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어떻게 지구를 망치는가
마이클 셸런버거 지음, 노정태 옮김 / 부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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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하고 싶어서 그런 거겠지.

책을 읽는 내내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얼른 다 읽고 뭔가 써야지 마음이 바빴다. 

사람을 감정적으로 설득하려고 충격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동영상들이 끔찍했어서, 많은 부분 공감하면서 읽었다. 플라스틱에 대한 말들이 지금도 한창이지만, 그런 말들에 내가 휩쓸리다가 갑자기 패총, 생각이 난 거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는 증거라면서 발견된다는 조개껍질 무더기, 말이다. 플라스틱이 문제라고 하는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 나도 쓰레기 매립은 끔찍하게 싫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더 문제인 건 뭐지? 조개껍데기, 유리 장신구, 수천년 뒤에 발견되는 사람의 흔적, 앞으로 수천년 뒤에는 그게 플라스틱이고, 아마도 상상을 초월하게 많겠지, 라고 생각하는 거다. 미세 플라스틱이 박혀 있는 생선살 기사에 달린 '내가 해놓은 짓인데, 어쩌겠어요, 먹어야죠'라는 댓글에 키득대는 나는, 그게 왜 얼마나 나쁜지, 이제 생선은 먹지 말아야지 결심하고 있지 않는 거다. 미세플라스틱이 많아요, 먹지 말아야 해요. 중금속이 축적되요, 먹지 말아야 해요. 이걸 먹어야 좋아요. 도대체 뭔 소리람. 인공의 재료가 천연의 재료보다 더 나쁘다는 태도도 이상하고. 여보세요, 사약은 다 자연재료로 만들어요. 정말 인간이 무언가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함도 동의가 안 된다. 그래, 나는 종말론적 환경론의 오만함,을 싫어한다. 인간이 지구를 망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찮은 인간이? 그러다가도 그 하찮음을 인정하는 것이 몹시 쓸쓸하고 허망할 때면 다시, 내가 무언가 할 수 있겠지,라고 다잡는 거다. 장바구니를 들고, 손수건을 들고 다니고, 그러고도 누군가 정말 굉장히 중요한 일을 내가 못 본 체 하는 것처럼 울면서 왜 채식을 하지 않냐는 항의를 하면 에?하고 물러나는 거다.

이미 부를 누리는 1세계 사람들이 고릴라를 구하자며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에 화를 낸다. 농활오는 대학생들이 고맙기보다 재수없었던 시골 중학생이었어서, 도대체 저 사람들은 뭐하는 짓거리야, 싶은 순간들이다. 야생동물에게 농작물을 도둑맞는 콩고의 농부, 가난한 시골집에서 도시로 상경한 방글라데시의 젊은 여공에게 공감하면서도 우리 만큼의 부를 전 인류가 누리는 게 가능한가 의심하는 순간들이 생긴다. 나도 지구발자국,같은 말들을 들었고, 나와 같은 삶을 사는데 지구가 한 개 반이 필요하다는 말도 들었다. 그래서 저자는 마지막에 멜서스의 인구론이 어떻게 환경주의와 결합했는지 철학에 대해 말한다. 의심과 믿음 사이에 갈팡질팡한다. 

저자는 모든 인류가 이런 풍요를 누릴 수 있고, 지금 종말론적 환경주의가 풍요를 누리는 1세계가 풍요롭지 못한 3세계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말한다. 수력발전소를 짓고 싶어하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둘러싸고, 래프팅 명소가 사라진다고 반대하는 1세계 사람들은 지나치게 악의적 묘사 같지만 위선적이라는 느낌은 피할 수 없다. 고릴라를 위해 눈물을 흘리면서, 야생동물의 약탈에 분노를 표하는 농부에게는 이입하지 못하는 셀럽들을 보는 것은 재수없다.

