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여름 - 류현재 장편소설
류현재 지음 / 마음서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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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https://www.aladin.co.kr/shop/common/wseriesitem.aspx?SRID=66166) 를 이북으로 다운받아 읽었었다. 다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시리즈 중에 '옛날 사람'에 대한 선망이 담긴 묘사가 있다. 근력에 대한 선망,이 아니라 실행에 대한 선망이다. 칼로 사람을 죽여봤었던 사람들이다,라는 식의 묘사. 옛날 사람이 젊은 사람을 보고 했을 법한 주저하며 아무 것도 실행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질타,가 섞여있다. 살인을 해봤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그 무엇이든 옛날사람이 보기에 젊은 사람은 걱정만 많고 실행하지는 않는 한심한 존재,라는 게 있기는 한 것도 같다. 생각도 없이 하고 보는 무모함,도 좋은 소리는 못 듣지만, 생각만 많고 꼼짝도 않는 것도 참 그렇다. 

이 책도 그런 묘사가 있다. 사랑이나 죽음, 삶을 구성하는 것에 대한 태도에 대한 묘사다. 

현재의 딸이 아버지의 삶을 거꾸로 추적해나가는 구조다. 사랑없는 부모의 삶에서 떨어져나온 자신이 이제 치매로 기억도 희미한 아버지의 젊은 날 바닷가의 사랑에 대해 알게 된다. 오해로 어긋나고 복수로 이름붙여진 사랑과, 살인과 죽음. 여러 해에 걸쳐서 일어난 일들이 묘사된다. 현재 딸의 직업에서 묘사되는 도시의 풍경과 과거 아버지의 삶이 묘사되는 바닷가 마을의 풍경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모노톤의 풍경화가 원색의 거친 그림과 나란한 것처럼도 보이고, 죽음이 한 없이 뒤로 미뤄진 평화로운 현대와 대비되어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과거의 시간들은 팔딱이는 것처럼도 보인다. 재미있게 읽었다. 내 기준 최강 빌런은 어머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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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지음 / 사계절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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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좋다는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얼마나 다른지 읽으면서 계속 생각했다.

왜 아이들에게 비오는 날 자신이 차를 태워준다고 해도 타지 말라고 가르칠까, 의문이 들었다. 세상은 무섭지만 다양한 사람이 있고, 선생님이 태워준다고 하면 타도 될지 말지는 아이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짱구를 못 보게 하고, 포텐독을 방영중지시키고 싶어하는 엄마들이랑 다를 바 없다,고도 생각한다. 어린이라는 세계를 이해하고 어린이를 존중해야 한다고 쓰는 어린이 독서교실 운영자인 저자는 과연 어린이를 믿고 있는가 의심이 들었다. 자신이 보는 세상이 너무나도 무서워서, 아이의 나에 대한 믿음이 확장되어 다른 나쁜 사람을 그렇게 믿을까봐 걱정하고 있다. 아이도 판단한다. 아이가 세상을 어떻게 볼 지는 아이가 만나는 어른이라는 세상 가운데 아이가 결정하는 거다. 좋은 어른과 나쁜 어른을 구분해내고 가끔은 나쁜 어른에게 놀림을 당하기도 하면서 세상이 어떤지 스스로 결정한다. 저 선생님의 두려움이 아이들에게 옮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많은 에세이들처럼 내가 궁금해하는 건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 

어렵게 꺼낸 말인 거 같지만,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피상적이고, 아이에 대한 이야기도 피상적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한 번도 구체적인 상황을 고민해 본 적 없는 사람이 이렇게 하면 좋잖아,라고 말하는 듯해서 계속 질문이 생긴다. 어린이날에는 어린이들이 행진을 하고, 모두 배지를 달고, 어린이를 귀하게 대접하면 좋겠다는 말에, 나는 그럼 몇 살까지 어린이로 대접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하고, 다시 그럼 귀하게 하는 대접이란 무엇인가요,라고 질문한다.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세상이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묘사도, 그럼 세상이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라고 질문한다. 모든 사람은 그런 단계들을 거치고, 어쩌면 어른들도 키가 다 다르고, 체격도 다 다르고 작은 사람은 작은 사람의 불편이 큰 사람은 큰 사람의 불편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요? 

