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9.10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인가’ 시가 제게 물었습니다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⑫
제대하고 돌아오니 아버지는 소작농이 되어있고 시도 삶도 어설픈 채 겉돌았습니다
농사일을 시작하고 원고더미에 불을 질렀습니다
죽 한솥 끓여먹고 나니 문청의 얼룩들도 사라졌습니다
어느 늦가을 저는 야간 근무를 하다 초소에서 몰래 박 신부님께 보내는 긴 편지를 썼습니다.
“신부님,
여린 햇볕에 녹았던 서릿발을 다시 얼게 하는 밤의 냉기가 적요한 모습으로 대지를 지나고 있습니다. 가끔 산짐승의 울음소리가 신비하게 앞산 계곡을 타고 하늘로 오르고 신부님 당신의 옷빛 같은 어둠이 짙게 짙게 드리워 있습니다.
신부님,
살아 있다는 것이 눈물겹습니다. 한 술의 밥을 입안 가득히 넣고 씹는 순간 울음이 북받쳐 오릅니다. 내 떠돌며 지나온 곳마다 지은 카타콤 같은 밀실에서 올리던 묵도와 그 묵도하는 모음이 꺾어져 가는 공포로 밤 꿈은 어지럽혀져 있습니다. 무덤 속에서만 항거하고 빛을 향해 서서는 말을 잃는 서툰 진실이 부끄러웠습니다. 지하의 기도 소리들을 지상에 올려 실존하는 사원 앞에 이끌어 가야겠습니다.
중이 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혼자만 득도하고 유아각성(唯我覺性)하여 무엇을 하겠다는 뜻도 없었습니다. 비록 갈라지고 때 묻은 손이지만 노동하는 이 손의 정직함을 바라보며 좀 더 분명하게 살아야겠습니다. 파티마성당의 풀과 나무 위에 숱하게 뿌린 내 오만의 이파리들이 썩어 새로운 한 포기 언어의 꽃을 피우는 거름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신부님,
어쩌면 당신의 눈동자가 이리도 오래 내게 살아 있는지요? 이렇게 고적한 밤 당신은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나는 또 무엇을 향해 이 밤을 지키고 있는 것인지요? 이제는 꽃 하나 보이지 않고 어루러기처럼 번지는 갈대꽃, 환한 갈대꽃만이 시혼을 채찍질하는 바닷가. 언제 나는 긴긴 동면에서 깨어나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어깨를 마주하고 슬픔을 마주하며 걸어가려는지요? 어울려 한바탕 마당굿이라도 하며 살 수 있을는지요?
칼로 일어선 자 칼로 스러지고, 파도는 파도를 삼키고, 밀려오고 밀려가면 변함없는 것은 의로운 바람. 이 땅에 태어나 할 일을 남겨두고 나는 다만 내부로 파들어가는 조개처럼 문을 닫고 깊디깊은 심연으로만 침전해 있었습니다. 언제 구슬을 품어 이 끝없던 기다림의 아픔을 길어 올리는 신의 그물에 온몸을 드러내 놓고 설 수 있을는지요? 부끄러운 하루, 비굴한 일상의 양식으로 배를 채우고 한 덩이 떡에도 매달리는 손은 검게 그을고 때가 끼어 하루 이틀 속죄로 아니 지워질 상흔만이 남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람은 어디까지 나를 이끌어 가려는 것일까요?
신부님,
오늘은 이상히도 당신의 목소리가 듣고 싶습니다. 당신의 말씀으로 하여 비어 있는 나의 이 잔을 가득 채우게 하고 싶습니다…”
몰래 그런 짓을 많이 했습니다. 몰래 편지를 쓰거나, 좋은 글이 있으면 근무 중에 공책에 베껴 적었습니다. 이청준의 <조율사>, 최인훈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헤르만 헤세의 <싯달타>, 에리히 헬레의 카프카 평전 <나는 문학이다>, 김성동의 <만다라>, 채광석 서한집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 이런 책들을 읽고는 밑줄 그었던 구절들을 공책에 옮겨 적곤 했습니다. 그렇게 옮겨 적은 글이나 편지나 글을 써 놓은 공책이 다섯 권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다섯 권의 공책과 숨어서 듣던 아홉 개의 클래식 테이프와 칫솔 한 개를 들고 제대를 했습니다.
