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감옥에 가보지도 않았고(군대 신병 시절에 정신교육 차원에서 사단에 있는 헌병대 감옥에는 가봤다) 생활해 보지도 않았다. 내가 초임발령을 받았을때 학교 영어 선생님으로부터 간접적으로 들어본게 다다. 그분도 도종환 시인과 같은 해직 출신으로, 이유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감옥생활 경험이 있다고 하셨다. 그 부자유스러움, 답답함, 기묘함에 대해 들었을때의 느낌 아직도 생각난다. 글을 쓰고 싶은데 펜이 없어서 글을 쓸 종이가 없어서 남몰래 슬퍼했을 시인을 생각해본다. 동시에 쓰고 싶을때 읽고 싶을때 쓰고 읽을 수 있는 현재의 상황에 감사한다.

--------------------------------------------------------------------------

한겨레신문 2010.12.4  손발 묶인 한 편의 시 감옥 밖으로 보냈습니다 

일천오백 교사가 학교를 쫓겨났고
영어의 몸 된 교사도 백명
처절한 여름이었습니다
볼펜도 종이도 없는 교도소에서
아이들 가슴속에 새긴 우리 이름
우리가 가는 곧은 길을 노래했습니다

감옥 생활을 시작하면서 장이 안 좋아 고생을 했습니다. 배탈과 설사가 멈추지 않는데 치료를 제대로 받을 수 없어 몸은 쇠약해져 가고 기력은 떨어졌습니다. 교도소는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고 스스로 면도를 하도록 면도기가 제공되는 곳이 아닙니다. 칼이나 가위 같은 게 제공될 수 없고 끈이나 유리도 없습니다. 따라서 유리창도 없고 쇠창살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로 겨울이면 찬바람이 몰아닥치고 여름이면 빗줄기가 지나갑니다. 머리를 깎거나 면도를 하는 일도 정해진 날이나 되어야 그 일을 맡은 재소자들 앞에 불려나가 했기 때문에 몰골은 갈수록 초췌해져 갔습니다.

정신적으로 더 힘든 건 바깥과 단절되어 소식을 잘 들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녁때면 방송뉴스가 나오긴 하지만 지나간 걸 편집해서 내보내주는 것이었고, 신문도 배달되어 오는데 저와 관련된 소식이나 제가 보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내용은 가위로 오려내고 넣어 주었습니다. 걸레처럼 누더기가 된 신문이 들어오는 날도 종종 있었습니다.

면회 온 사람들을 통해서 소식을 듣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그들이 전국의 교사들이 명동성당 차가운 돌바닥에 모여 무기한 단식농성을 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단식농성을 하다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가거나,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나 병원노련 소속 의사·간호사들의 진료를 받으면서 여선생님들이 돌바닥에 누워 있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1500명이 넘는 교사가 해임 파면되어 학교를 쫓겨났으며, 100명이 넘는 남녀 교사가 감옥에 갇힌 처절한 여름이었습니다. 연일 비가 내리고 있는데 날바닥에서 굶어 쓰러지고 있는 선생님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났습니다. 잔인한 칠월이었습니다. 쥐들은 교도소 여기저기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는데 저는 단 몇 발짝도 걸어 다닐 수 없는 감방에 갇혀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그때마다 터질 것 같은 심정을 어디에 써놓고 싶은데 교도소에서는 볼펜 한 개도 종이 한 장도 제공해 주지 않았습니다. 교도소 교무과장 면담을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집필허가를 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교무과장은 미결수라서 집필 허가를 내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 같은 독립 운동가들도 감옥 안에서 집필을 하였고, 만해 한용운 선생 같은 분들도 일제 치하의 감옥에서 글을 쓰시지 않았느냐? 민주화되었다는 세상에 문인에게 글 한 줄 쓸 수 없게 하는 게 말이 되느냐?” 하고 따졌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글을 쓸 수 있는 건 오직 교도관이 보는 앞에서 봉함엽서에 편지를 쓸 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봉함엽서도 한 달에 몇 장밖에 쓸 수 없었습니다.

