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 선이기 위해서는 그림자가 필요하다. 

너무 밝은 빛 만으로는 어둠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림자를 품은 빛이라야, 악에 물들지 않을 수 있다. 

무슨 뜻일까. 


마지막화에서 부연이의 몸 속에 존재하는 두 개의 혼 중 진부연-진설란,이라고도-이 자신의 신력을 사용하기 위해 봉인했던 낙수 조영의 잠든 혼을 깨워서는 말한다. 세상을 구원한 빛에게 당신의 그림자를 돌려드리겠다고. 그림자를 품어 안은 빛은 절대 어둠에 들지 않을 거라고. 


돌봄과 작업,에서 '오염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조언한다는 것과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흰 옷에 얼룩은 좋지 않지만, 작은 얼룩조차 참아내지 못한다면 지나치게 수고롭거나, 새 옷을 사는 수 밖에 없다. 지나치게 수고로운 것도, 새 옷을 사는 것도, 살아가는 것에 좋은 방식은 아니다. 지나치게 수고로운 것은 스스로를 괴롭혀서 지속할 수 없게 만들고, 새 옷을 사는 것은 결국 그걸 다른 누군가의 수고로 바꾸고, 지구를 더럽힌다. 


그림자는 어둠처럼 보이지만 빛이 없다면 그림자는 없다. 

그림자를 품어안은 빛이라는 말, 어둠에 들지 않을 거라는 말을 선이나 악에 대한 은유로 본다. 


결벽적인 어떤 주장들이 그렇게 치우치는 이유가 그런 것인가, 생각한다. 

결벽적인 주장들, 눈곱만큼도 용납하지 않는 얼룩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고 있으면, 그 의도에 대해서 의심하는 순간들이 많다. 그런 삶은 없는데, 삶은 아주 뒤죽박죽 엉망진창인데, 어떻게 저렇게까지 단정함을, 어떻게 저렇게 까지 완벽함을 요구할까 싶은 주장들에 의심한다. 

옳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다양하다. 시간에 따라,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극단적인 양 끝은 주장을 저쪽은 이쪽으로 당기고, 또 이 쪽은 저쪽으로 당기고 있다. 


그림자가 없다면 빛은 어둠과 다르지 않다. 

밝기만 해서는 어둠처럼 눈을 가려서 여기가 어딘지조차 알아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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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차(https://blog.aladin.co.kr/hahayo/14143752)

단편선에 딱 하나 실린 여성작가의 소설이 지나치게 염세적이라서 놀랐다. 나를 죽인 자와 함께 탄 죽음 뒤의 마차에서 죽인 자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는 걸 본다. 


나에게도 이런 태도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자신만만하게, 태어난 게 원죄라는 기독교도, 완전한 소멸이 목표라는 불교도 싫지 않냐고 했었지만 지금은 삶이 고통의 바다,라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죽는다는 것이, 그래서 그렇게 싫은 게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관계들, 때문에 나의 죽음이 나에게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당근 할 수 있지,라고 생각하는 수동적인 태도를 가진다. 나를 아는 누구에게라도 결국 언젠가는 죽음이 올 테니, 나를 위해서라도 기다려 주십사, 생각한다. 


2.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 (https://blog.aladin.co.kr/hahayo/8192500)

피다한 부족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문명의 말들에 대해 생각하고 남겼었다.

살기 싫은 감정,이 그럴 수 있다는 나의 태도 때문에, 그 태도가 얼마나 기이한 건지 알기 때문에 나는 어쩌면 아이들에게 관대할 수 있는 거라고 썼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 나의 파충류 뇌가 예민하게 노력하고 있다. 나의 파충류 뇌가 작동하는 동안에 살기 싫은, 어쩌면 한가한 감정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그런데, 이미 죽음은 어디에도 안 보이게 잘 치워둔 세상이기 때문에 삶은 무료해지는 게 아닌가도 싶다. 





3.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https://blog.aladin.co.kr/hahayo/2220098)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면서 일기를 쓰는 십대 소년의 이야기 속에서 소년의 관대함을 본다. 