이건 정책자료집이 아니라, 에세이예요,라고 말한다면, 지금 상황이 지금 이러한 것에 대한 어쩌면 변명을 하고 싶었다. 함께 사는 세상에서 모든 사람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는 상황같은 거, 불편하다고 말할 수 있을 지 몰라도 해결책은 없는 말들은 소용없는 말이 아닌가,라고 반문하고 싶었다. 

백 사람이 살고 있다면 백 사람의 방식이 있을 텐데, 무언가 파스텔톤의 애정과 사랑이 최선인 것처럼 묘사하는 인상을 받는다. 아이 입장에서는 독서교실 선생님의 남의 집 아이에 대한 적당한 거리의 파스텔 톤 사랑도, 가끔은 도망가고도 싶은 할머니의 원색의 사랑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거다. 방법이 다르다고 해도 사랑이고, 가끔 상처가 된다 해도 그건 삶의 과정이 아닌가 라고도 생각하는 나는 무언가 상처없이 어린이를 보호하려는 태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거다. 아이들도 판단하고 있다. 그 과정 가운데 배우고 자란다. 상처없이 자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스스로도 상처주는 어른일 순간들이 있었을 텐데, 지금 하는 말은 무슨 의미가 있는 말인가, 생각한다. 이 에세이의 의미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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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1-11-17 14: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제 읽어도 참 멋진 리뷰입니다.

별족 2021-11-17 14:41   좋아요 1 | URL
좋다고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_-;;;;;

토모에 2022-11-19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이 님이 리뷰에 쓰신 부분들 때문에 지루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도 역시 우리나라에선 어린이들이 너무 존중받지 못한다는 현실만은 인정해야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별족 2022-11-20 06:31   좋아요 0 | URL
저는 우리나라,에선 이란 부분을 모르겠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면역에 관하여
율라 비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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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가 빌려달래서 노조사무실에서 빌려줬다. 방학이 시작될 즈음, 학교에 반납하는 책 대신 빌려다 준 건데, 여름방학이 다 끝나고 개학도 한참 지났는데, 여즉 읽었다는 말도 없더니, 이제 읽어볼까, 하더니 다음 날, 뭔가 못 읽겠다면서 돌려줬다. 그래서 반납하기 전에 내가 읽었다.

샌드라 스타인그래버의 '모성혁명'(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57957) 이나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https://blog.aladin.co.kr/hahayo/7620022) 가 생각났다. 여성저자가 엄마가 되는 경험 안에서 백신에 대한 논쟁에 대하여 서술한다는 면에서, 모성혁명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여성저자가 쓴 짧은 쪽글들을 묶었다는 면에서, 리베카 솔닛의 책이 떠올랐다.

1세계 여성저자가 자신을 드러내고 썼고, 과학적이거나 논리적인 설명보다 언어적인 설명, 언어의 은유에 대해 말하고 있다. 비영어권 동양의 여성 독자가 그대로 공감하며 읽기에는 배경이 너무 다르다. 번역문제라는 불만도 많던데, 번역을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불안이 폭증하는 시기- 첫아이를 낳은 엄마의 죄책감과 불안함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결벽적인 기독교 문화, 이분법적인 언어환경에 대한 묘사들이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이라면 좀 작작해라,라고 할 거 같다. 백신에 대한 각각의 쪽글들이 가지는 애매한 포지션- 백신에는 찬성하지만, 왜 반대하는지도 알 것 같아요????-도 독서를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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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여자들의 테러
브래디 미카코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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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내가 좋아할 것 같다면서 권했다. 브래디 마카코의 '아이들의 계급투쟁'에서 어떤 일본인 특유의 나약함이 느껴졌었던 나는(https://blog.aladin.co.kr/hahayo/11475164), 살짝 꺼려지는 마음이 있었다.