글을 쓸 수 있는 건 만년노트밖에 없었습니다. 만년노트라는 건 두꺼운 종이에 기름을 먹이고 그 위에 비닐을 덮은 것으로 연필 모양의 뾰족한 플라스틱 물건으로 눌러 쓰면 글씨가 써지고 비닐을 들면 글씨가 날아가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년노트에 글을 써볼 수는 있으나 남기거나 저장을 할 수 있는 노트가 아닙니다. 크기가 사륙배판 공책만했습니다. 에이(A)4 용지보다도 작은 크기의 물건입니다. 글을 쓰고 싶은 갈망은 넘치는데 글을 쓸 수 있는 연필이나 종이가 없다는 건 제게 고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만년노트에다 긴 시 한 편을 썼습니다. 취침나팔이 울리고 난 뒤 배설물과 누군가 흘린 정액 흔적과 땟물로 얼룩진 모포를 뒤집어쓴 채 마룻바닥에 엎드려 썼습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쇠창살이 더욱 또렷해 옵니다.
잠 못 들어 뒤척이는 수인의 고적한 어깨 너머로
또 하루가 흔적 없이 저물었습니다.
때 묻은 모포를 끌어 덮으며
아직도 다하지 못한 일들을 생각합니다.
한 가닥 외로운 진실을 놓지 않고
굶어 쓰러지면서도 우리와 함께 있는
이름들을 조용히 불러 봅니다.
세상 밖에서 가졌던 모든 것을 벗기우고
지금 알몸 위에 흰 수의를 걸치고 살아도
우리가 빼앗긴 세월을 반드시 돌려받을 수 있음을 믿습니다.
감옥의 안에서나 밖에서나
당신들이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빼앗긴 채 가슴에 수인번호를 낙인처럼 달고 살아도
아이들의 가슴속에 새기고 온 우리의 이름은
아무도 지울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뜻을 세상에서 지워버릴 수는 없습니다.
설령 우리가 이곳에서 거미줄에 날개를 묶인 곤충처럼
몸을 떨며 있기를 바란다 해도
설령 우리가 몸을 적실 물 한 방울에 얽매이게 하고
배를 채울 보리밥 한 술에 무릎을 꿇게 하여도
그리하여 우리를 짐승처럼 마룻장에 뒹굴게 하여도
우리는 이 길을 곧게 갑니다.
그렇게 살다 장승죽음으로 실려 나간다 해도
우리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숨이 허공에 풀잎처럼 걸려 있는 동안도
자기의 자리를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으며
한 톨의 사랑도 실천하지 않는 동료들이
아직도 내 빈 의자의 옆에 가득가득하다 해도
그들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습니다.
옳다고 믿어 이 길을 택했으므로
옳은 것을 바르게 행하지 않는 것도
죄악이라고 믿었으므로
우리는 새벽이 오는 쪽을 향해
담담히 웃으며 갈 수 있습니다.
서슬 푸른 칼날에 수천의 목이 잘리고
이 나라 땅의 곳곳이 새남터가 된다 하여도
우리는 이 감옥에서 칼날에 꺾이지 않는
마지막 이름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쓰러져 있어도
빛나고 높은 그곳을 향해
우리는 이 길을 곧게 갑니다.

1989. 7. 24. 도종환 올림

- 졸시 <정 선생님, 그리고 보고 싶은 여러 선생님께> 전문

다음날 봉함엽서를 신청해서 교도관이 보는 앞에 앉아 만년노트에 쓴 시를 편지형식으로 엽서에 옮겨 적었습니다. 교도관은 이게 ‘편지냐, 시냐?’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시인이 편지를 시처럼 쓴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고개를 연신 갸우뚱거리던 교도관은 그걸 윗사람에게 가지고 갔고, 여러 번의 검열을 거쳐 전교조 충북지부 사무실에 우편으로 배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는 곧 명동성당의 단식농성장에 대자보로 붙게 되었고 그 대자보를 본 <한겨레신문> 기자가 신문에 옮겨 게재하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감방 문이 화들짝 하고 열리더니 “나와!” 하고 외치는 교도관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먹다 만 밥그릇과 국그릇을 마룻장에 둔 채 끌려 나갔습니다. “누구를 통해서 시를 내보냈어?” 하는 호통과 함께 다그치는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저는 “시를 몰래 내보낸 게 아니라, 정식으로 엽서를 써서 보냈다. 편지 형식으로 쓴 건데, 그걸 시라고 행 가름해서 실었나 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교도소에 있는 재소자의 시가 신문에 실린 경위를 조사해서 보고하라고 법무부에서 직접 연락이 왔다고 했습니다. 결국 제 시 때문에 교도소장을 포함한 아홉 명의 담당 교도관들이 줄징계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 때문에 징계를 받은 교도관들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이 시는 노래 테이프 속에 낭송으로 삽입되어 전국의 교사들에게 배포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같이 수감되어 있던 백상진 청주대 학생회장(현 충청북도지사 보좌관)이 이쑤시개보다 약간 작은 볼펜심을 구해다 주는 겁니다. 얼마나 고맙고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그 볼펜심 도막으로 몰래 숨어 시를 썼습니다. 그걸 검방 때 빼앗기지 않으려고 마룻장 나무판자 하나를 들어내 그 밑에다가도 감추고 플라스틱 빗자루 손잡이 뚜껑을 분리해 그 안에다가도 감추고 별의별 곳에다가 그걸 숨겼습니다. 종이가 없어서 비누를 싼 속포장지에다가도 시를 쓰고 화장지 겉을 싼 종이 안쪽에다가도 썼습니다. 책 맨 뒷장 백지에다 깨알같이 쓰고 그걸 풀로 붙여 감추었습니다. 그렇게 쓴 시들을 모아 출옥 후 네 번째 시집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을 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