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대신 욕망 - 욕망은 왜 평등해야 하는가
김원영 지음 / 푸른숲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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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우리 동네에 새로 생긴 편의점이 있다. 그다지 목이 좋다고는 할 수 없다. 물론, 아주 안 좋은 건 아니다. 그러나 그 편의점이 생기기 전에는 일부러 길을 건너 거기까지 가서 무언가를 살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편의점이 생기고 난 후, 마음이 바뀌었다. 나는 가까운 편의점을 놔두고 일부러라도 그곳까지 가서 무언가를 사 먹는다. 무엇보다 넓은 공간에, 앉아서 무언가를 먹을 수 있는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곳이 동네의 다른 편의점과 마찬가지로 좁은 통로에 서서 먹어야만 하는 자리만 있었다면, 나는 일부러 발품을 팔거나, 길을 건너는 수고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금만 애를 쓰면, 아주 편하게 먹을 수 있고, 다양하게 골라서 먹을 수 있는 공간이 있기에 나는 그곳을 자주 애용하게 된다. 할인카드가 적용된다는 점도 좋고.

 

 

2.

 

아이들이 미래에 인공지능 개발자가 되기를 꿈꾼다면 이는 '장래희망'이지만, 3백 억을 모아 강남에 아파트 12채를 사겠다고 하면 '(장래) 욕망'으로 분류될 것이다. 평생 돈을 모아 아파트를 사고 4인 가족을 이뤄 손주까지 본 뒤 조용히 삶을 마감하겠다는 꿈은, (현대사회에서 무척이나 이루기 어려움에도) 보통은 희망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 그 꿈은 누구도 위협하지 않으며 평생 인구를 재생산하고 아파트를 사기 위해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의 존재는 사회를 위해서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 p.11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아주 사소한 점에서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기도 한다는 것을 제대로 알아야만 한다. 희망을 이야기하다가도 그 희망에 어떤 이의 슬픔이나 아픔을 무릅쓰고 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희망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욕망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그 욕망을 나쁘게 보면 한없이 나쁘겠지만, 저마다의 욕망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시작하면 사람의 욕망은 희망이 된다. 내가 말한 저 위의 편의점은 갈 때마다 항상 사람이 끊임없이 들어온다. 나처럼 일부러 발품을 팔아야 하는 지역에 있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길 하나만 건너는 수고만 하면 되는 곳이다. 요즘은 길 하나 건너는 곳에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대박과 쪽박이 갈리기도 하는 걸 보면, 그 편의점의 마케팅은 분명 성공지점에 있는 듯하다.

욕망도 마찬가지다.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사람의 마음을 알아줘야 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이기적 쾌락을 위한 욕망만을 채우고자 하는 사람은 결국 그 욕망으로 인해 쪽박을 차야 하는 불운을 겪을 것이다. 우리의 욕망은 정당해져야 하고, 우리의 욕구는 정당하게 해소되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서 대체된 희망의 웃음이 우리 사회에 울려 퍼지게 될 것이다.

 

 

3.

 

희망 대신 욕망은 장애가 있는 변호사가 이미 10년 전에 쓴 글이다. 미안하다. 나도 리뷰를 쓰다 보니, "장애가 있는" 이라는 말을 써 버렸다. 이 말을 안 하고 "장애가 있는”"장애가 없는이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어서 왔으면 좋겠다. 그런데 나도 어쩔 수 없이 썼다. 이 책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이 책은 장애에 대한 극복기"장애를 극복한 사람에 대한 처절한 에세이도 아니다. 그냥, "나 장애 있다! 그래서, 뭐 어쩔 건데?” 라고. "나를 동정하지 말라고!” 정도의 그냥 보통사람이 쓴 글이다. 그렇다. 장애를 동정해야 할 대상이나, 장애를 극복해야 할 어떤 치열한 싸움의 존재로 보지 않을 때, 장애인과 비장애인과의 차별이나 차이 같은 건 사라질 것이다. 그대가 장애인을 당신보다 낮은 존재로 보고 그들을 보면서 우월감을 느낄 때, 당신은 그 순간, 당신이야말로 동정 받아야할 불쌍한 존재가 된다.

