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험기간이어서 시간이 좀 여유있어 오랜만에 신촌에 있는 '숨어있는책방'에 다녀왔다. 부서별 모임을 하며 낮술 한잔 하고(어제 그러니깐 수요일(12.8)에 좀 마셔서 딱 소주 2잔 정도만 마셨다) 전철 타고 신촌에 갔다. 이 책방은 언제 가도 참 마음이 편해지는 공간이다. 책을 한 두 권 고르고 있으니 큰 DSLR 카메라를 든 미모(?)의 여성이 헌책방 이곳저곳을 찍어 대더라. 주인장에게 뭐냐고 물어 보려다 말았다. 근데 내내 궁금하다. 다음번에 가면 물어봐야겠다. 

   

 

     

첫번째 책은 소흥렬 포항공과대학교 인문사회학부 철학교수의 <윤리와 사고>이다. 이 책을 출간할 당시에는 이대 철학과 교수였는데, 책을 검색하다 보니 <윤리와 사고>개정 증보판으로 <논리와 사고>가 나왔으며, 적이 2006년 부터 포항공대라고 나온다. 머리말을 보면 이렇다. 

"윤리학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먼저 개인의 도덕적 판단 능력을 향상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서는 한 사회가 도덕적 이상을 추구하도록 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윤리학이 어떻게 그러한 실천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다. 그것은 권위주의에 바탕을 둔 모든 종교가 수행하고자 한 목표와도 같은 것이지만, 어떤 종교도 그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지는 못했다. 하물며 철학의 한 분야인 윤리학이, 권위주의적 방법을 배격하면서, 그러한 기능을 만족하게 수행할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다. 다만 윤리학이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과 실제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하나의 방법론이라고 할 새로운 윤리학의 방법을 여기서 시도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윤리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전문적인 대답이 아니라 윤리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법으로서 비판받을 수 있는 계기의 마련에 불과하다."

올 한해 '센세이션'을 일으킨 마이클 센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난 읽어보지 않았다. 우리나라 인문사회과학 도서 판매 기록을 일으키며 돌풍을 일으킨 것에 비해 사실 나의 관심은 '그닥'이었다. 사람들은 MB정부를 애기하며, 이 사회를 애기하며 <정의란 무엇인가>의 사회적 관심은 바로 이 사회 일반 대중의 '정의'에 대한 갈증에서 비롯됐다고들 애기한다. 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닐게다. 하지만 난 '정의' 문제를 이 사회를 좀 더 정확한 눈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기보다는 먼저 다양한 다른 주제의 독서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요즘 관심가는 주제들이 바로, 윤리, 도덕, 사고력, 논리와 관련된 책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구입한 책 두권도 이런류의 책들이다. 두번째 책은 김광수 한신대 철학과 교수의 <논리와 비판적사고>이다. 검색해보니 2007년 쇄신판도 나왔다. 참고로 내가 구입한 책은 1990년 초판이다. 예전부터 논리학 책은 한번은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간절했다. 근데 책들을 들추어보면 알수 없는 수식(?) 비스무레한 것들과 복잡한 말들.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부디 이 책을 끝까지 읽고 어느 정도 이해했으면 한다. 머리말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는 이제 민주화의 시대를 맞았다. 그래서 누구나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의 삶을 우리의 지혜를 모아 우리 스스로 가꾸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우리의 삶'을 가꾸는 데에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비판적 사고, 합리적 사고, 과학적 사고, 주체적 사고, 자율적 사고에 대한 길잡이의 역할을 할 목적을 가지고 독자들을 만날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쓸 당시보다 지금은 어쩌면 더욱 민주화가 진행되었을지 모르겠으나,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누구나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단순히 개인의 논리적 사고력의 부재만이 아니라 총체적인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것만 같다. 

