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잦은 시절
로제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로제 그르니에, 그는 현대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문인 중의 한 사람이다. 1919년 생이면서 지금도 프랑스 최고의 명문 갈리마르사에 출근하여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집필활동을 계속 하고 있다는 그가 87세의 나이에 펴낸 소설집이 바로 이 책이다.
모두 10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늘 그러듯이 한편 한편 글을 읽어나가는 과정은 작가를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해서 두가지 재미가 있다.
맨 처음 실린 글이며 이 책의 제목이 되기도 한 '이별 잦은 시절'은, 상황의 지배를 받는 것이 사랑, 그래서 사랑은 결코 영원불변하지 않기 때문에 이별의 잦음 또한 의외의 사건은 아니라는 것을, 연락이 끊긴 연인을 그리움에 못이겨 불안정한 정세에도 불구하고 기차여행을 감내하며 찾아가는 주인공 남자를 통해 말하고 있다. 그렇게 찾아가서 가까스로 만난 여인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의 그 슬픔과 허망함이, 간결한 필치로 투명, 담백하게 표현되어 있다.
우리 나라 정원의 정자같은 곳이랄까, '초당 (草堂)'이란 제목의 단편에서는 주인공 남자가 어느 날 그곳에서 목격한 한 장면때문에 달라진 그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연히 목격한 비행기 사고 현장에서 주워든 그 누군가의 바이올린이 주인공으로 하여금 잊혀진 줄 알았던 예전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미 다 끝났다고, 다시 오지 않을 사람, 또는 사건이라고 생각되었던 그것들을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불현듯 다시 불러들이게 되는 것은 추억의 힘인가.
로제 그르니에 스타일을 조금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다음의 '몽마르뜨 북쪽에' 까지 읽고 난 후였다. 추억과 현실, 그리고 과거의 한 장면과 현재의 상황은 얼마나 다를 수 있는가를 보여준, 역시 수포로 돌아간 어떤 일에 대한 이야기였다.
'암소같이 고약한 사랑'에서는 오랫동안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관찰만이 유일하게 가능했던 외로운 사랑의 이야기, '오스카의 딸' 역시 삶의 기쁨이나 환희가 아닌, 실망, 환멸, 포기, 우수를 느끼게 해주는 이야기이다. 눈물 몇방울 흘릴 가치는 되지 않느냐는 여자의 마지막 말 속에, 사랑은 참 어이없고 비논리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어쩔 수 없었다.

그녀에게 이건 마치 무슨 지진이 일어나서 섬 전체가 물속에 가라앉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135쪽)

나이 사십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마음이 끌리는 남자를 만났는데 그가 이미 결혼한 남자였다면? '난처한 일'이라는 짧은 이야기 속의 여자 주인공의 느낌을 표현한 구절이다. 한때 누구나가 느껴보았을 순간적인 감정에 대한 표현에 공감이 되어 옮겨 보았다. 그 남자의 결혼 생활을 유지시키면서 그와 계속 가깝게 지내기 위해 주인공 여자가 택한 방법과 그 결말이 마치 오 헨리의 단편을 읽는 느낌을 주기도 하는, 반전으로 인한 재미와 허무함을 동시에 주는 글이었다.
'어느 날 피아프와 콕토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피아프도 콕토도 아니었고 주인공의 동료여자 클로드에 관한 것이었으리라. 한때 대단했던 기자로서 명성을 날리던 끌로드는 술과 동성애에 탐닉하며 기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고,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가리는 가면으로서 보이는 거만한 태도를 주인공 남자는 알아본다. 그르니에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상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즉, 한때 누리던 명성, 미모, 부,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 말이다. 인간은 그들이 누리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무척 다른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누리고 있는 그것들은 영원 지속되는 것이 아니며 예측할 수 없는 변화를 늘 내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에 그렇게 집착할 일은 아님을 말하려는 것으로, 나는 그렇게 받아들인다.
'한시간 동안의 바느질'에서 바느질은 천을 꿰매는 바느질이 아니다. 갑작스런 사고로 병원에서 눈의 상처를 꿰매야 했던 주인공 노인에게 행해진 치료 행위로서의 바느질이다. 사사로운 하나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 소재를, 어떠한 미사여구 대신 상황 묘사와 주인공의 심리 묘사에 집중하는 작가는 아마도 장황하고 화려한 문학적 표현 사용을 좋아하는 타입은 아닌 듯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작가를 알아가는 재미는 글을 읽어가는 재미에 못지 않다.
이 책에서 내가 제일 공감이 되고 마음에 들었던 글은 마지막에 실린 '비밀'이라는 단편이다. 선택된 말없음에 대한 은근한 찬양이라고나 할까. 비밀이란 단지 감추고자 하는 부끄러운 그 무엇만이 아니라, 가장 개인적이고 귀중한 것을 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주인공에게서 작가 그르니에의 생각을 읽는다. 적대적인 세상과 마주하여 침묵을 지키는 태도를 고수하는데서 느끼는 음울한 희열과도 같은 쾌감이라는 주인공의 생각에 동의를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말없이 태어나, 말없이 살다가 말없이 죽어서 그보다 더 말없이 땅속에 묻혔다. (194쪽)

이런 묘비명을 남기고 싶은가 당신? 자신의 침묵에 대한 동의와 공감을 얻기 위해 주인공은 말의 향연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각종 문학 서적을 뒤지듯 읽는다. 그가 거기서 건져 올린 문장들을 옮겨와 본다.

우리는 계절이 지난 뒤에도 살아남듯이 우리의 감정들을 넘어서 살아남는다. -발레리 라르보-

그 시절에는 실패한다는 것은 내게 유일한 덕목처럼 보였다. -조지 오웰-

자조에도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모든 것에 대비할 수 없을 지경이다. -조셉 콘라드- 

어떤 사람들에게는 무해하다는 사실 자체가 벌써 해를 끼친다. -멜빌-

과연 그가 자신의 유언장에 남기고 싶언던 말은 무엇일까. 바로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행복이 일종의 사기라고 선언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두고 그는 또 고민한다. 그건 그토록 행복을 열망하는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하여.

다 읽은 후 책 뒤의 역자 해설까지 한줄 한줄 눈에 힘주어 읽는다. 알려져있다시피 번역자 김 화영은 까뮈에 대한 연구로 공인받은 분. 까뮈와 친분이 두터웠던 로제 그르니에를 알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여러 문호 중에서 특히 체호프를 좋아하여 그의 것이면 뭐든지, 그의 결점마저도 좋아한다고 했다는 로제 그르니에, 그리고 체호프를 한번 따라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닮아가기 마련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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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3 1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3 16: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3 2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0-01-24 05:26   좋아요 0 | URL
소라게가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일찍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래도 편안히 잘 자고 일어났어요.
매일 아침이 새로운 시작이라던데 오늘 할 일들을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비로그인 2010-01-24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일까요? 말씀해주신 책 내용과는 조금 동떨어져있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은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영화에 닿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적어 주신 글의 느낌과 영화감독이 전해주는 화면의 느낌이 닮아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hnine 2010-01-24 05:23   좋아요 0 | URL
제가 본 영화는 쥴리엣 비노쉬가 나온 세가지 색 중 '블루'가 기억나는데 좋은 영화였지요, 음악 영화라고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지만요.
바람결님에게 음악과 글과 영상은 별개가 아니시잖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