소년은 죽었고, 일기의 그 첫 문장은 남은 사람들에게 비수가 되지만, 일기를 다 읽은 소녀는 그 말이 다른 의미임을 안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본다면, 잔소리하는 엄마도, 귀찮게 구는 동생도 자신을 거절하는 여자애도, 지금 삶을 꺾을 것처럼 거대하고 괴로워 보이는 일들도 참 별게 아니라고, 소년은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죽음을 상상하는 일은 삶을 더 잘 살아가게 하는 것이 된다. 

나도 아직 가끔 모르겠는 걸 참 일찍 깨달은 소년이네,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다. 


수동적이라는 말이 나쁜 말이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지금은 오히려 더 강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살고 살아남는 건, 수동적이어야 가능하다고까지 생각한다. 


나는 '누가 낳아달랬어?'라고 부모에게 항의한다는 자식들 이야기를 들으면 변명을 궁리한다. 그게 과연 나만의 욕망이었을까. 그건 너였어. 네가 나를 세상에 나오는 통로로 쓴 거지. 어떻게 내가 내 의지만으로 너를 낳을 수 있겠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 복에 살지요'라는 동화가 어린 날 나의 자신만만함의 근거였다면, 부모가 된 지금의 나에게 부모된 자의 변명이 된다고 생각한다. 더하여, 수동적인 태도의 연장으로 염세적인 태도의 연장으로 죽음만큼 삶도 내 의지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누군가에게 내가 관대해 보인다면, -그런 놈은 죽여야 되,라는 말에 언제나 물러서는 것 같은- 죽음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태도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닥치는 죽음은 벌이 아닌데, 죽음을 주는 것이 합당한가.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도 뛰어드는 죽음이라는 것이 벌로 기능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가혹함,에 거리가 생기는 건 나의 이 애매한 태도, 수동적이고 염세적인 태도 때문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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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마지막화를 봤다. 비극을 각오했는데, 해피엔딩으로 닫혔다. 

정말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까,는 지금 이 이야기에 한해서, 두 사람의 사랑에 한해서 라고 말해야지. 

장욱의 금패는 세자가 왕이 되는 데 쓰였고, 진무는 화조의 불길 속에 타 죽었다. 


진무는 약한 자였으면서, 강한 자가 되고 싶었다. 

자신보다 강한 자들이 명분이나 제도,로 그 힘을 자제하지 않았다면 그 힘을 축적하지도 못 했을 존재였으면서-진요원의 문을 열 수 없는 진씨가문 남자, 모계로 여성에게만 전해지는 힘을 가지지 못하는 명문가의 혼외자, 그래서 하잘 것 없는 약과 때문에도 마음이 상한다- 스스로 가장 강하기를 꿈꾸면서 세상의 혼돈이나 자신보다 약한 자의 어떤 괴로움이나 고통은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해 버린다. 그러고는 세상의 혼돈과 약한 자의 고통을 무시하지 못하는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래, 내가 바란 세상이지, 강한 자가 그 힘을 휘두르는,이라고 웃으면서 사라지는 진무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힘을 행사하는 장욱은 참으로 싫었을 거 같다. 환혼인을 처단하는 데에만 그 힘을 쓰는 힘을 스스로 봉인한 장욱이 만장회 술사들까지 불길 속에 태우면서, 환혼인 진무의 그 기이한 웃음을 듣는 것은 싫을 거 같았다. 

죽음조차 뛰어넘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행운이라기보다는 저주고, 이 이야기가 결국 모두의 죽음으로 닫힐 거라고 생각한 것은, 장욱의 얼음돌이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얼음돌이 있어서 죽음에서 살아 돌아왔다. 얼음돌이 있어서 살아 돌아온 진부연이 결국 얼음돌을 꺼내어 사라지게 해야 세상이 평화로워진다고도 생각했었다. 

얼음돌이 그저 비유나 은유라면, 사라지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지, 싶다. 

 

세상은 평평하지도, 사람은 모두 똑같지도 않다. 모두 다른 사람들, 근력도 키도, 마음의 단단함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 작게는 가족, 가문,으로 서로를 버티고 크게는 나라로 서로를 버티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쌓인 것들을 무화시키고 시작할 방법은 없다. 

