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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 환상동화
오스카 와일드 지음, 이은경 옮김, 이애림 외 그림 / 이레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몇 년 전에 <Wilde>란 영화를 케이블을 통해 본 적이 있다. 시작부분을 놓쳐서 영화의 제목이나 어떤 내용인지 몰랐지만 매력적인 배우 주드 로가 출연한다는 이유만으로 보고 있었다. 주드 로와 또 한명의 주인공, 그들의 명연기에 몰입해서 영화를 계속 보다보니 그들의 이야기가 왠지 낯설지 않았다. 등장인물의 이름이나 간혹 동화 운운 하는 대사가 들리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리고 알게 됐다. 왠지 야릇한 동성애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영화, 그건 다름아닌 오스카 와일드의 사랑과 절망을 다룬 영화라는 것을.
영국문학을 대표하는 아일랜드 출신의 문호 오스카 와일드. 그의 환상동화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초등학교 때 교과서를 통해 <행복한 왕자>를 읽은 이후 그의 작품을 만나본 기억이 별로 없으니 오스카 와일드와의 만남, 정말 오랜만이다. 거의 30년만인 셈인가?
검은색의 표지가 고급스런 느낌을 주는 책 <오스카 와일드 환상동화>. 이 책에는 <별아이> <헌신적인 친구> <나이팅게일과 장미> <어부와 그의 영혼> <유별난 로켓 불꽃> <왕녀의 생일> <이기적인 거인> <젊은 왕> <행복한 왕자> 이렇게 모두 9편의 동화가 수록되어 있다. 이 중에 아는 동화는 <나이팅게일과 장미> <행복한 왕자> <이기적인 거인>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처음 만나는 작품인 듯하다.
제목에 ‘동화’란 단어가 들어있지만 지금까지 알고 있던 기존의 동화와는 많이 다르다. 밝고 아름다우면서 희망을 심어주고 권선징악적인 이야기를 담은 게 아니라 내용의 깊이나 전개방식이 무척 강렬하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게 아니라 성인에게 들려주기 위해 쓴 것 같다.
예를 들어 제일 처음 나오는 <별아이>는 오직 외모에 치중하는 이기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어느날 별아이는 자신의 친모가 찾아오자 그녀에게 ‘거지에다가 못생기고 누더기 차림’이라며 ‘구역질 나는 그 얼굴 보기 싫다’면서 쫓아버린다. 그런데 그 여인이 떠난 후 별아이의 모습이 징그럽고 못생기 얼굴로 변해버린다. 엄마를 쫓아버린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란 걸 깨달은 별아이는 엄마를 찾아나선다. 여기까지는 기존의 동화패턴과 흡사하다. 하지만 결말이 다소 섬뜩하다. 그동안 오만한 행동을 일삼았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왕이 되어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던 자의 최후치고는 가혹하지 않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팅게일과 장미>에서 나이팅게일이 교수의 딸을 향한 청년의 사랑을 이루어 줄 빨간 장미를 피우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던진다. 나이팅게일의 희생으로 얻은 빨간 장미를 들고 청년은 서둘러 교수의 집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교수의 딸은 보석이 꽃보다 훨씬 값나간다며 자신을 외면하자 화가 난 그는 빨간 장미를 길가에 던져버린다. 그리고 사랑이란 정말 어리석은 것이라고 중얼거리는데 나이팅게일의 목숨과 맞바꾼 빨간 장미가 마차 바퀴에 짓밟히는 대목에 마음이 아팠고 작가가 전하고 싶은 게 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좀 더 가까이 와, 작은 새야. 그러지 않으면 날이 밝기 전에 장미꽃을 다 피워내지 못할거야.”
나이팅게일은 가슴을 가시에 더욱 바짝 갖다 댔고, 결국 가시가 나이팅게일의 심장을 찔렀다. 그러자 타는 듯 격렬한 고통이 나이팅게일의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고통이 쓰라리면 쓰라릴수록 나이팅게일의 노래는 더욱 격정으로 치달았다. 나이팅게일은 죽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사랑, 무덤 속에서 결코 잠들지 않는 사랑을 노래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아름다운 장미는 동녘 하늘에서 피어난 듯 지난 핏빛으로 물들었다.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꽃잎은 선명한 진홍빛이었고 꽃의 심장부 역시 루비처럼 붉었다. - 77쪽.
이 외에도 사랑하는 아름다운 공주를 위해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는 난쟁이의 슬픔이 담긴 <왕녀의 생일>, 아름다운 인어와의 사랑을 위해 마녀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아버리는 <어부와 그의 영혼>, 언제나 잘난척하는 로켓불꽃이 진흙탕 속에 빠지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허영에 가득한 모습을 일삼는 <유별난 로켓불꽃>, 아이들이 쫓겨난 정원에 언제나 추운 겨울만 계속되다가 아이들에 찾아오고 나서야 다시 아름다운 정원으로 변한다는 <이기적인 거인>, 아름답고 진귀하며 값비싼 것이면 무엇이든 마음을 빼앗기는 <젊은 왕>, 어린 시절 제비와 왕자의 사랑과 우정에 눈물을 흘리며 읽었던 <행복한 왕자>. 이 한 편 한 편을 읽을 때마다 나는 오스카 와일드의 다양하고 새로운 면을 볼 수 있었다. 맹목적으로 아름다움을 쫓는가하면 허무에 빠져 깊은 한숨을 쉬고 사람들의 어두운 구석을 예리하고 포착해서 꼬집는 오스카 와일드와의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을 돋보이게 하는 건 바로 삽화가 아닐까 싶다. 본문의 내용과 성격에 따라 네 명의 전문 그림작가가 그린 독특하고 개성적인 일러스트는 동화의 깊이를 한층 더해주고 있었다. 물론 처음엔 헉, 하고 놀랄 정도로 섬뜩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몇 번 반복해서 보니 오스카 와일드 동화의 성격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30년만에 다시 만난 오스카 와일드, 역시나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