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고상한 예수님
*고상하다 : 품위나 몸가짐의 수준이 높고 훌륭하다
나는 그다지 고상한 사람은 아니다. 세속적이며, 욕심도 있고, 때로는 이기적이기까지 하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 입히지 않기만 하면 된다는 아주 최소한의 양심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다지 적극적인 성격도 아니다. 나 자신을 돌보다가 지쳐서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 같은 것은 없었다. 이전에는, 내게 별의별 사건이 다 일어났는데, 다행스럽게도 요즘은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다시 부활하신 사건은 내게 그런 평화를 선물하시려고 일어난 사건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평화스러울 때, 나를 더 단련하고 그리고 더 단단해지기 위한 준비를 하라는 뜻으로, 다시 또 어떤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그것을극복함 힘을 기르라는 뜻이라고, 그렇게 알고 준비하는 자세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읽고 있는 『최고경영자 예수』 한 장 한장 넘길 때마다 새로운 의미들이 다가오고, 그것들을 묵상한다. 내가 고상해지고 싶어서. 성경에 나오는 고상한 요구들이 이 책에 나온다.
- 아브라함의 요구 : 당신을 따르도록 도와 주십시오.
- 모세의 요구 : 당신의 백성들을 자유롭게 하도록 도와 주십시오.
- 다윗의 요구 : 나로 하여금 우리 백성들을 위협하는 골리앗을 쓰러뜨리도록 도와주십시오.
- 에스더 : 나로 하여금 이 백성들을 구하도록 도와 주십시오.
- 솔로몬 : 저에게 이 백성들을 통치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 이사야 : 당신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정결한 입술을 주십시오.
- 베드로 : 당신의 양들을 먹일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 예수 : 저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도록 도와 주십시오.
공통점이 하나 보인다. 모두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 달라 하지 않았다는 것. 백성을 위하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했다는 것. 고상하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닐까. 누군가를 위하는 척 하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을 보여주는 것. 그게 고상한 것 아닌가. 그래서 나도 고상한 삶을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 나의 결심을 도와 줄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믿는다. 나 자신만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 내게는 조금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것이 나의 고백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가능하겠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으니 그건 뭔가 할 일이 있다는 뜻이겠지. 그것이 나만을 위한 삶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하나님께서 이루어가는 세상에, 나도 동참할 것이다. 고상한 것을 구하신 예수님처럼, 나도 고상한 것을 구해 본다.
당신의 사랑을 보여 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10. 사랑합니다, 그것 뿐예요
내가 갖고 있는 자원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이 자원이 사실, 따지고 보면 굉장히 큰 자산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무엇보다, 나는 너무 건강하다. 비실비실 댄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픈 곳이 거의 없다. 하나도 안 아픈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체적으로 건강한 편이다. 그래서 책을 읽을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다. 그것만큼 큰 자산이 있을까. 그럼으로 인해, 나의 강점들을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가 있다. 시간이 내게 주어지면, 책을 읽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쓴다. 예수님에 대해 쓰는 이유. 잘 모르겠다. 그냥 쓰고 싶다. 엔도르핀이 마구 돌아서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로 쓰고 싶다. 이 시간이 너무 행복하다. 쓰고 싶어지면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 쓰고, 쓰고 싶어지면 밤에 좀 더 늦게 자더라도 쓰게 된다. 책을 읽고 싶어지면, 잠을 일찍 깨게 되고, 책을 읽다보면, 벌써 잘 시간이 지난다. 건강이 나를 주체할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 찬송을 부른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그것 뿐예요.
11. 이상하게 보이지만 때로는 알 수 없는 힘이 하나님께 이끌기도 한다
내가 가는 지금 이 길이 과연 맞는 것일까.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운명이라고 느껴지는가.