마지막 두권은 마광수 교수의 책이다. 난 개인적으로 마광수 교수의 글이 좋다. 소설은 읽지 못하였으나 에세이같은 글들에서 느껴지는 그의 '리버럴'한 면이 끌린다. 예전에 읽은 책이 <모든 사랑에 불륜은 없다>이다.(언제 한번 리뷰를 써야겠다. 사실 거창하게 리뷰라기 보다는 내 짤막한 느낌 정도이다) 2008년 말에 이 책을 읽었다. 그때 사람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왜 이런책을 읽냐"하는 사람부터, "넌 이런 책만 좋아하는 거 같다"는 반응은 양반이다. "너도 그러면 '불륜'을 할수 있다는 거냐"는 애기까지 가지가지의 애기를 들었다. 난 책하나 읽었을 뿐인데. 그리고 이 책은 단순히 '사랑' 그리고 '불륜'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책 표지에도 나와있고 목차만 봐도 알 수 있지만 '문화비평집'이다. 지은이의 기존 도덕적 지형에 관한 저항의 의미에서 제목, 컨셉을 이렇게 잡은것 뿐이다. 마광수 교수는 소설 <즐거운 사라>가 유죄판결을 받아 그는 전과 2범이라고 한다. 교원연금도 받지 못한단다. ㅋㅋ 웃어야할지 울어야 할지. 머리말에 쓰여있다. "거의 모든 내용이 '도덕'에 대한 저항의 기록들"이라고. 어찌보면 그는 기존의 도덕적 편견과 지형에 의한 가장 큰 피해자가 아닐까 한다. 그의 시 "도덕을 팔아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도덕을 팔아먹고 사는 사람들은
 이승만 때도
 박정희 때도
 전두환 때도
 노태우 때도
 김영삼 때도
 김대중 때도
 노무현 때도
 언제나 출세한다
 언제나 권력으로부터 환영 받는다

 박정희의 '재건 국민 운동'
 전두환의 '삼청 교육대'
 김영삼의 '도덕 독재' 등등
 통치자들은 언제나 도덕을 곁에 끼고 정치를 한다

 내가 <즐거운 사라>가 야하다고 잡혀갈 때
「 마광수 때문에 에이즈가 늘어난다, 잘 잡아갔다 」
 고 떠들어대던
 어느 서울대학 교수는
 전두환 때도
 노태우 때도
 김영삼 때도
 김대중 때도
 노무현 때도
 언제나 여러 관변단체 장(長)을 지내며
 출세했다
 그는 지금 서울의 어느 대학
 총장까지 하고 있다

 그놈을 때려죽이고 싶다
 도덕을 팔아먹고 사는 놈들은
 다 때려죽이고 싶다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는 1991년 민족과 문학사에서 나왔으나 절판됐으며, 내가 구입한 책은 1997년 사회평론에서 나온 재판이다.<사랑받지 못하여>는 그의 1990년에 나온 두번재 에세이집으로, 첫번째 에세이집은 1989년에 나온 <나는 야한여자가 좋다>이다. 이 책은 100만권 팔렸다고 한다. 대단하다. 얼마전에 개정판도 나왔다. 개정판 머리말에 이런 글이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지나친 쾌락주의로 서민들을 혹세무민(?)하여 우리 사회를 성적 향락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그밖에도 여성단체들이 '여성을 상품화 한다'는 이유로 나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그래서 <마광수의 야한 여자론 비판>이라는 단행본까지 나올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특히나 잊혀지지 않는 것은 내 직장인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들이 나를 불러다 앉혀놓고 일종의 '인민재판'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따위 저질스럽고 선정적인 책을 내서 교수사회의 품격을 떨어뜨렸다는 애기였다. 내가 그들 요구대로 반성(?)하지 않고 내 주장을 계속 내세우자, 국문학과 교수들은 나를 뺀 전원일치로 다음 학기 (1989년2학기)의 내 강좌를 모두 폐쇄시켜버렸다. 나는 지금까지도, 과련 그때 연대 국문과 교수들이 이 책을 제대로 읽기나 했는지 의문이 간다. 아마 제목만 보고서 모두 그토록 흥분했던 것같다. 이 책은 특히 책 안에 있는 시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를 가지고 말이 많았는데, 나로서는 어리둥절했던 것이, 그 시는 1979년에 '문학과지성' 잡지에 발표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 한국은 정치적 민주화는 어느정도 이루어냈지만 문화적 민주화는 아직 멀고도 멀었다. 한국은 빨리 촌스러운 수구적 봉건윤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나라가 진짜 '선진국'이 될 수 있다.