 

 

 

", 오늘 선생님한테 혼나서 정말 짜증났는데 나는 저 아이처럼 태어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이야라고 중얼거릴 것만 같았다. 그렇다. 나는 빼도 박도 못하는, 바닥을 지나가던 바로 그 장애인이었다.

- p.33

 

슈퍼 장애인이 되어야 할 내가 모욕감을 느껴 좌절한다면 자격 미달이 아니겠는가. 나는 모욕에 익숙해져야 했다. 장애인은 모욕을 견딜 수 있는 강력한 정신력을 갖추어야 한다. 사람들은 "그걸 모욕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런 이야기를 할 때는네 장애를 생각해볼 때 그건 모욕이 아니다'라는 의미인지, 그건 누구에게도 모욕적이지 않다는 뜻인지 곰곰이 따져봐야 한다. 만약 전자라면 장애인이 모욕을 감수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를 대야 할 것이다.


- pp.124~125

 

 

3.

 

얼마 전 신문을 보니, 장애인을 교육할 수 있는 특수학교를 짓는데 주민들의 반발로 늦어지고 있다는 소식에 씁쓸한 마음을 가진 적이 있다. 이유를 보니, 내가 장애인이었다면 상처받았을 내용들이다. 사람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기보다는 그저, 장애인에 대한 편견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내가 이해하긴 힘들다. 그분들의 마음속에는 분명 우월감이 자리 잡고 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나의 짧은 공감능력이 아쉽기만 하다.

 

이제 더 이상 장애는 누군가의 배려로 간신히 극복할 수 있는 개인의 슬픈 비극이 아니다. 장애인은 병원이나 수용시설에서 살아가야 할 '환자'가 아니라, 그 상태 자체가 하나의 존재를 구성하는 정체성이 된다. 그러므로 장애인도 세계 속에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살아갈 주체적인 권리를 갖는다.

이렇게 장애를 사회적 모델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장애인들을 사회로부터 분리하지 않고 통합해야 한다는 것, 치료사나 사회복지사의 지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 장애가 단지 개인이나 가족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공동으로 노력해야 할 문제라는 것 등이 전 세계 장애인 운동과 사회과학 연구들이 성취한 장애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었다.


- p.158

 

저자가 장애인으로 겪는 삶의 애환점과 그가 펼치는 주장들에 백배공감하면서 장애인들을 돌보아야 하는, 그래서 비장애인이 우월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로만 인식한다면, 우리 사회의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4.

 

만약 세상에 장애인 수용시설 같은 것이 없었다면 열등감에 시달리는 우리 20대들은 어디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러한 충고는 커다란 결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열등감은 상대와의 비교에서 오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존재들에 의존해서, 그 열등감을 상쇄해 보려 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태도는 자신을 그 자체로 충만하게 만들지 못하고, 타인의 존재에 의지해 열등감을 극복하려 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타인에 의해 열등감을 경험하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타인의 존재를 통해 위안을 얻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그 위안을 얻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바로 비정상적인 인간을 '구경'하는 것이다.


- p.210

 

오래 전의 일이다. 이런 사진과 글이 있었다. 아주 가난하고 먹지도 못하는 아프리카 난민을 보면서 우리는 그래도 행복한 거 아니냐는 취지의 글이었다. 나는 그 글에 이런 취지의 답변을 남겼다. 누군가와 비교해서 우리가 행복한 거라면, 결국은 우리는 우리보다 더 잘사는 사람을 보면 불행해지는 거 아니냐고. 그리고 그렇게 가난하고 못 먹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우리보다 더 행복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비교에 의한 행복은 결국은 불행해질 뿐이라고.

 

이런 취지의 답글을 남겼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정확히 어떤 식으로 문장을 전개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찌되었든, 비교에 의한 행복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만약, 장애인을 보면서, 나는 저렇지 않으니 그래도 행복하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순간 당신은 장애인에게 상처를 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길 바란다. 그리고 난 당신에게 이런 저주의 말을 할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떤 식으로든,  이제 곧 불행해지겠군요."

