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희망 대신 욕망 - 욕망은 왜 평등해야 하는가
김원영 지음 / 푸른숲 / 2019년 4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우리 동네에 새로 생긴 편의점이 있다. 그다지 목이 좋다고는 할 수 없다. 물론, 아주 안 좋은 건 아니다. 그러나 그 편의점이 생기기 전에는 일부러 길을 건너 거기까지 가서 무언가를 살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편의점이 생기고 난 후, 마음이 바뀌었다. 나는 가까운 편의점을 놔두고 일부러라도 그곳까지 가서 무언가를 사 먹는다. 무엇보다 넓은 공간에, 앉아서 무언가를 먹을 수 있는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곳이 동네의 다른 편의점과 마찬가지로 좁은 통로에 서서 먹어야만 하는 자리만 있었다면, 나는 일부러 발품을 팔거나, 길을 건너는 수고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금만 애를 쓰면, 아주 편하게 먹을 수 있고, 다양하게 골라서 먹을 수 있는 공간이 있기에 나는 그곳을 자주 애용하게 된다. 할인카드가 적용된다는 점도 좋고.
2.
아이들이 미래에 인공지능 개발자가 되기를 꿈꾼다면 이는 '장래희망'이지만, 3백 억을 모아 강남에 아파트 12채를 사겠다고 하면 '(장래) 욕망'으로 분류될 것이다. 평생 돈을 모아 아파트를 사고 4인 가족을 이뤄 손주까지 본 뒤 조용히 삶을 마감하겠다는 꿈은, (현대사회에서 무척이나 이루기 어려움에도) 보통은 희망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 그 꿈은 누구도 위협하지 않으며 평생 인구를 재생산하고 아파트를 사기 위해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의 존재는 사회를 위해서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 p.11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아주 사소한 점에서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기도 한다는 것을 제대로 알아야만 한다. 희망을 이야기하다가도 그 희망에 어떤 이의 슬픔이나 아픔을 무릅쓰고 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희망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욕망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그 욕망을 나쁘게 보면 한없이 나쁘겠지만, 저마다의 욕망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시작하면 사람의 욕망은 희망이 된다. 내가 말한 저 위의 편의점은 갈 때마다 항상 사람이 끊임없이 들어온다. 나처럼 일부러 발품을 팔아야 하는 지역에 있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길 하나만 건너는 수고만 하면 되는 곳이다. 요즘은 길 하나 건너는 곳에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대박과 쪽박이 갈리기도 하는 걸 보면, 그 편의점의 마케팅은 분명 성공지점에 있는 듯하다.
욕망도 마찬가지다.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사람의 마음을 알아줘야 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이기적 쾌락을 위한 욕망만을 채우고자 하는 사람은 결국 그 욕망으로 인해 쪽박을 차야 하는 불운을 겪을 것이다. 우리의 욕망은 정당해져야 하고, 우리의 욕구는 정당하게 해소되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서 대체된 희망의 웃음이 우리 사회에 울려 퍼지게 될 것이다.
3.
『희망 대신 욕망』은 장애가 있는 변호사가 이미 10년 전에 쓴 글이다. 미안하다. 나도 리뷰를 쓰다 보니, "장애가 있는" 이라는 말을 써 버렸다. 이 말을 안 하고 "장애가 있는”"장애가 없는”이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어서 왔으면 좋겠다. 그런데 나도 어쩔 수 없이 썼다. 이 책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이 책은 “장애에 대한 극복기”도 "장애를 극복한 사람에 대한 처절한 에세이”도 아니다. 그냥, "나 장애 있다! 그래서, 뭐 어쩔 건데?” 라고. "나를 동정하지 말라고!” 정도의 그냥 보통사람이 쓴 글이다. 그렇다. 장애를 동정해야 할 대상이나, 장애를 극복해야 할 어떤 치열한 싸움의 존재로 보지 않을 때, 장애인과 비장애인과의 차별이나 차이 같은 건 사라질 것이다. 그대가 장애인을 당신보다 낮은 존재로 보고 그들을 보면서 우월감을 느낄 때, 당신은 그 순간, 당신이야말로 동정 받아야할 불쌍한 존재가 된다.
"아, 오늘 선생님한테 혼나서 정말 짜증났는데 나는 저 아이처럼 태어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이야”라고 중얼거릴 것만 같았다. 그렇다. 나는 빼도 박도 못하는, 바닥을 지나가던 바로 그 장애인이었다.
- p.33
슈퍼 장애인이 되어야 할 내가 모욕감을 느껴 좌절한다면 자격 미달이 아니겠는가. 나는 모욕에 익숙해져야 했다. 장애인은 모욕을 견딜 수 있는 강력한 정신력을 갖추어야 한다. 사람들은 "그걸 모욕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런 이야기를 할 때는‘네 장애를 생각해볼 때 그건 모욕이 아니다'라는 의미인지, 그건 누구에게도 모욕적이지 않다는 뜻인지 곰곰이 따져봐야 한다. 만약 전자라면 장애인이 모욕을 감수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를 대야 할 것이다.
- pp.124~125
3.
얼마 전 신문을 보니, 장애인을 교육할 수 있는 특수학교를 짓는데 주민들의 반발로 늦어지고 있다는 소식에 씁쓸한 마음을 가진 적이 있다. 이유를 보니, 내가 장애인이었다면 상처받았을 내용들이다. 사람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기보다는 그저, 장애인에 대한 편견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내가 이해하긴 힘들다. 그분들의 마음속에는 분명 우월감이 자리 잡고 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나의 짧은 공감능력이 아쉽기만 하다.