제목만 가지고 판단하는 성급함, 그리고 단순한 자기 주장과 취향 표현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편협함 이것이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될 수 없는, 진정한 '민주국가'가 될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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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출근길 신문을 통해 리영희 선생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딱히 이분의 책을 읽은 일도 없고, 관련된 일도 겪은 적이 없지만,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이 분의 영향력과 위치는 알 수 있다. 예전 헌책방에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스핑크스의 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등을 훝어본 적이 있다. 나중에 읽어봐야지 하는 막연한 생각만 했을 뿐, 아직까지 읽어보지 못한 채 그 분은 이제 이 세상 분이 아니게됐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리영희 선생님의 책을 한 권 읽어야 겠다 해서 집은 책이 <대화-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이다. 뇌출혈로 쓰러지시고 기력을 회복하신 후 임헌영씨와 대담식으로 쓰여진 책이다.  

책 내용이야 말 그대로 하나의 회고록, 자서전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근데 이 책에 집중할 수 있게 된 이유가 하나 있다. 저자가 쓴 머리말의 마지막 부분이다. 많은 분들이 공감할 듯 하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청이 있다. 이제는 거의 지나가버린 그 시대를 인간적 고통과 분노, 상처투성이의 온몸으로 부딪쳐 살아온 기성세대나, 앞 세대들이 심고 가꾼 열매를 권리처럼 여기면서 아무런 생각 없이 맛보고 있는 지금의 행복한 세대의 독자에게 부탁하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함께 고민하고 자신이 그 상황에 직면했거나 처했다면 '지식인'으로서 어떻게 가치판단을 하고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생각해 보기를. 그럼으로써 이 자서전의 당사자와 대담자가 책 속에서 진행한 것과 같은 자기비판적 대화의 기회로 삼기를. 그리고 기회가 있으면 나와의 비판적 대화도 가질 수 있기를."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들은 철이 없다. '싸가지'가 없다 한다. 젊은 세대는 반대로 기성세대들은 고리타분하고 실력없고 자기 위치만 고수하려 한다 비판한다. 사실 현재의 학교에서 특히나 이런 갈등이 심한것 같다. 접점은 없는 걸까? 나름 젊은 세대로서 우선은 '앞세대들이 심고 가꾼 열매'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과 그분들의 노고과 희생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젊은 세대들이 싫어하고 비판하는 기성세대들의 문제(?)들의 원인도 어찌보면 우리 모두의 책임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또한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두 세대가 합력하고 화해해야 한다. 

최선의 방법은 우선 좋은 책을 읽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대의 고민과 문제를 제시해주는 우리 시대의 큰 '지식인' 리영희 선생을 잃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큰 손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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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진이가 울었다. 엄청나게...정말 서럽게 "꺼억 꺼억"하며 "엄마아아..."하며 울었다. 집에 처제와 쌍둥이 조카가 놀러왔다 와이프가 데려다 주러 나갔는데, 그 사이 엄마를 찾으며 운다. 졸리운거 같기도 하다. 내가 달래도 계속 운다. 그러다 혼자 걸어서 자기가 자는 방으로 들어가더니 문을 닫고 운다. 어떻게 하나 두고 봤더니 나오지 않고 계속 울음 소리만 들려 방으로 들어가보니 컴컴한 방 안에서 이불 위헤 앉아 "꺼억"하며 울고 있다. 

"규진아 엄마 금방 올거야, 아빠 있는데 왜 울어"해도 소용없다. 계속 운다. 그래서 "규진아 그럼 계속 울어 아빠 여기 있을테니"하고 옆에 그냥 있으니 울다 내 등뒤에 와서 치근덕 거린다. 업어 달라는 애기다. 업어 주니 울지 않는다. 그러나 좀 있으니 또 운다. 그러다 내 핸드폰을 켜주고 보여주니 눈물, 콧물 흘려 퉁 부운 눈으로 핸드폰 화면을 열심히 보고 버튼을 연신 눌러 댄다.  

그러다 엄마가 오니 너무나 반가운 듯, 달려가 안기며 또 운다. 이 울음은 '안도의 울음'이겠지. 와이프가 규진이에게 젖을 물리니 이내 웃음기 띈 얼굴로 젖을 먹는다. 얼마나 좋을까?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는 이가 바로 '엄마 젖 먹는 아이의 얼굴'이 아닐까 한다. 그런 규진이에게서 젖을 떼려고 한다. 아이가 그래서 그런지 더 엄마에게 치근덕 거리고 밤에 울기도 많이 운다. 그 좋아하는 걸 못먹게 하려니 와이프도 슬픈듯 하다.  