나는 나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도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믿는다. 처음부터 그것을 믿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아주 "불행"하다고 느꼈던 순간에는 그것이 계획의 일부라고 믿지 않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기도 했다. 정말, 당신이 있는 것이냐고. 있으면, 증거를 대보라고 마음속으로 소리쳐보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날이었다.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는데,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퇴근시간은 2시간 남짓 남은 시간인데, 비가 오다니. 그때 난, 무슨 이유에서인지 만약 이 비를 그치지 않는다면, 당신이 있는 걸 믿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폭탄선언을 했다. 당신을 다시는 절대 믿지 않겠다는, 그야말로 굳은 결심이었다. 비가 그칠 것 같지 않아 보였던 그때, 퇴근하니 비가 거짓말처럼 그쳐 있었다. 아 그때. 만약 비가 내리고 있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고작 비 가지고 그런 서원을 한다는 것이 우스워 보이기도 하겠지만, 가끔은 이유를 알 수 없는 힘이 하나님께로 이끌기도 한다. 만약 그때 그 서원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교회를 다니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세상은 불행한 것이라며, 왜 나 같은 놈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냐며 여전히 세상에 대한 원망을 뿜어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어려움에 처한 나를 버려두지 않으셨고, 그렇게 믿음을 가지게 된 이후에, 지금까지, 아주 조금씩이지만 어제보다 나은 오늘, 그리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어가고 있다.
오늘 나는 운명처럼, 글을 쓰고 있으며, 늦은 공부도 조금씩 하고 있다. 과거에 써 놓았던 글들을 다시 보면서 만족감을 느끼며, 그리고 내가 쓸 글들, 내가 써나갈 미래에 희망을 본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이 길을 가게 하신다. 나는 이 길을 걸어갈 용기가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길을 걷게 할 용기를 주신다. 예수님께서 베푼 사랑이 오늘날의 나에게 희망을 준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절망에 빠져 있는,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는, 그 누군가가 이 글을 보고 희망을 가지게 되기를 바라면서.
12. 예수님에게로
2천여 년 전에 우리에게로 오신 예수님. 사소한 것 하나로 시작된 예수님의 섬세함은 오늘날, 우리에게 천국의 영광을 누리게 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소한 것 하나가 인생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사소한 것 하나가 예수님을 찾게 만들며, 사소한 것 하나가, 새로운 인생을 살게도 한다. 사소한 어떤 것에서 비로소 시작이 되며, 사소한 어떤 것으로 비로소 마무리가 된다.
성경을 읽을 때에도, 이 사소한 것 하나를 놓치면 엉뚱한 오해를 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에는 흐름을 파악하면서 천천히 읽을 필요가 있다. 속독으로 읽으면 내용이 별로 들어오는 것이 없다. 좀, 더디더라도 천천히 읽는 것이 좋다. 천천히 읽기에, 구약은 조금 부담스럽다. 신약성경의 예수님을 먼저 읽어나가는 것이 좋다. 적어도 나는 그랬으니. 신약성경을 읽다보니, 벌써 이렇게 많이 읽었나 싶을 정도로 많은 부분을 읽은 적이 많다. 성경을 부분적으로 그냥, 그날그날 아무데나 펼쳐서 읽어볼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성경을 전체적으로 꼼꼼히 읽으니, 아, 이건 이런 얘기였구나, 하는 부분이 보인다. 사소한 것들을 놓치면 성경을 곡해할 수도 있구나, 라고 느낀 순간이었다. 성경을 읽는 재미는 사소한 것들을 알아가는 재미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행적,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 베드로의 회개, 그리고 불완전한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들어 쓰시는지를 볼 수가 있다. 아무것도 아닌 내가, 뜻깊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성경을 온전히 읽으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번 해본다.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삶, 예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삶, 내가 아닌 아무것도 아니었던 삶이, 내가 있으므로 이제는 의미 있는 삶이 되어버린 지금, 나는 오늘 또 하루,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한다.