그저 받아들이고 시작해야 하는 세상의 울퉁불퉁함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세상의 울퉁불퉁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낼 수 있나. 


가장 강하지는 않더라도, 나보다 약한 존재가 있음을 안다. 

힘은 나보다 세도, 마음은 나보다 약한 사람도 있다. 

서로 다른 존재에 기대면서, 나의 강한 면으로 상대의 약한 면을 돌보고, 상대의 강한 면에 나의 약한 면을 의지하면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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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돌봄과 작업 - 나를 잃지 않고 엄마가 되려는 여자들 돌봄과 작업 1
정서경 외 지음 / 돌고래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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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왜 경험없는 사람 이야기를 들어?" 라고, 질문한 적이 있다. 

나는 아이를 이미 키운 나이 든 아주머니 말들을 들었다. 하나보다 넷을 키운 엄마 말을 들었다. 3개월의 아기는 낯을 안 가려서 맡기기 좋다고, 1년을 키운 아기는 엄마와 떨어지려고 하지 않으니 사람도 구하기 힘들다,는 말을 듣고 3개월 휴가만 내고 출근했다. 

친구에게 "왜 출산이나 육아가 이런 거라고 말해주지 않았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내 엄마의 태도를 보고 배웠기 때문에, 먼저 아이낳은 나의 친구들 말에 내가 얼마나 무신경했는지 기억하기 때문에 말할 수 없었다. 어떤 괴로움이든 내가 겪어야 할 문제고, 내 경험의 보편성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말할 수 없었다. 

직장의 후배에게 "선배는 말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나는 내가 아이를 간절히 원했던 거라서, 출산 경험을 과장할 수도 없었고, 이미 지나간 일들이라 모든 순간들이 감사했다. 출산의 순간에는 항상 죽을 수도 있다면서 마음을 다 잡지만, 죽지 않았고 둘 다 건강하니, 그걸로 충분하다,였다. 후배는, 남자도 함께 듣는 출산 고생담을 엄마된 자가 저렇게 단순하게 묘사하는 걸 참지 못하는 거 같았다. 


젊은 엄마들이 만드는 책을 언니가 선물해서 받아 읽고 나랑 얼마나 다른지 쓴 적이 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1312880)


갯마을 차차차,를 보다가 덜컥 걸리는 게 있어서 쓴 적도 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3015445)


산후조리원을 보다가도 무언가를 쓴 적도 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2151051)


어디에나 이야기는 있지만, 고양되고 독려되는 이야기는 있다. 지금은 여성이 얼마나 출산과 양육으로 착취당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고양되고 있다. 하나나 둘을 낳은 엄마들이, 일과 양육을 함께 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가 팔린다. 프리랜서,라는 위태로운 직업군이 늘어나고 있으니 그런 직업군의 엄마들이고, 아이없는 젊은 여자들이 스스로의 확신을 강화시킬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출산과 육아가 스펙이 되지 않아 애석해하는, 가치를 다른 것과 거래하는 세태가 강화되는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다. 타겟 독자는 지금 책을 주로 사는 2~30대 미혼이거나 기혼에 아이가 없거나 하나거나 둘인, 억울하고 괴로운 여성들인 거 같다. 이 책을 쓴 엄마들과 비슷하지만 다른 전통적인 피라미드 조직의 말단에 속해서 아이를 셋 건사하는 나는 시큰둥하게 읽는다. 결국 개인이 겪어내야 하는 삶의 국면들에서, 어떻게 조언하겠어?라고 생각하는 내가 하지 못하는 말들이다. 난다의 거의 정반대의 행복을 읽고 그런 말들을 남겼었다.(https://blog.aladin.co.kr/hahayo/10081387) 책 속에서도 그런 모순이 충돌한다. 먼저 아이를 키운 어른들의 말들에 '너도 당해봐라'라는 말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당사자가 아니면 입을 닫아야 한다'라고도 한다. 그러고도, 무언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도움이 되고 싶어서일 것이다.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면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다. 하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에게 달린 일이다. 이 책을 읽고도, 누군가는 아이를 낳기로 하고, 누군가는 낳지 않기로 할 것이다. 짧지만 강렬하게 나에게 다가온 조언들은 있지만, 이렇게 긴 말들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저 찰나, 이유도 없이 깨닫게 된다.