아이에게 '엄마'란 어떤 존재일까? 하는 궁금증, 생각이 든다. 단순히 아이가 태어나 자라는 초기 아이의 '생사여탈권'을 쥔 존재일수 있겠지만, 단순히 그것만은 아닐것이다. 아이가 태어나 자란는 과정에서 엄마의 존재란 아이의 신체적, 정신적 성숙에 큰 영향을 끼칠것이다. 특히나 정신적 안정에. 

가정환경의 중요성에 엄마, 아빠의 존재에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밤이다. 규진이가 생긴 이후 구입한 아이 관련 서적이다.(물론 다른 책도 있지만 좀 학술적인 책은 이 세권이다) 아이의 언어 습득과 관련된 <아이는 어떻게 말을 배울까>와 <두 살에서 다섯 살까지> 둘다 아이의 나이에 따른 언어 습득 특징과 과정을 다루기 때문에 돌 무렵까지만 읽고 그 이후는 읽지 않았는데 이어서 읽어야 할 듯 하다. <데카르트의 아기>는 아직 읽지 못했다. 맘만 앞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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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감옥에 가보지도 않았고(군대 신병 시절에 정신교육 차원에서 사단에 있는 헌병대 감옥에는 가봤다) 생활해 보지도 않았다. 내가 초임발령을 받았을때 학교 영어 선생님으로부터 간접적으로 들어본게 다다. 그분도 도종환 시인과 같은 해직 출신으로, 이유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감옥생활 경험이 있다고 하셨다. 그 부자유스러움, 답답함, 기묘함에 대해 들었을때의 느낌 아직도 생각난다. 글을 쓰고 싶은데 펜이 없어서 글을 쓸 종이가 없어서 남몰래 슬퍼했을 시인을 생각해본다. 동시에 쓰고 싶을때 읽고 싶을때 쓰고 읽을 수 있는 현재의 상황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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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12.4  손발 묶인 한 편의 시 감옥 밖으로 보냈습니다 

일천오백 교사가 학교를 쫓겨났고
영어의 몸 된 교사도 백명
처절한 여름이었습니다
볼펜도 종이도 없는 교도소에서
아이들 가슴속에 새긴 우리 이름
우리가 가는 곧은 길을 노래했습니다

감옥 생활을 시작하면서 장이 안 좋아 고생을 했습니다. 배탈과 설사가 멈추지 않는데 치료를 제대로 받을 수 없어 몸은 쇠약해져 가고 기력은 떨어졌습니다. 교도소는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고 스스로 면도를 하도록 면도기가 제공되는 곳이 아닙니다. 칼이나 가위 같은 게 제공될 수 없고 끈이나 유리도 없습니다. 따라서 유리창도 없고 쇠창살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로 겨울이면 찬바람이 몰아닥치고 여름이면 빗줄기가 지나갑니다. 머리를 깎거나 면도를 하는 일도 정해진 날이나 되어야 그 일을 맡은 재소자들 앞에 불려나가 했기 때문에 몰골은 갈수록 초췌해져 갔습니다.

정신적으로 더 힘든 건 바깥과 단절되어 소식을 잘 들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녁때면 방송뉴스가 나오긴 하지만 지나간 걸 편집해서 내보내주는 것이었고, 신문도 배달되어 오는데 저와 관련된 소식이나 제가 보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내용은 가위로 오려내고 넣어 주었습니다. 걸레처럼 누더기가 된 신문이 들어오는 날도 종종 있었습니다.