제대를 하고 집에 와 보니 도시빈민으로 떠돌던 아버지는 남의 땅을 부치는 소작농이 되어 있었습니다. 청주 시내 외곽에 육십만 원짜리 농가를 전세로 얻어 농사를 지으며 살고 계셨습니다. 아버지가 농약통을 짊어지고 일어서며 취직 때문에 걱정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저는 산문집이라도 내야겠다고 생각하며 골방에 틀어박혀 슈만의 <피아노 A단조>, 시벨리우스의 교향시 <핀란디아>, 요한 슈트라우스의 <빈 숲속>을 게으르게 옮겨 다니며 원고 정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밤이면 견딜 수 없는 공허함, 허전함에 휩싸여 폭음을 하거나 흐린 하늘과 밤공기와 강은교의 <허총가>와 죽음의 냄새와 그리고 멸망과 부활 그 두 개의 유혹 사이를 헤매며 비틀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돼지를 키우느라 이집 저집 음식점 잔반통에 남은 찌꺼기를 걷어 자전거에 싣고 오는 동안, 멘델스존의 교향악만 듣고 있어야 글 한 줄이 쓰여진다고 하니 ‘문학은 도대체 얼마나 더 뻔뻔스러워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갈등 속에서 신경림 시인의 <산읍일지>와 같은 시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인가/ 눈 오는 밤에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 / 아이들의 코묻은 돈을 빼앗아/ 연탄을 사고 술을 마시고/ 숙직실에 모여 섰다를 하고/ 불운했던 그 시인을 생각한다/ 다리를 저는 그의 딸을/ 생각한다 먼 마을의/ 개 짖는 소리만 들을 것인가/ 눈 오는 밤에 가난한 우리의/ 친구들이 미치고 다시/ 미쳐서 죽을 때/ 철로 위를 굴러가는 기찻소리만/ 들을 것인가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인가 이 산읍에서”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인가’라고 묻는 이 물음은 낭만주의적인 태도, 개인주의를 완전히 벗지 못한 문학 습관, 거기다 절망적이고 암울한 몸짓이 문학창작의 주요 토양이던 날들의 삶의 모습 그 자체를 되돌아보게 했습니다. 글이 안 써질 때마다 고독의 지구력이 부족한 때문이니 어쩌니 하고 떠들던 것도 삶에 대한 자신감 부족에서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문학적 오기, 이런 것도 끝내 갑 속에 든 칼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때부터 생전 해 본 일이 없던 농사일을 하러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우며 살을 베고, 다리를 휘청거리며 볏가마니를 허리에 얹었습니다. 감자를 캐고 참깨를 털고 외양간을 치우고 인분 리어카를 끌고 마을 한복판을 지나 밭으로 갔습니다. 소똥을 치고 오줌을 퍼 나르다가 손에 똥을 묻히면서 ‘멸망하라 멸망하라 공허한 내 시여’ 하고 수없이 되뇌었습니다.
들일을 다니며 가을 한 철 보냈다
뒷주머니에 찔러 주던 백 원짜리
환희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면
니코틴 색으로 손에 배는 고적한 피로
콩과 깨를 거두고 무 두 접 뽑아 묶어
얼지 않을 땅에 묻고 땀을 닦으며 일어서도
어설프기 짝이 없는 나의 노역
베고 또 베어 버려도 벌판은 남아 있고
지난날의 쓸쓸함도 거기 어디 남아 있고
등에 얹은 볏가마니는
지고 가야 할 나이보다 무거웠다
먼지를 털며 올려다보는 새털구름 밑으로
하늘은 배고픔처럼 어두워오는데
시간은 나를 앞질러 갈 만큼 간 걸 알겠다
돌아오는 거리에서 마른 구역질을 하고
공연히 주먹을 쥐었다 펴곤 했다
내일은 소장수 백씨네 아랫텃논
마당질을 끝내러 가야 한다
호박잎을 걷어낸 양철지붕 위에서
바람이 떼를 지어 붉은 녹을 걷어차며
종점 빈터로 몰려가는 늦가을 저녁
- 졸시 <들일> 전문
문학적 진실이 삶의 진실에서 우러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시로 제대로 형상화되지 못해 삶도 시도 어설픈 채 겉돌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를 썼지만 그래서 발표하지 못한 채 처박아 두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캐비닛에 들어 있는 원고더미들을 꺼내 마당에다 옮겨 쌓았습니다. 대학 때부터 머릴 싸매고 대들었다는 원고의 초고더미들을 쌓아놓고 거기에다 불을 질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지나가다 그걸 보시고는 놀라며 왜 그걸 그냥 태워 내버리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원고지에 붙은 불을 끄더니 뒤란으로 가져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무 말을 못하고 멍하니 어머니를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더니 어머니는 뒷마당 화덕 밑에다 그것들을 넣으시는 겁니다. 화덕에다 그날 저녁에 먹을 죽을 끓이고 있었는데 죽 끓일 불쏘시개를 하시는 겁니다. 죽 한 솥을 다 끓이신 어머니는 “거 봐라 죽 한 솥 다 끓일 수 있는데 왜 아깝게 그냥 태워 내버리니” 하시는 거였습니다. 가장 절망스럽게 보낸 날들의 흔적, 가장 몸부림치며 보낸 문학청년기의 얼룩들도 죽 한 솥 끓여 먹고 나니 흔적이 없었습니다.
도종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