정서경작가의 글은 최재천 교수의 유튜브처럼, 전하고 싶은 마지막 말이 전해지지 않을 것 같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3686633) 아이가 살고, 내가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짧은 순간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말보다, ''이제 네 차례다'라는 음모'라던가 '보이스피싱에 낚여 나도 모르게 무시무시한 물건을 주문해버린 것 같았다'라는 말, 아이없는 여자들의 두려움을 고양시키는 말들이 남을 거 같다.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즐기는 사람의 글이다. 슬픔도 잔잔히, 기쁨도 잔잔히를 추구하는 나같은 사람은 '모두 지나가는 날들'이라고, 짧고 격렬하기 때문에 즐기라고 말해 줄 수 있을 뿐이다. 


임소연연구자가 선배 학자에게 듣는 '나는 타협을 잘 했을 뿐이야'라는 조언이 와 닿는다. 젊고 선명하기 원하는 새로운 세대에게, '오염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조언이 절절하다. 


아티스트 전유진은 자기 공간에 대한 이야기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내 방,이라는 아이의 요구를 거절하는 나 자신이 보이는 말들이다. 그렇지만 '출산과 육아를 하는 것에 관해 당사자가 아니면 그 어떤 말도 보태지 말자'라는 말은 너무 강경해서 물러서게 된다. 당신이 지금 하는 말은 무엇인가요?라고 질문하게 된달까. 더하여 다음 장에 '하지만 그게 뭔지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으면서'라는 말이 붙는다. 양가성과 모순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전제 뒤로 이런 글들이 따라 붙는다. 어른들은 언제나 말해주고 있었다. 듣는 내가 미숙해서 알아듣지 못했다. 그 말 뜻을 몰랐고, 실감하지 못했다. 겪어보고서야 뒤늦게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는 원망도 아무 말도 보태지 말라는 당부도 기이하다.


또래집단의 말들이 더 잘 들린다.  

또래집단의 감수성과 조응할 말들이 더 잘 들린다. 

세상의 진실과 거리가 멀더라도, 또래집단의 말들의 파도 위에 올라탄 말들이 더 잘 전해진다. 

어쩌면 그래서, 모두 개별적일 수 밖에 없는 경험 가운데-누군가는 아이를 낳다가 죽을 뻔 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두 시간 진통에 가뿐하게 낳을 수도 있는 거니까- 슬프고 억울하고, 쓸쓸하고 괴롭다는 이야기만 더 많이 돌아다니는 것도 같다. 


엄마이기 전에 아이였으면서, 아이였을 때, 엄마의 감정을 느꼈을 거면서, 왜 그러는 걸까.

어쩌면 엄마가 되기를 거부하는 아이의 마음이 이런 이야기들을 점점 더 커지게 하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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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이다. 

갑자기 딸애가, "그럼 우리 이제 음력생일 안 쇠나?"

"왜?"

"만 나이로 통일된다며?"

"언제는 안 그랬나. 그리고 언제 그렇게 말 잘 들었다고. 그냥 쇠, 쇠도 돼."

"그래? 그럼 나, 내일부터 한 살 먹을래."

나이가 두 살 깎여서 좋은 건 나이먹은 사람들 뿐이고, 열살 딸은 1월 1일이 지나도 열한살이 안 된다는 게 싫었던 모양이다. 

되게 웃겼는데. 적어놓으니 그렇게 웃기지는 않네. 

 

나이,라는 게 부러 묻지 않으면 셈하지 않고 몇년생이라고 대답한 지 한참이라, 뭐 별 거라고, 그냥 사는 거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데, 만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겠습니까?

떡국 한 그릇 먹고, 나이도 하나 먹은 셈 치고. 해도 바뀌었으니, 건강하시라고 인사나 남깁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무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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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 2023-01-02 1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족님 새 해에도 건강하시고 행복을 누리세요~~^^

서니데이 2023-01-02 2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족님 새해복많이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