책은 세 명의 여자를 엮었다. 일본의 가네코 후미코, 에밀리 데이비슨, 마거릿 스키니더. 저자인 브래디 마카코는 영국에서 살고 있는 일본여성이다. 가네코 후미코가 천황제에 저항했던 여성이라면, 에밀리 데이비슨은 여성참정권을 주장했던 급진 서프러제트였고, 마거릿 스키니더는 아일랜드 독립무장투쟁을 했던 여성이다. 나는 이 여성들이 가지는 마음들, 저항하는 마음을 모르지는 않지만, 이들의 강함이 지금 유효한 것인지 생각한다. 지금도 그런 목숨을 건 저항의 서사를 쓰고 싶어한다는 걸 모르지는 않는다. 여기를 가부장제의 폭압이 존재하는 곳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을 안다. 그렇지만, 정말 그러한가. 그럼 가부장제의 폭압을 깨뜨리기 위해 무엇을 주장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서 나는 뾰족하고도 강경한 대답을 찾지 못한다. 독립도 했고, 천황따위는 없고, 여성에게 참정권도 있고, 호주제도 폐지된 여기에서 이제 도대체 무엇이 더 필요한지 의문이 드는 지경이라서, 책 속의 심장을 끓어오르게 하는 서사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한다. 

지금, 여기에 유효한가, 질문하면서 나는 어떤 여성을 강하다고 생각하는지 생각했다. 

내가 강하다고 생각하는 여성을 '한국인의 밥상'을 볼 때마다 만난다. 저것도 먹어, 싶은 풀들로 반찬을 만드는 어머니들,을 나는 강하다고 생각한다. 믿음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서 버티고 키워내는 사람들을 강하다고 생각한다. 무엇으로라도 먹이기 위해 어쩌면 비굴을 감당하는 사람이 나는 강하다고 생각한다. 살아남아 전하는 사람, 아이를 키우는 사람, 악착같이 먹이는 사람을 나는 강하다고 생각한다. 강경한 자아가 존재했던 자리에, 다르지만 같은 마음으로 공존하기 위한 태도가 남는다. 살아남는 일, 살아내는 일, 무엇보다 어렵지 않나? 그 자체로 강한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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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21-09-08 0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가 좋아할 것 같다면서 친구가 권하는 상황이 너무 좋습니다. 부럽습니다. ^^;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조던 B. 피터슨 외 지음, 조은경 옮김 / 프시케의숲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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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을 수가 없었다.

주제가 너무 포괄적이라 토론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이뤄지지 않았다.

조던 B. 피터슨의 '질서 너머'를 읽었고, 유튜브도 몇 개 본 다음이라, 그 사람이 견지하려는 어떤 태도에 대해 알고 있었다. 나머지 토론자는 전혀 모른다. 흑인 목사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무기처럼 휘두르며 상대를 조롱하는 것처럼 보였고, 유일한 여성 토론자는 극단적인 사건을 묘사하는 게 정당성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언어를 교정하는 행위가, 극단적인 폭력을 해소하는 데 과연 도움이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고 있지 않다. 정치적 지형이 변화하는 것, 극단적 우익이 출몰하고 세를 확장하는 것에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말들이 기여하는 것은 없는가?에 대답하지 않는다.

네 명의 토론자 중에 굳이 내 입장을 고르라면 스티븐 프라이,를 고를 것이다.

나는 내가 믿는 바가 단단하기 때문에, 검열을 통해 내가 믿지 않거나 좋아하지 않는 것을 걸러서 없애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뭐 그럴 권력이 없고, 있다면 그럴까봐 걱정도 한다. 그럴 때가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전혀 나의 믿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도 생각한다. 설득하는 것, 열심히 설득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하면서도, 그 설득이 어떤 방식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질문하는 거다. 언어를 교정하려는 태도에는 엘리트주의가 드러나고, 상대를 무시하는 태도가 드러나고, 우월의식이 드러나고, 적개심을 불러일으킨다. 언어에는 이미 가치관이 포함되어 있고, 그 가치관은 누천년 동안 형성된 어떤 것이다. 그렇게 견고한 것을 새로운 언어로 대체하려는 캠페인은 견고한 바닥을 부수고 집을 지으려는 노력처럼 어지럽다. 토론의 순간, 바닥이 되어야 할 언어를 상대가 교정하려 한다면 다음은 전혀 나아갈 수 조차 없다. 공론장이 어지러워지는 것은 최소한의 공통분모를 해체해왔기 때문이고, 그래서 자유롭게 극단으로 멀어졌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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