면회 온 사람들을 통해서 소식을 듣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그들이 전국의 교사들이 명동성당 차가운 돌바닥에 모여 무기한 단식농성을 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단식농성을 하다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가거나,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나 병원노련 소속 의사·간호사들의 진료를 받으면서 여선생님들이 돌바닥에 누워 있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1500명이 넘는 교사가 해임 파면되어 학교를 쫓겨났으며, 100명이 넘는 남녀 교사가 감옥에 갇힌 처절한 여름이었습니다. 연일 비가 내리고 있는데 날바닥에서 굶어 쓰러지고 있는 선생님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났습니다. 잔인한 칠월이었습니다. 쥐들은 교도소 여기저기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는데 저는 단 몇 발짝도 걸어 다닐 수 없는 감방에 갇혀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그때마다 터질 것 같은 심정을 어디에 써놓고 싶은데 교도소에서는 볼펜 한 개도 종이 한 장도 제공해 주지 않았습니다. 교도소 교무과장 면담을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집필허가를 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교무과장은 미결수라서 집필 허가를 내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 같은 독립 운동가들도 감옥 안에서 집필을 하였고, 만해 한용운 선생 같은 분들도 일제 치하의 감옥에서 글을 쓰시지 않았느냐? 민주화되었다는 세상에 문인에게 글 한 줄 쓸 수 없게 하는 게 말이 되느냐?” 하고 따졌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글을 쓸 수 있는 건 오직 교도관이 보는 앞에서 봉함엽서에 편지를 쓸 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봉함엽서도 한 달에 몇 장밖에 쓸 수 없었습니다.

글을 쓸 수 있는 건 만년노트밖에 없었습니다. 만년노트라는 건 두꺼운 종이에 기름을 먹이고 그 위에 비닐을 덮은 것으로 연필 모양의 뾰족한 플라스틱 물건으로 눌러 쓰면 글씨가 써지고 비닐을 들면 글씨가 날아가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년노트에 글을 써볼 수는 있으나 남기거나 저장을 할 수 있는 노트가 아닙니다. 크기가 사륙배판 공책만했습니다. 에이(A)4 용지보다도 작은 크기의 물건입니다. 글을 쓰고 싶은 갈망은 넘치는데 글을 쓸 수 있는 연필이나 종이가 없다는 건 제게 고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만년노트에다 긴 시 한 편을 썼습니다. 취침나팔이 울리고 난 뒤 배설물과 누군가 흘린 정액 흔적과 땟물로 얼룩진 모포를 뒤집어쓴 채 마룻바닥에 엎드려 썼습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쇠창살이 더욱 또렷해 옵니다.
잠 못 들어 뒤척이는 수인의 고적한 어깨 너머로
또 하루가 흔적 없이 저물었습니다.
때 묻은 모포를 끌어 덮으며
아직도 다하지 못한 일들을 생각합니다.
한 가닥 외로운 진실을 놓지 않고
굶어 쓰러지면서도 우리와 함께 있는
이름들을 조용히 불러 봅니다.
세상 밖에서 가졌던 모든 것을 벗기우고
지금 알몸 위에 흰 수의를 걸치고 살아도
우리가 빼앗긴 세월을 반드시 돌려받을 수 있음을 믿습니다.
감옥의 안에서나 밖에서나
당신들이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빼앗긴 채 가슴에 수인번호를 낙인처럼 달고 살아도
아이들의 가슴속에 새기고 온 우리의 이름은
아무도 지울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뜻을 세상에서 지워버릴 수는 없습니다.
설령 우리가 이곳에서 거미줄에 날개를 묶인 곤충처럼
몸을 떨며 있기를 바란다 해도
설령 우리가 몸을 적실 물 한 방울에 얽매이게 하고
배를 채울 보리밥 한 술에 무릎을 꿇게 하여도
그리하여 우리를 짐승처럼 마룻장에 뒹굴게 하여도
우리는 이 길을 곧게 갑니다.
그렇게 살다 장승죽음으로 실려 나간다 해도
우리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숨이 허공에 풀잎처럼 걸려 있는 동안도
자기의 자리를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으며
한 톨의 사랑도 실천하지 않는 동료들이
아직도 내 빈 의자의 옆에 가득가득하다 해도
그들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습니다.
옳다고 믿어 이 길을 택했으므로
옳은 것을 바르게 행하지 않는 것도
죄악이라고 믿었으므로
우리는 새벽이 오는 쪽을 향해
담담히 웃으며 갈 수 있습니다.
서슬 푸른 칼날에 수천의 목이 잘리고
이 나라 땅의 곳곳이 새남터가 된다 하여도
우리는 이 감옥에서 칼날에 꺾이지 않는
마지막 이름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쓰러져 있어도
빛나고 높은 그곳을 향해
우리는 이 길을 곧게 갑니다.