  

장애를 가진 모든 사람이 일상에서 절절히 경험하고 있듯이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휠체어 리프트의 음악 소리, 남녀가 공동으로 사용해야 하는 화장실, 휘황찬란한 현수막을 걸어놓고 시행되는 주민자치센터의 쌀 전달식 등은 누누간의 자존감에 상처를 낸다. 장애인을 앞에 놓고 구원 이후에는 완전한 육체로 살 수 있을 거라 설교하는 종교인이나 방송에 나와 "내가 너를 걷게 하겠다라고 주장하는 과학자의 말 역시 내 존재의 가치를 미래의 구원에 맡겨야 한다는 의미나 다름없어 나를 침울한 열등감에 빠뜨린다.

이 모든 것은 선량하고 숭고한 외피로 둘러싸여 있지만 사실 "너의 안쓰러움을 내 능력으로 감싸 안고 싶다라는 자기 우월성의 쾌락에서 촉발되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선량한 의도에서 출발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요즘 너무 살기 힘들다라는 친구의 고백에 "꽃동네에 가서 장애인들들 보고 오면 힘이 날 것이다라고 충고해주는 사람들은 명백히 누군가를 모욕하는 것이지만,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인간들을 만나 자기 존재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것은 너무나 큰 유혹이다.

 

- pp.212~213

 

 

5.

 

나는 어쩌다 보니, 우연히 장애인과 관련된 기관에서 계속 일하고 있다. (이 리뷰를 쓸 당시에는 장애인직업재활센터에서 근무했다) 지체 장애인도 간혹 있고, 발달장애인, 정신장애인 등, 장애인들을 많이 보아왔다. 나는 그 친구들의 순수한 마음이 좋지만, 이조차도 그냥 어쩌다보니 순수한 마음을 가진 친구들만 만나게 되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적어도 장애인 중에서,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만나진 못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가끔, 장애인들이 자기를 괴롭힐 거라 생각하는 듯한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 나름대로 이유야 있겠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현실이다.

 

나는 '장애인 치고는' 멋있는, 이라는 말을 거부한다. 나는 장애인 치고는 멋있기 위해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멋지고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뜨겁기 위해 무대 위에 섰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이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역시 '장애인 치고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 혹은 '장애인 치고는'멋진 말을 늘어놓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멋질 수 있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매력적일 수 있는 어떤 메시지를 위해 이 글을 쓴다.

 

- pp.305~306

 

 

장애인으로서의 처절한 외침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의 당연한 외침이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다짐했던 순간을 반성한다. 나는 장애인을 위해 살려고 결심했지만, 그것은 나의 우월감이 빚어낸 착오였다. 오히려 장애인 친구들이 힘들어하는 나를 위로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그런 친구들과 함께 계속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는 것이 나의 도리가 아니다. 그저, 그 친구들과 같이 숨 쉬고 함께 즐기며 그러다가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함께 상의하고 나아가는 것이 나의 길이 아닐까. 나를 위로해주던 장애인들을 생각하면서 나를 생각의 폭풍 속으로 몰아넣었던 희망 대신 욕망은 그렇게 무너져 가려던 희망을 욕망이란 구체적인 현실성으로 다가갔다. 나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꿈꾼다.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결코 서로에게 불편하지 않은 그런 사회. 함께 꿈꾸며 나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마음을 다한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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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평온한 내가 되기

 

사람들의 말에, 마음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내게 하는 행동들 때문에, 나의 하루가 온전치 않은 적도 있었다. 모든 것이 사람들 때문에, 사람들의 영향으로, 나의 삶을 좌지우지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나의 순간적인 기분을 왔다 갔다 하게 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내 삶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지는 않는다. 기분은 금방 회복되며, 내 마음은 평온해진다.

