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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과 무생물 사이
후쿠오카 신이치 지음, 김소연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6월
평점 :
지금도 기억난다. 대학 신입생때 첫 전공수업시간의 강의 주제는 바로 ‘생물이란 무엇인가’였다. 생물이란 무엇인가.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점은 어떤 것이며 생물만이 갖는 특징은 무엇인가. 이것에 대해 교수님은 두 시간동안 열심히 말씀하셨다. 하지만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지금 그때의 강의 내용 중 기억에 남아있는 건 거의 없다. 명색이 생물학도라면 이건 꼭 알아야한다고 하셨는데...중요한 골자는 모조리 홀랑 까먹고 그나마 남아있는 건 ‘생장, 생식, 진화, 자극에 대한 반응’...생물의 특성임과 동시에 생물과 무생물을 차이점이다. 또 생물이 지니고 있는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선 아직도 많은 논란을 거듭하고 있다는 것만 기억할뿐....
후쿠오카 신이치의 <생물과 무생물 사이> 이 책을 들고 신입생 때의 일을 떠올렸다. 흩어진 지그소퍼즐, 그 낱낱의 내부엔 인간과 나비, 개구리 같은 생물과 DNA 사슬이 들어있다. 이것들을 모두 짜 맞추면 어떤 모양이 나올까 궁금해진다.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본격적인 얘기가 나오겠구나 싶었는데 난데없이 뉴욕 맨허튼이 등장한다. 혼잡한 도심 풍경, 하늘을 찌를 듯한 마천루의 모습을 한번 휘휘 돌아보고 카메라로 줌인 하듯 시선을 옮긴 곳은 바로 록펠러 대학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의학자 노구치 히데요의 업적과 그에 대한 미국에서의 평가를 서술하고 있다. 사실 노구치 히데요에 대해선 만화책(그것도 끝까지 보지 못했다 ㅠㅠ)으로 읽은 게 전부여서 그가 일본의 지폐에 등장할 정도로 존경받는 인물인 줄 몰랐다. 저자가 초점을 맞춘 것은 그에 대한 엇갈린 평가가 아니다. 노구치 히데요의 연구 진행 방식이 어떠했는지, 질병의 발병원인인 병원체를 추출하고 증명하는 과정에서 어떤 실수를 범하기 쉬운지 얘기하고 있다. 전자현미경이 발명과 함께 바이러스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짓는 기준에 혼란이 일고 있다고 말한다.
그 다음 저자의 눈길이 머문 곳은 어떤 고난과 비웃음에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히 성실하게 연구에 몰두한 과학자들 ‘이름없는 영웅’을 소개한다. 20세기 들어 생명과학은 화려한 꽃을 피우기에 이르렀는데 그 서막은 바로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힌 왓슨과 크릭이 장식했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엄청난 발견을 한 공적을 인정받아 왓슨과 크릭은 노벨상을 수상한다. 그런데 그 DNA가 유전자란 걸 왓슨이나 크릭보다 먼저 발견한 사람이 있었다. 오즈월드 에이버리. 그는 평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예순을 넘긴 나이까지 연구실을 떠나지 않고 직접 시험관을 흔들고 유리 피펫을 조작했다. 그런 에이버리를 존경한 연구원들을 비롯한 록펠러 대학 사람들은 ‘에이버리에게 노벨상이 주어지지 않은 것은 과학 역사상 가장 부당한 사건이라고 입을 모으면서 왓슨과 크릭은 에이버리의 무등을 탄 버릇없는 손자에 불과하다(52쪽)’며 언짢은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결국은 에이버리가 옳았고 머스키는 틀렸다. 에이버리를 끝까지 견디게 해준 것은 무엇이었을까.....아마 시종일과 그에게 힘이 되었던 것은 자신의 손 안에서 흔들리는 시험과 내부에서 진동하던 DNA 용액의 반응이 아니었을까? - 51쪽.
에이버리처럼 자신의 피땀어린 연구 성과를 어이없이 도둑맞은 과학자가 또 있다. 로잘린드 프랭클린. 철저하게 귀납적인 접근으로 DNA의 구조에 다가가던 그녀는 왓슨과 크릭에게 DNA의 X선 사진을 도둑맞는다. 게다가 그녀를 독립된 연구원이 아닌 ‘조수’로 언급한 책도 출간되는 등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그 어떤 분야보다 냉철하고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판단을 최우선으로 할 것 같은 과학자, 그들의 영광스런 업적 이면에 이런 비리와 은폐, 조작, 음모가 숨어있을 줄이야 미처 몰랐던 사실이다.
책에서는 또 일본 대학에서의 연구실 환경이 썩 좋지 않다는 것(어쩐지 일본에 유학간 친구가 1년 후에 스위스로 떠났는데 혹시..???)과 지그소 퍼즐과 관련해서 잃어버린 조각의 모양을 알아내는 방법, 특히 광우병의 발병 원인인 프리온 단백질에 관한 대목은 광우병소 수입반대 촛불시위가 연일 계속되고 있는 요즘이라 무척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은 마지막, 책이 끝나갈 즈음 나왔다.
역시 우리는 뭔가 중대한 착오를 했거나 뭔가 못 보고 지나친 것이 있었던 것이다. 중대한 착오란 단적으로 말하면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미천한 인식이다. 그리고 간과했던 것은 ‘시간’이라는 단어였다. - 227쪽.
생명과 시간. 저자는 말한다. 생명이란 텔레비전 같은 기계가 아니라고. 그 둘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커다란 착오였다고. 수정란이 만들어진 그 순간부터 행진하기 시작하는 우리의 생명에 전진만 있을뿐 후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물에는 시간이 있다. 그 내부에는 항상 불가역적인 시간의 흐름이 있고, 그 흐름에 따라 접히고, 한번 접히면 다시는 펼칠 수 없는 존재가 생물이다. - 235쪽.
DNA의 존재를 찾아 생물의 신비와 미스터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안내서 같은 이 책 <생물과 무생물 사이>를 읽는 내내 내 귓가에 맴돌았던 말이 있다. “@@야. 발 닦고 자라!” 수업시간에 졸고 앉아 있는 내게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땐 좀 창피한 걸로 그쳤는데 이제야 후회를 했다. 좀 더 열심히 공부할걸. 그랬으면 이 책 읽으면서 쩔쩔 매는 일이 없었을텐데....싶었다.
‘생명’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저자는 어린 소년시절부터 품어왔던 모양이다. 에필로그에 담겨있는 어린 시절의 얘기를 읽고 나니 저자의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가 된다. 생명의 소중함, 존귀함을 아는 그이기에 더욱.
소년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나는 알에 미세한 구멍을 내서 안을 들여다보자고 결심했다....나는 준비한 바늘과 핀셋을 사용해 조심스럽게 네모난 모양으로 구멍을 만들었다. 그런데....안에는 배에 노른자를 품은 작은 도마뱀 새끼가 어울리지 않게 큰 머리를 동그랗게 웅크리고는 조용히 잠들어있었다.
순간, 나는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듯한 기분이 들어 바로 뚜껑을 닫으려고 했다. 나는 곧 내가 저지른 짓이 돌이킬 수 없는 일임을 깨달았다....한번 외부의 공기에 닿아버린 도마뱀 새끼는 서서히 썩어들었고 형태가 녹아 내렸다.
이 경험은 오랜 동안 괴로운 기억이 되어 내 안에 앙금으로 남았다. 분명 이 경험은 경이로웠다. 그래서 이렇게 생물학자가 된 지금도 어딘가에 숨어 내 의식에 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 235~246쪽.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