1989. 7. 24. 도종환 올림

- 졸시 <정 선생님, 그리고 보고 싶은 여러 선생님께> 전문

다음날 봉함엽서를 신청해서 교도관이 보는 앞에 앉아 만년노트에 쓴 시를 편지형식으로 엽서에 옮겨 적었습니다. 교도관은 이게 ‘편지냐, 시냐?’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시인이 편지를 시처럼 쓴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고개를 연신 갸우뚱거리던 교도관은 그걸 윗사람에게 가지고 갔고, 여러 번의 검열을 거쳐 전교조 충북지부 사무실에 우편으로 배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는 곧 명동성당의 단식농성장에 대자보로 붙게 되었고 그 대자보를 본 <한겨레신문> 기자가 신문에 옮겨 게재하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감방 문이 화들짝 하고 열리더니 “나와!” 하고 외치는 교도관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먹다 만 밥그릇과 국그릇을 마룻장에 둔 채 끌려 나갔습니다. “누구를 통해서 시를 내보냈어?” 하는 호통과 함께 다그치는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저는 “시를 몰래 내보낸 게 아니라, 정식으로 엽서를 써서 보냈다. 편지 형식으로 쓴 건데, 그걸 시라고 행 가름해서 실었나 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교도소에 있는 재소자의 시가 신문에 실린 경위를 조사해서 보고하라고 법무부에서 직접 연락이 왔다고 했습니다. 결국 제 시 때문에 교도소장을 포함한 아홉 명의 담당 교도관들이 줄징계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 때문에 징계를 받은 교도관들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이 시는 노래 테이프 속에 낭송으로 삽입되어 전국의 교사들에게 배포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같이 수감되어 있던 백상진 청주대 학생회장(현 충청북도지사 보좌관)이 이쑤시개보다 약간 작은 볼펜심을 구해다 주는 겁니다. 얼마나 고맙고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그 볼펜심 도막으로 몰래 숨어 시를 썼습니다. 그걸 검방 때 빼앗기지 않으려고 마룻장 나무판자 하나를 들어내 그 밑에다가도 감추고 플라스틱 빗자루 손잡이 뚜껑을 분리해 그 안에다가도 감추고 별의별 곳에다가 그걸 숨겼습니다. 종이가 없어서 비누를 싼 속포장지에다가도 시를 쓰고 화장지 겉을 싼 종이 안쪽에다가도 썼습니다. 책 맨 뒷장 백지에다 깨알같이 쓰고 그걸 풀로 붙여 감추었습니다. 그렇게 쓴 시들을 모아 출옥 후 네 번째 시집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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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정치학 책이지만 관심가는 책이다. 사실 책 내용에 관심이 간다기 보다 아래 기사를 쓴 고명섭 기자의 글이 너무 쉽고 잘 써서 책이 더 땡긴다.  

 

자유주의 지배력 정면으로 부정
‘정치 우선’ 이념·역사 서술 눈길
“좌파의 오류·의지 상실이 걸림돌”  

<정치가 우선한다-사회민주주의와 20세기 유럽의 형성>은 정치학자 셰리 버먼(사진)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가 2006년에 펴낸 책이다. 2006년이면 자유시장주의의 21세기적 극단형인 신자유주의가 이데올로기적 지배력을 최대로 휘두르던 때다. 20세기 역사를 자유주의의 승리의 역사로 서술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때였다. 이 책은 이런 시대 분위기에 맞서 전혀 다른 명제를 제시한다. 20세기에 승리한 것은 자유주의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였다!