 

내 마음이 평온해진 것이 언제였던가. 내 마음이 사람들에 의해 휘둘리지 않음은 언제부터였던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게 되었고, 교회를 빠지지 않고 다니던 어느 순간부터였다. 언제나 불안에 시달리던 나의 하루가 이제는 만족과 편안함으로 바뀌었다.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 마음엔 아직도 분노가 존재하며,나는 아직도 너그러운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의 평온>이란 작은 변화가 내 삶에 일어났기에 언젠가 나는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태어날 것이라 믿는다. 그것이 당장은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끊임없이 책을 읽고, 끊임없이 명상하며, 끊임없이 성경을 읽고, 쉬임없이 기도하다 보면 언젠가 <예수님과 함께하는 그곳>에 나도 함께 있을 것이라 믿는다.






04. 모든 이들에게

 

매일 불평을 늘어놓는 어떤 사람이 있다. 때로 그의 말은 나를 불쾌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주기도 한다. 그는 교회에 불만이 생겨 더 이상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가슴 아파하겠지만,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감사할 것이다. 그가 나를 불쾌하게 해서 내가 더 단련될 수 있음에 감사하고, 결국은 그렇게 불만을 쏟아내던 그 사람도 언젠가는 다시 예수님 품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감사하다. 아픔은 나를 더 성장시킨다.

 

예수님은 항상 감사해 하셨다.

  

오늘은 비록 힘들지만, 내일을 향한 꿈이 있기에, 오늘 행복했고, 감사했다. 꿈은 계속해서 꾸어야 하기에, 절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 말도 있지만, 그 말은 꿈을 이룬 다음의 일이다. 목표 자체에 목표를 둔다면 꿈은 이루어지지 않지만, 목표로 향해 가는 과정, 그 과정의 즐거움에 초점을 맞춘다면 꿈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오늘도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오늘 하루의 소중한 경험을 해준 그들에게 감사하며, 내일 만날, 그리고 앞으로 만날 모든 이들에게 감사드린다.








05. 존중하는 법을 배운다


 

때로는 어떤 일에 지나치게 신경 쓸 때가 있다. 절제를 해야 하는데, 라는 마음뿐, 실제로는 절제를 못해 도를 지나칠 때, 그럴 때 예수님을 생각한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뜻대로 조종하려 애쓰지 않았다. 대신, 예수님 스스로의 에너지를 발산함으로서 사람들 스스로가 예수님을 따르도록 하였다.

  

언제부턴가 다른 사람의 삶에 관여하지 않게 되었다. 잘못이든, 잘못하지 않든, 그것은 그의 삶이다. 마찬가지로, 내 삶도 간섭받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누군가의 간섭이 진정한 관심인 적은 별로 없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간섭은 그냥 간섭일 뿐이다. 대신, 존중하는 법을 배운다. 그 사람을 존중하는 방법이 반드시 관심인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하시는 데에 에너지를 소비하셨다. 예수님을 바라는 자들에게만 관심을 보이셨다.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지 않는 자들에게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서 "사랑을 주셨다. 그렇게 함으로서 관심 없던 사람들까지도 관심을 가지게 하셨다. 그것이 예수님의 죽음이고, 위대한 탄생이었다.

 

역사에서는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 보일지 몰라도, 현실에서는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예수님과 닮은 사람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는 참견이나 간섭이 아닌 인류애를 지닌 사랑을 보이는 사람. 그런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힘들다. 우선, 나부터 그렇게 되기 어렵다.

 

나의 에너지 원천은 어디에 있는가.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예수님이다. 나를 여태까지 먹여 살리시고, 나를 여태까지 돌봐주신 예수님이 내 에너지의 원천이다.

 

"아버지(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의)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한복음 18:11)

 

고난의 잔을 마신 예수님의 힘으로 나는 지금껏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고난의 잔을 내가 마시진 못했지만, 나의 고난에 예수님이 함께 했으며 또 앞으로 있을 고난의 잔에 예수님이 함께함으로 내가 평안해짐을 감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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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빛나는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고 슬퍼하는 모든 영혼에게
이청안 지음 / 레몬북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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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빛나는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평온함을 응원한다.

