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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에 물들다 1 - 흔들리는 대지
아라이 지음, 임계재 옮김 / 디오네 / 2008년 5월
평점 :
<色에 물들다> 이 책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은 ‘안타까움’이었다. 두 권의 책 표지를 물들인 매혹적이고도 강렬한 色. 이 세상에서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빛만큼 아름다운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활활 타오를 듯 붉지만 그냥 빨강이 아니고 파도가 넘실대는 깊은 바다처럼 푸르지만 그냥 파랑이 아닌 어떤 色. 이 색깔의 이름이 도대체 뭘까. 도무지 알 수 없는 나의 무식이 안타까웠다. 이 色이 담고 있는 얘기는 과연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책날개를 보니 저자인 아라이는 중국 서북부의 티베트족 자치구에서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 <色에 물들다>는 저자의 첫 장편소설인 동시에 중국의 ‘마오둔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티베트 고유의 정서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그의 작품에 티베트는 물론 중국에서도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처음 만나는 티베트 소설이 문학상 수상작품이라니!!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붉은색 표지를 서둘러 넘기고 만난 첫대목에서 하얀 눈이 와락 안겨온다.
‘눈이 내린 새벽이었다.’...로 시작한 이 소설의 배경은 티벳과 중국(한족)의 접경지대다. 이 곳의 최고권력자이자 영주인 ‘투스’는 중국(한족) 황제의 책봉을 받는데 소설은 마이치 투스의 둘째 아들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런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인 둘째 아들이 평범하지 않다. 마이치 투스가 술에 만취한 상태로 아이를 갖는 바람에 ‘바보’로 태어난다. 가족을 비롯한 누구나 ‘바보’로 알고 ‘바보’로 대하지만 정작 ‘나’의 행동이나 얘기 속에선 그걸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장자에게 세습되는 ‘투스’란 자리 때문에 아버지와 형제간에 피를 흘리지 않도록 자신을 최대한 낮추는 분위기다.
자신들을 배신한 왕뻐 투스와의 전투를 앞두고 한족의 황특파원을 데려오면서 신식무기로 무장한 마이치 투스는 왕뻐 투스와의 싸움에서 승리한다. 그리고 황특파원이 두고 간 양귀비 씨앗을 심고 수확해 마이치 투스는 큰 부를 축적하지만 그로 인해 다른 투스들과의 전쟁이 벌어진다. 잘려나간 사람의 머리에서 양귀비 씨앗이 싹을 트고 자라는 대목에선 소름이 끼쳤다.
온 들판을 붉게 물들이면서 사람들을 혼란시켰던 양귀비의 씨앗은 새와 바람을 타고 다른 투스들의 영지에서도 싹을 틔운다. 마이치 투스가 거둬들인 어마어마한 은돈의 유혹에 빠진 투스들이 너도나도 양귀비 씨앗을 심을 때 마이치 투스는 반대로 곡식을 심고 풍작을 거둔다. 양귀비 씨앗을 구하러 왔던 투스들이 이번엔 식량을 구하기 위해 마이치 투스를 찾으면서 양귀비로 붉게 타올랐던 대지가 식량전쟁으로 또다시 흔들리게 된다. 이에 마이치 투스는 북쪽과 남쪽 변경에 식량을 보관하는 창고를 지어 두 아들을 보내는데...
‘나는 바보다’ 책에선 이런 대목이 심심찮게 나온다. 바보이기에 사람들은 자신이 실수를 해도 ‘바보라서 그렇거니’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거나 글자도 모르는 바보라서 하고 싶은 얘기도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책을 읽어갈수록 그는 100% 완전한 바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보리를 볶아서 그 냄새로 오랫동안 배고픔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불러오고 그들에게 한웅큼씩 건네주는 모습은 바보라고 할 수 없었다. 마이치 투스 집안의 집사는 그에게 “솔직하게 말하면 저는 도련님이 바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라고 말하고 롱꽁 투스 역시 “멍청한 척 하지 말아요. 당신은 소문 자자한 그 바보가 아니에요. 마이치 집안 둘째 아들이 바보가 아니거나, 당신이 마이치 집안 둘째 아들이 아니거나.....”란 말을 한다. 무엇이 바보고 무엇이 똑똑한 걸까.
티베트인 작가 아라이의 이름을 선명하게 기억하게 된 <色에 물들다>. 달라이 라마와 흰색의 나라로 불려지는 나라, 티베트. 그곳의 신화와 전설, 문화를 비롯해 그들이 지나온 역사 속의 아픔과 슬픔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앞으로 기회가 닿는다면 티베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좀 더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