13. 나를 채우시는 예수님
사실, 내가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별다른 목적은 없다. 다만, 내가 적적할 때 예수님을 얘기함으로서 내가 위로받고,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있든 없든 간에 예수님은 헌신적이었으며, 눈치를 보지 않고 묵묵히 자신이 할 일을 하셨다. 그 삶을 내게 적용시키니, 일하는 게 행복하고, 책 보는 게 행복하고, 공부하는 게 행복하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면서, 억지로 일을 할 때는, 항상 불행하다고 느끼고, 집에 와서도, 그 불행의 여파가 계속되었지만, 이제는 삶 자체를 즐기면서,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되었고, 어디에 가서든, 항상, 즐겁게 뭔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가끔, 다리가 아프기도 하고, 팔이 아플 때가 있기도 하지만, 그것조차 잠시 잠깐! 일 뿐. 아픔도 오래지 않아 지나가곤 한다.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시는 방식은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모습 그대로 우리 모두가 볼 수 있게 오신다고 하셨다. 이미 예수님은 태어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서 그 사명을 다하셨기 때문에,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예수님의 모습을 살아서는 못 만날 수도 있다. 언제 오실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오시는 순간은 불행한 종말이 아니라, 행복한 축복의 시간이다.
사람에게 기대어선 채우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사람에게 기대는 순간, 실망하는 부분이 생길 것이고, 그 실망은 나를 힘겹게 한다. 애인이든, 부부이든, 친구든,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채워주신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있든 없든 간에 나는 언제나 행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내가 우울해질 때, 내가 불행해질 때, 예수님을 찾는다. 예수님께서는 내 마음을 언제나 돌보아 주시기 때문이다.
14. 나는 친절한 사람이 아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 대해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오해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늘 친절할 것이고, 인성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는 사람 중 많은 이들이 인성이 뛰어나지 않으며, 그다지 친절하지도 않다. 그리고 그 모습에 나도 예외는 아니다. 이유를 생각해 보니,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이유가 행복하지 않아서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교회에서 위안을 얻고 싶었다. 내가 친절해야 할 필요도 없었고, 내가 못 났다고 탓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이 좋았다. 예수님을 알아가게 되면 될수록, 예수님은 못나고 어리석은 나를 철저하게 돌보신다. 사람들에게 기대고, 사람들에게서 희망을 찾았던 때에는, 항상 뭔가가 부족했다. 그 부족함을 채우지 못했고, 결국은 불행한 삶 속으로 나를 내몰았었다. 믿음이 아주 좋은 사람들은 항상 친절한 사람들도 때론 있다. 하지만,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런 사람이 되기까지는 아마도 많은 수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친절하다. 그 친절한 예수님은 성경에 있고, 내 마음에도 있다. 때로는 예수님을 얘기하는 많은 책들에도 있다. 예수님을 알게 되면 알수록 예수님은 정말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걸 절실히 느낀다.
지금 이 글을 보고, 너 한번 당해 봐라, 하고, 어떤 이상한 계획을 세우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그들의 이상한 계획에 휘말려서 당할지도 모르고, 만약 그래서 뭔가의 계획에 당한다면, 당한 뒤에는 그들을 욕하고 미워하고 저주할지도 모른다. 나는 예수님이 아니라,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나도 사랑하지만, 그렇게 이상한 계획을 세우는 사람, 나쁜 짓을 저지르는 범죄자들도 사랑하시는 분이다. 그 예수님의 사랑이 언젠가는 그들에게도 전해질 것이라 믿는다. 예수님의 사랑은 누구에게나 동등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왜 범죄 하는 사람들을 벌하지 않느냐고 따질 이유는 없다. 예수님께서는 저주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아주기 위해 오셨다. 그 사랑이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전해지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예수님을 믿든 믿지 않든, 내가 어떤 사람이든, 예수님은 사랑하신다. 지금 이 글을 보시는 여러분과, 또 보지 않는그들도. 나는 사랑을 잘 모르는 하나의 사람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은 사랑이시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자신과 동등하게 대우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