 

 

 

1.

 

우리는 많은 순간사랑 때문에 또 때로는 사람 때문에 아프다우리는 아프기 때문에그 아픔을 어떻게든 해소하고 승화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노력을 기울이는 데 특별한 이유는 없다그저아프기 때문에너무 아프기 때문이다.

 

 

2.

 

가장 빛나는 순간은 오지 않았다는 사랑과 사람에 관한 에세이다이 에세이를 읽다 보면아픈 순간이 생각나기도 하지만그렇기에 그 아픈 순간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그 아픈 순간을 위로해주는 이상한 매력이 있다이 에세이는 그만큼 편안하고또 때로는 아름답기도 하다.

율마를 살리기 위해서 엄마에게 보내야 했던 저자의 선택군대 말년에 시간에 좀처럼 안 간다며 면회를 와 달라고 했던 동생을 보며 군대 간 이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저자의 마음스쿼시를 하다가 손목에 힘을 빼야 한다는 코치의 말씀에 손목에 힘을 빼려고 노력하다가 더 힘이 들어 앓아누운 후 깨닫게 되는 저자의 생각.

 

힘을 빼고끝까지 보고제대로 쌓아나가야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그렇지 않으면 엉망진창이 된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한 번쯤 다시 생각해봐야겠다내가 너무 힘을 주지 않았는지끝까지 보지도 않고 서툰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는지제대로 고조시키면서 쌓아 올려 나간 것이 맞는지. - p.73

 

그렇다힘을 빼고 끝까지 나아가자많은 순간순간들이 힘을 너무 주어서 끝까지 완주하지 못한다인생에서 힘을 빼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걸까힘을 조금 빼어서 긴장도 조금은 완화시키고슬픔도 기쁨도 적당히 선을 그어가면서 적절히 살아간다면우리는 많은 위기의 순간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3.

 

강렬한 사랑은 판단하지 않는다주기만 할 뿐이다.” - p.128

 

가장 빛나는 순간은 오지 않았다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그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는 이별에 대해 얘기하면서 자신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2부 바람이 불지 않는 이별이란 없었다에서는 주로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3부 가장 빛나는 순간은 오지 않았다에서는 삶의 희락에 관해 이야기한다물론이렇게 정리한 것은 전체적인 총평이지모든 챕터들이 다 그렇게 쓰였다는 야그는 아니다가족에 관한 이야기사랑에 관한 이야기직장에 관한 이야기 등다양한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재미도 있지만무엇보다 편안한 이야기들이 마음에 와 닿는다중간 중간 삽입된 사진들은 책을 읽는 재미와 편안함을 더해준다.

 

 

 

4.

 

- 새 사진 -


 

새가 서 있는 모습이 너무 귀엽고 또 평화로워서 삽입해보았다정말우리는 평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이 책이 그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는데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평화로운 느낌을 받았으니까그렇게 되지 않을까특히이 새가 있는 사진을 보면서 내 마음은 조금 더 평온해졌다.

 

 

5.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아니야 결과가 좋지 않아도 돼.

 

열심히 해!

아니야뭐든 열심히 하지 않아도 돼하고 싶은 걸 해.

 

좌절하지 마!

+아니야최선을 다했다면 가끔은 좌절하는 게 당연해.

 

다시 일어서야 해!

+당장 일어나지 않아도 돼조금 쉬어가도 돼.

 

하지만 말이야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지금 해하려고 해봐그게 뭐든 너의 삶이 채워질 수 있다면응원할게.

