대만큼은 아니었던 자전적 소설 '흉터와 무늬'에 이르기 까지 모두 나의 애장 목록 들이니.
작년에 이 산문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 언제 읽게 되느냐가 문제이지 결국엔 이것도 읽게 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별로 서두름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행 에세이로 소개되는 이 책의 차례를 훑어 보니 대부분 그녀가 이전에 가본 적이 있는 곳들이었다. 그렇지, 언제는 그녀가 여행하면서 기행문을 썼던가, 여행은, 그리고 그림은 하나의 말문을 트는 수단이었지. 자기 모순을 그토록 분명하게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입 밖에 낼 수 있는 강단, 그 차가운 서정이 매력적인, 천상 글쟁이인 그녀 덕분에 나는 Rothko를 알았고, Eves Klein을 알았고, Kollwitz를 알았다.
예술을 알면, 문학을 좋아하면 인생이 복잡해진다. 좋게 말해 인생이 풍요로워진다. 보통 사람들은 밖에 보이는 것만 보고 이렇다 저렇다 미추를 논하는데, 예술가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다른 각도에서 보는 사람들이거든. (120쪽)
이 책의 내용 대부분은 2006년, 그녀 나이 마흔 다섯에 했던 여행 기록이니, 지금의 내 나이이다. 갑자기 힘이 불끈, 혼자서 여행이 여전히 가능한 나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내가 길눈이 밝았다면 헤매지 않았다. 헤매지 않았으면 어느 화사한 봄밤에 친구도 만나지 못했고, 숨은 보물의 맛도 몰랐을 것이다. (28쪽)
꼭 여행지에서의 길눈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살면서, 길을 잃었다는 느낌, 한참 가던 길인데 느닷없이 이 길이 아니었다는 느낌, 그때의 막막함과 절망감, 난 이제 어떻게 하나 울어도 시원찮을 그런 경험을 말하는 것 아닐까.
2부의 예술가의 초상 편의 일부 글은 어딘가 눈에 익다 싶었는데, 작가 후기에 밝히기를 일부는 이전 산문집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에 실렸던 글이라고 한다.
박수근의 그림을 보며 그녀가 던진 물음,
팍팍한 현실을 견뎌내는 모진 목숨의 뿌리는 무엇인가 (183쪽)
의 답을 나 스스로 그녀의 또 다른 페이지에서 찾는다.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한송이 백합꽃잎의 미묘한 향기를 맡아보는걸로 충분하다고. 아니면 한마리 고양이와 주고 받는 따스한 눈길...어쩌면 거기에, 그 관조의 눈빛 속에 길이 있다고. (2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