이제 더 이상 장애는 누군가의 배려로 간신히 극복할 수 있는 개인의 슬픈 비극이 아니다. 장애인은 병원이나 수용시설에서 살아가야 할 '환자'가 아니라, 그 상태 자체가 하나의 존재를 구성하는 정체성이 된다. 그러므로 장애인도 세계 속에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살아갈 주체적인 권리를 갖는다.
이렇게 장애를 사회적 모델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장애인들을 사회로부터 분리하지 않고 통합해야 한다는 것, 치료사나 사회복지사의 지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 장애가 단지 개인이나 가족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공동으로 노력해야 할 문제라는 것 등이 전 세계 장애인 운동과 사회과학 연구들이 성취한 장애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었다.
- p.158
저자가 장애인으로 겪는 삶의 애환점과 그가 펼치는 주장들에 백배공감하면서 장애인들을 돌보아야 하는, 그래서 비장애인이 우월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로만 인식한다면, 우리 사회의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4.
만약 세상에 장애인 수용시설 같은 것이 없었다면 열등감에 시달리는 우리 20대들은 어디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러한 충고는 커다란 결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열등감은 상대와의 비교에서 오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존재들에 의존해서, 그 열등감을 상쇄해 보려 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태도는 자신을 그 자체로 충만하게 만들지 못하고, 타인의 존재에 의지해 열등감을 극복하려 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타인에 의해 열등감을 경험하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타인의 존재를 통해 위안을 얻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그 위안을 얻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바로 비정상적인 인간을 '구경'하는 것이다.
- p.210
오래 전의 일이다. 이런 사진과 글이 있었다. 아주 가난하고 먹지도 못하는 아프리카 난민을 보면서 우리는 그래도 행복한 거 아니냐는 취지의 글이었다. 나는 그 글에 이런 취지의 답변을 남겼다. 누군가와 비교해서 우리가 행복한 거라면, 결국은 우리는 우리보다 더 잘사는 사람을 보면 불행해지는 거 아니냐고. 그리고 그렇게 가난하고 못 먹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우리보다 더 행복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비교에 의한 행복은 결국은 불행해질 뿐이라고.
이런 취지의 답글을 남겼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정확히 어떤 식으로 문장을 전개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찌되었든, 비교에 의한 행복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만약, 장애인을 보면서, 나는 저렇지 않으니 그래도 행복하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순간 당신은 장애인에게 상처를 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길 바란다. 그리고 난 당신에게 이런 저주의 말을 할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떤 식으로든, 이제 곧 불행해지겠군요."
장애를 가진 모든 사람이 일상에서 절절히 경험하고 있듯이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휠체어 리프트의 음악 소리, 남녀가 공동으로 사용해야 하는 화장실, 휘황찬란한 현수막을 걸어놓고 시행되는 주민자치센터의 쌀 전달식 등은 누누간의 자존감에 상처를 낸다. 장애인을 앞에 놓고 구원 이후에는 완전한 육체로 살 수 있을 거라 설교하는 종교인이나 방송에 나와 "내가 너를 걷게 하겠다”라고 주장하는 과학자의 말 역시 내 존재의 가치를 미래의 구원에 맡겨야 한다는 의미나 다름없어 나를 침울한 열등감에 빠뜨린다.
이 모든 것은 선량하고 숭고한 외피로 둘러싸여 있지만 사실 "너의 안쓰러움을 내 능력으로 감싸 안고 싶다”라는 자기 우월성의 쾌락에서 촉발되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선량한 의도에서 출발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요즘 너무 살기 힘들다”라는 친구의 고백에 "꽃동네에 가서 장애인들들 보고 오면 힘이 날 것이다”라고 충고해주는 사람들은 명백히 누군가를 모욕하는 것이지만,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인간들을 만나 자기 존재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것은 너무나 큰 유혹이다.
- pp.212~213
5.
나는 어쩌다 보니, 우연히 장애인과 관련된 기관에서 계속 일하고 있다. (이 리뷰를 쓸 당시에는 장애인직업재활센터에서 근무했다) 지체 장애인도 간혹 있고, 발달장애인, 정신장애인 등, 장애인들을 많이 보아왔다. 나는 그 친구들의 순수한 마음이 좋지만, 이조차도 그냥 어쩌다보니 순수한 마음을 가진 친구들만 만나게 되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적어도 장애인 중에서,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만나진 못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가끔, 장애인들이 자기를 괴롭힐 거라 생각하는 듯한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뭐, 나름대로 이유야 있겠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현실이다.
나는 '장애인 치고는' 멋있는, 이라는 말을 거부한다. 나는 장애인 치고는 멋있기 위해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멋지고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뜨겁기 위해 무대 위에 섰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이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역시 '장애인 치고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 혹은 '장애인 치고는'멋진 말을 늘어놓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멋질 수 있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매력적일 수 있는 어떤 메시지를 위해 이 글을 쓴다.
- pp.305~306
장애인으로서의 처절한 외침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의 당연한 외침이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다짐했던 순간을 반성한다. 나는 장애인을 위해 살려고 결심했지만, 그것은 나의 우월감이 빚어낸 착오였다. 오히려 장애인 친구들이 힘들어하는 나를 위로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그런 친구들과 함께 계속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는 것이 나의 도리가 아니다. 그저, 그 친구들과 같이 숨 쉬고 함께 즐기며 그러다가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함께 상의하고 나아가는 것이 나의 길이 아닐까. 나를 위로해주던 장애인들을 생각하면서 나를 생각의 폭풍 속으로 몰아넣었던 『희망 대신 욕망』은 그렇게 무너져 가려던 희망을 욕망이란 구체적인 현실성으로 다가갔다. 나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꿈꾼다.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결코 서로에게 불편하지 않은 그런 사회. 함께 꿈꾸며 나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마음을 다한 바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