 

- p.243

 

응원한다나의 삶도 이 글을 보는 그대와 당신의 삶도언젠가 이루어질 우리의 축복도모두 응원의 끝에서 편안한 삶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길또한희망찬 하루하루가 되기를우리 모두의 축복은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 출판사에서 도서를 증정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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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는데 뭐라도 되고 있었다
김지희 지음 / 자화상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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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는데 뭐라도 되고 있었다] 그냥

 

 

1.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은, 마음에 드는 부분을 체크해 두었다가 복사를 해 버린다. 이전에는, 일일이 손글씨로 옮겨 담았는데, 분량이 많을 때는 그 작업이 만만치 않아 손쉽게 복사를 하고 제본기로 와이어철을 해놓는다. 이런 작업이 이전에는 귀찮게 느껴졌었는데, 지금은 즐겁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나름 나의 책장들이 도서관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정말, 뭐라도 되고 있는 중이었다. 나의 독서와 리뷰도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느껴지지만, 언젠가는 뭐라도 되겠지. 그렇지, 나는 지금 뭐라도 되고 있는 중이다.

 

 

2.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는데 뭐라도 되고 있었다는 에세이다. 그저, 일상에서 떠오른 생각들을 정해 놓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에세이다. 그 에세이에서 발견되는 소소한 기쁨이 나를 또 행복하게 한다.

 

세상은 늘 모자란 것투성이인 것 같다.어릴 적 최고의 디저트, 요구르트는 늘 딱 한 모금이 아쉬웠고, 수능 점수는 원하던 대학의 커트라인보다 조금 모자랐다. 연인에게 기대한 사랑 역시도 맘 놓고 누리기엔 부족했으며, 꿀 같은 여행 일정도 늘 원 없이 즐기기엔 모자랐다.

그러나 이제와 돌아보면, 치아가 상하지 않을 만큼의 충분함이었고, 실력은 되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았을 뿐이라고 위안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점수였다. 세상 모든 것이 '기브 앤드 테이크'가 아니라는 걸 배울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사랑이었고, 여행의 권태에 빠지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시간이었다.

결국에 되돌아보니, 조금 모자라서 좋았다.

- p.051

 

모자란 것투성이인 세상에, 나의 욕심을 늘어놓는다. 아쉬운 점, 조금 더 했으면 좋았을 것, 조금 더 가졌으면 좋았을 것들. 그런데, 그 아쉬운 만큼이 있어서 좋았다는 것. 돌아보면, 그렇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좋은 책을 읽고 나면, 뭔가 더 보고 싶은데, 더 있었으면 좋겠는데,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쩌면 딱 그만큼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고, 영화도 역시 뭔가 아쉬움이 드는 만큼의 재미가 있는 딱 그만큼이 좋은 것이다.

 

 

3.

 

'그냥'이 가장 기피하는 것은 집요한 캐물음이다. 그리고 그중 가장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분야는, 누군가의 '변덕'에 대해서다.

그 남자를 그리도 원망하더니, 왜 다시 만나게 됐는지. 그 의견을 핏대 세워 반대하더니, 왜 갑자기 입장을 바꾸었는지. 그 사람을 그토록 싫어하더니, 왜 부쩍 가까워지게 됐는지.

그가 먼저 나서서 설명해주지 않았다면, 그건 자신조차도 그 이유를 모르고 있다거나, 그 이유라는 것이 대단히 복잡 미묘하기 때문이다. '그냥, 그럴 만했겠지.'하며 그 변덕을 안아주기로 하자.

- 240

 

그냥에 대한 에피소드는 앞 페이지에 더 있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생략해 본다. 왜냐고 묻는다면, 역시 '그냥'이라고 답하는 수밖에. 그냥이란 미묘한 말. 알 수는 없지만, 왠지 닦달하면 안 될 것만 같은 말. 그냥. 어떤 책이 왜 좋을까, 물을 때 그냥, 이라고 대답하면 뭐라고 말할까. 정말, 책이 그냥 좋을 수 있다면, 그건 정말로 그 책이 좋았던 거 아닐까. 정말, 그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책이 있는 걸까. 아낌없이 내 모든 걸 내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 같은 책.