그동안 사민주의는 대체로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의 실용주의적인 타협으로 이해돼 왔다. 사민주의자는 ‘혁명적 신념이나 용기가 없는 사회주의자’라는 다소 경멸스러운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 책은 사민주의를 이런 어정쩡한 타협 혹은 타락으로 보는 태도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지은이는 사민주의가 단순한 정책방향의 차원을 뛰어넘어 명확한 자기완결적 이념체계를 지닌 정치이데올로기로써 자신의 존재를 입증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이 사민주의 이념이 어떤 역사적 경로를 거쳐 성립했는지, 또 누가 사민주의 성립 과정에 노력과 희생을 바쳤는지, 그리고 그 사민주의가 왜 우리 시대에 마땅히 추구해야 할 보편이념인지를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이 책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부분은 마르크스주의에서 사민주의가 분화돼 나오는 과정에 대한 역사적 설명이다. 지은이의 설명을 따르면, 19세기에 가장 유력한 이념은 자본주의 흥성을 물질적 토대로 삼은 자유주의였다. 이 이념에 맞서 등장한 것이 마르크스주의였다. 그러나 두 이념은 모두 ‘경제의 우선성’을 믿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카를 마르크스는 경제가 사회의 토대이며 정치는 그 반영이거나 보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 마르크스주의를 떠받치는 두 개의 이념적 기둥이 ‘역사유물론’과 ‘계급투쟁’이었다. 역사유물론이란 자본주의가 발전하다가 자기모순 속에서 (스스로) 붕괴한다는 것을 뼈대로 한다. 또 ‘계급투쟁’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지배계급에 대한 투쟁이 역사의 산파로서 ‘자본주의 붕괴와 공산주의 도래’를 낳을 것이라는 이론이다. 사회를 적대계급의 대결로 이해하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 마르크스주의의 세계인식이 19세기 말에 이르면 현실 설명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자본주의가 붕괴하는 게 아니라 위기를 극복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인 것인데, 이런 시대적 상황에 대응해 등장한 것이 ‘정치의 우선성’에 주목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판본, 곧 ‘민주적 수정주의’와 ‘혁명적 수정주의’다. 민주적 수정주의의 주창자가 독일 사민당의 이론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었고, 혁명적 수정주의의 대표자가 프랑스의 급진적 혁명이론가 조르주 소렐이었다. 이 두 수정주의는 자본주의의 필연적 붕괴라는 ‘역사유물론’을 믿지 않고, 정치적 차원에서 능동적 활동을 통해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 두 이념은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자본주의의 ‘사회 파괴’에 대항하여 맹렬하게 타오르던 민족주의적 공동체주의를 받아들여 내적 성격을 변화시켰다. 소렐의 혁명적 수정주의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민족주의와 결합해 파시즘으로 나아갔다. 또 독일에서는 나치즘(국가사회주의)을 낳았다. 비슷한 시기에 민주적 수정주의는 공동체적 연대에 눈을 돌림으로써 사회민주주의로 진화했다. 지은이는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자본주의에 맞서는 이념으로서 이 파시즘과 사민주의가 서로 격렬하게 경쟁했는데, 결국 승리한 것은 사민주의였다고 말한다. 파시즘과 그 급진적 형태인 나치즘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과격한 성격 때문에 파산했다.

사민주의는 민주주의를 수단이자 동시에 목적으로 인식했다. 또 자유주의를 ‘자유시장에 대한 집착’에서 분리시킴으로써 이 이념의 본질적 핵심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전후에 사민주의는 가장 유력한 정치이념이 되었다. 지은이는 사민주의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유물론에서 벗어나 ‘정치의 우선성’을 앞세우고, ‘계급 투쟁’을 넘어 계급 타협을 통한 공동체적 연대를 실현하고, 또 마르크스주의가 외면했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본질적 가치를 수용함으로써 탄력 있는 정치이데올로기로 자립했다고 말한다. 특히 사민주의자들은 시장과 자본주의를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경제성장의 ‘귀중한 도구’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과거의 마르크스주의와 단절했다. “동시에 그들은 시장이 하인으로서는 훌륭하지만 주인으로서는 끔찍하다는 주장을 흔들림없이 지켜나갔다.”

지은이가 보기에, 20세기 말에 앤서니 기든스와 영국 노동당이 주장한 ‘제3의 길’은 자본주의 시장의 힘에 눌려 정치의 우선성을 포기한 노선이었다. 민주적으로 획득한 권력으로 경제적 힘을 제어하는 것이 사민주의의 핵심원리인데, 이 원리에 비추어보면 ‘제3의 길’은 사민주의의 길에서 이탈한 것이 분명하다. 지은이는 오늘날 사민주의의 부활에 가장 큰 장애물은 좌파 자신들의 지적 오류와 의지 상실에 있다며, 사민주의에 대한 신념을 되찾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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