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정치학 책이지만 관심가는 책이다. 사실 책 내용에 관심이 간다기 보다 아래 기사를 쓴 고명섭 기자의 글이 너무 쉽고 잘 써서 책이 더 땡긴다.  

 

자유주의 지배력 정면으로 부정
‘정치 우선’ 이념·역사 서술 눈길
“좌파의 오류·의지 상실이 걸림돌”  

<정치가 우선한다-사회민주주의와 20세기 유럽의 형성>은 정치학자 셰리 버먼(사진)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가 2006년에 펴낸 책이다. 2006년이면 자유시장주의의 21세기적 극단형인 신자유주의가 이데올로기적 지배력을 최대로 휘두르던 때다. 20세기 역사를 자유주의의 승리의 역사로 서술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때였다. 이 책은 이런 시대 분위기에 맞서 전혀 다른 명제를 제시한다. 20세기에 승리한 것은 자유주의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였다!

그동안 사민주의는 대체로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의 실용주의적인 타협으로 이해돼 왔다. 사민주의자는 ‘혁명적 신념이나 용기가 없는 사회주의자’라는 다소 경멸스러운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 책은 사민주의를 이런 어정쩡한 타협 혹은 타락으로 보는 태도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지은이는 사민주의가 단순한 정책방향의 차원을 뛰어넘어 명확한 자기완결적 이념체계를 지닌 정치이데올로기로써 자신의 존재를 입증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이 사민주의 이념이 어떤 역사적 경로를 거쳐 성립했는지, 또 누가 사민주의 성립 과정에 노력과 희생을 바쳤는지, 그리고 그 사민주의가 왜 우리 시대에 마땅히 추구해야 할 보편이념인지를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이 책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부분은 마르크스주의에서 사민주의가 분화돼 나오는 과정에 대한 역사적 설명이다. 지은이의 설명을 따르면, 19세기에 가장 유력한 이념은 자본주의 흥성을 물질적 토대로 삼은 자유주의였다. 이 이념에 맞서 등장한 것이 마르크스주의였다. 그러나 두 이념은 모두 ‘경제의 우선성’을 믿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카를 마르크스는 경제가 사회의 토대이며 정치는 그 반영이거나 보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 마르크스주의를 떠받치는 두 개의 이념적 기둥이 ‘역사유물론’과 ‘계급투쟁’이었다. 역사유물론이란 자본주의가 발전하다가 자기모순 속에서 (스스로) 붕괴한다는 것을 뼈대로 한다. 또 ‘계급투쟁’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지배계급에 대한 투쟁이 역사의 산파로서 ‘자본주의 붕괴와 공산주의 도래’를 낳을 것이라는 이론이다. 사회를 적대계급의 대결로 이해하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 마르크스주의의 세계인식이 19세기 말에 이르면 현실 설명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자본주의가 붕괴하는 게 아니라 위기를 극복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인 것인데, 이런 시대적 상황에 대응해 등장한 것이 ‘정치의 우선성’에 주목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판본, 곧 ‘민주적 수정주의’와 ‘혁명적 수정주의’다. 민주적 수정주의의 주창자가 독일 사민당의 이론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었고, 혁명적 수정주의의 대표자가 프랑스의 급진적 혁명이론가 조르주 소렐이었다. 이 두 수정주의는 자본주의의 필연적 붕괴라는 ‘역사유물론’을 믿지 않고, 정치적 차원에서 능동적 활동을 통해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 두 이념은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자본주의의 ‘사회 파괴’에 대항하여 맹렬하게 타오르던 민족주의적 공동체주의를 받아들여 내적 성격을 변화시켰다. 소렐의 혁명적 수정주의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민족주의와 결합해 파시즘으로 나아갔다. 또 독일에서는 나치즘(국가사회주의)을 낳았다. 비슷한 시기에 민주적 수정주의는 공동체적 연대에 눈을 돌림으로써 사회민주주의로 진화했다. 지은이는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자본주의에 맞서는 이념으로서 이 파시즘과 사민주의가 서로 격렬하게 경쟁했는데, 결국 승리한 것은 사민주의였다고 말한다. 파시즘과 그 급진적 형태인 나치즘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과격한 성격 때문에 파산했다.

사민주의는 민주주의를 수단이자 동시에 목적으로 인식했다. 또 자유주의를 ‘자유시장에 대한 집착’에서 분리시킴으로써 이 이념의 본질적 핵심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전후에 사민주의는 가장 유력한 정치이념이 되었다. 지은이는 사민주의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유물론에서 벗어나 ‘정치의 우선성’을 앞세우고, ‘계급 투쟁’을 넘어 계급 타협을 통한 공동체적 연대를 실현하고, 또 마르크스주의가 외면했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본질적 가치를 수용함으로써 탄력 있는 정치이데올로기로 자립했다고 말한다. 특히 사민주의자들은 시장과 자본주의를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경제성장의 ‘귀중한 도구’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과거의 마르크스주의와 단절했다. “동시에 그들은 시장이 하인으로서는 훌륭하지만 주인으로서는 끔찍하다는 주장을 흔들림없이 지켜나갔다.”

지은이가 보기에, 20세기 말에 앤서니 기든스와 영국 노동당이 주장한 ‘제3의 길’은 자본주의 시장의 힘에 눌려 정치의 우선성을 포기한 노선이었다. 민주적으로 획득한 권력으로 경제적 힘을 제어하는 것이 사민주의의 핵심원리인데, 이 원리에 비추어보면 ‘제3의 길’은 사민주의의 길에서 이탈한 것이 분명하다. 지은이는 오늘날 사민주의의 부활에 가장 큰 장애물은 좌파 자신들의 지적 오류와 의지 상실에 있다며, 사민주의에 대한 신념을 되찾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