 

 

 

 

4.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소소한 것들에 내재된 에너지를 믿는 편이다. 거창하고 수려한 문장보다는 수한 몇 음절이 선사하는 뜻밖의 영감에 환호하는 편이다. 이 책은, 일상에서 마주한 단어들, 그 단어를 디딤돌 삼아 펼쳐본 잡다한 생각들에 대한 끼적임이다. 그러니, 가급적 늘어진 자세로 대수롭지 않게 읽어주기를. 정제된 책상머리보다는 뜨끈한 방바닥이, 유기농 샐러드보다는 바스락거리는 봉지 과자가 이 책과 합을 맞추기를. 그런 느슨한 시간 속에서, 우리의 평범한 일상도 고유한 빛깔을 드러낼 수 있길 고대해본다.

지금 이 시간, 그대의 11.

그래 아무것도 아닐 리 없다, 뭐라도 되고 있을 것이다.

- p.299

 

작가의 이 말처럼 나는 느슨하게, 여유롭게 뒹굴거리면서 이 책을 읽었다. 아쉽게도 과자 봉지는 없었지만, 그 시간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소소한 기쁨이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는데 뭐라도 되고 있었다에 있었다. 이 책을 읽는 시간들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나의 11. 그저, 스쳐가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순간이 쌓이고 쌓여서, 나는 뭐라도 되어가고 있다. 자그마한 일상 속에서, 자그마한 단어들의 묘미를 발견하는 것처럼 나의 조그만 일상도 책 속의 여유를 찾으며, 조금씩 달라져 가고 있다. 그 끝엔, 더 큰 기쁨이 있겠지. 더 많은 에피소드를 담을 수 없어 아쉽지만, 나의 와이어철 속에 담긴 책장 속 작은 기쁨이 더 많은 행복을 줄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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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바람 1예수님 마음

 

 


 

프롤로그

 

나는 최고경영자가 아니다. 그래서 최고경영자가 사람들을 섬기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그런 마음이 없다면 최고경영자가 되기는 쉽지 않았을 거라 생각할 뿐이다. 물론, 예외가 없다는 건 아니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면, 언젠가는 나도 최고경영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최고경영자란 의미가 꼭 기업체의 사장인 것만은 아니다. 나 자신을 경영하여 나 자신이 세상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최고경영자가 아닐까.

 




01. 언젠가는 나도

 

예수님을 통해 처음 나는 사랑받는 존재임을 알았고 예수님을 통해 처음 나는 섬김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배웠다. 다만, 그 섬김이 실천에 이를 때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 인내를 해야겠지만.

 

예전에는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내 마음 속에 두려움 대신 예수님이 있다. 그래서 지금은 두렵지 않다. 내가 이렇게 마음 놓고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그래서 내 글을 공개하는 것도 두렵지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 내 삶의 최고경영자 되어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기를 기도하며






02. 천국에

 

때로는 내가 무언가를 할 때,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품기도 한다.할 수 없지 않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할 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한 번 해보라.”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다.

남자와 여자의 몸이 섞이지 않은 동정녀에게서 예수님이 탄생하는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과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는 죄에서 온전한 사함을 받았다. 예수님은 태어나셨을 때부터 기적을 일으킨 몸이었고, 살아 계셨을 때도 기적을 일으키셨고 그리고 죽음 이후에도 기적을 일으키셨다. 그야말로 기적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도 기적을 일으키신다. 돌이켜보면, 그분의 도움 없이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분이 계셨기에, 나는 아직 살아있고, 또 꿈을 꿀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이 일으킨 기적을 믿기에, 나는 또 내게 일어날 기적을 믿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 모든 기적을 다 행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셨다. 살아서는 인간의 몸이시지만, 하늘에 오르셔서는 하나님 보좌에 앉아계신 예수님. 그분은 우리에게 천국을 보여주기 위해 손짓하고 계신다. 또 다른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준비하고 계신 것이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살아있는 곳이 지옥같이 느껴진다면, 죽음 이후에 갈  있는 천국을 소망으로 품을 것이다. 그 천국이 있다고 믿기에 나는 오늘 행복하다. 무언가를 할 때의 두려움은 천국에 대한 소망과 함께 사라진다.

 

"한번 해 보라

 

그리고 못해낼 것 같은 어떤 일을 어느 순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 또 기적을 일으키셨구나, 라며 감사의 기도를 한다.

 

, 승리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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