나는, 시골이나 지방소멸을 걱정하는 사람이지만, 저자는 인간이 도시로 모이는 것이 자연스럽고 그게 훨씬 환경에 이롭다고 말한다. 더 적은 땅에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다면, 도시가 더 자연을 재생시킨다고 말한다. 제조업 성장 없이 풍요는 없고, 기반시설 없이, 에너지 없이 발전은 없는데, 이미 그 단계를 거친 나라들, 모든 산업폐기물을 바다에 내다 버리고, 도시를 석탄으로 뿌옇게 만들며 산업화를 이룬 1세계가 지금 그 단계가 필요한 나라들을 방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서식지의 문제 가운데, 인간이 더 적은 땅에서 더 많은 식량을 만들 수 있으면 도시에서 풍요를 누리고 편리하게 살 수 있으면, 나무를 땔감으로 쓰기보다, 가스나 전기로 요리하고 난방한다면, 환경은 더 보호될 수 있다고도 말한다. 방글라데시에서 만들어진 패스트 패션 옷을 입는 것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고 말한다. 그런 나라들이 부유해지고 풍요로워지면, 더 이상 1세계의 쓰레기장 노릇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성장한다면, 어느 정도 성장이 이뤄지고 나면, 에너지 소비도 출산률도 정체되고 지구는 감당해낼 수 있게 될 거라고 말한다. 그런 걸까.

내내 공감하다가, 패스트패션을 입는 걸 자랑스러워해도 좋다,는 말에 물러서고, 거의 많은 부분 할애한 원자력 옹호에 갈등한다. 원자력발전소에서 일하는 지방소멸을 걱정,하는 나는 완전히 같은 입장은 아니지만, 서식지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동의가 된다. 기후변화가 가난한 나라를 집어삼킬 거라고 지하철을 점거하고 공포를 심는 환경운동가들이 가난한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는 행위들에 기여하고 있는 아이러니에 대해 생각한다. 복잡한 세상사의 슬픈 면면들 가운데, 어떤 일을 해야 하고 무얼 하지 말아야 할 지 모르겠다. 원자력을 옹호하기 때문에, 별 하나 평점이 달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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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21-07-05 1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갈등하는 1인

별족 2021-07-05 10:19   좋아요 1 | URL
확실히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아이들을 병들게 하는 거 같기는 합니다.

별족 2021-07-05 10:57   좋아요 2 | URL
참, 저 사실 알라딘에서 원자력으로 많이 싸웠었어요^^
https://blog.aladin.co.kr/hahayo/7744179

추풍오장원 2021-07-05 1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설령 저자의 의견에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은 건 볼품없지만 트리플 3
배기정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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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3인 딸이 읽고 싶은 책 목록을 적어줬다. 다 샀는데, 이 책을 빠뜨려서 나중에 따로 결제해서 받았다. 되게 얇네, 라면서 받자마자 내가 읽기 시작했는데, 책소개에 있는 그 문장이 첫 문장이다. '섞정, 몸을 섞다 생긴 정의 줄임말이다' 에??? 에??? 엄마가 딸이 고른 소설책을 읽는 거라서 보는 눈이 달라진다. 그래서, 순순히 읽지 못하고, 삐딱해진다. 나는 촌에서 나고 자란 농부의 딸이고, 오락으로서 의 성교에 시큰둥한 보수적인 사람이고, 그 정체성 안에서 본다. 

세 개의 짧은 소설과 자신에 대한 에세이, 다른 사람이 쓴 글이 붙어있다. 다 짧고 비어있는 부분이 많은 이야기다. 

그래, 도시 사람들은 이게 문제야. 뭘 잘 먹어야지. 사는 게 뭐 별거 있다고 이렇게 술만 먹고 담배만 피고- 요즘 세상에 이렇게 담배를 마구 피워대는 묘사가-, 밥을 안 먹어. 아이구, 도대체 애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진지하지도 않은 관계에서 성교하는 거야. 뭐야. 도대체. 이게 첫번째 소설을 본 내 인상이다. 

두번째 소설은 어땠더라. 좋아하는 것들로도 삶을 가득 채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치기들이 가득 찬 이야기다. 산다는 것에 필요한 것들을 가볍게 말하는 이야기다. 

세번째 소설은 어땠더라. 두번째 소설까지 읽고 였던가, 계속 읽어야 되나, 도대체 왜 딸은 이 책을 사달라고 했을까, 궁금해서 인터넷 서점의 책소개페이지를 펼쳤다. 뭐라고 소개되어 있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나. 재밌게 읽었다는 사람들이 많고, 세번째 소설이 좋았다는 사람이 있어서, 더 관심을 가지고 본다. 아 뭐가 좋은지 알겠더라. 어떻게 부유해졌는지는 모르지만 부유해서 가난한 화자의 이상한 동거를 허용하고, 자신의 도덕률에 따라 모르는 체하지 않는 강한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 에 대해 생각한다. 내 이름은 난노, 라는 넷플릭스 드라마 이야기를 할 때 했던 이야기, 강한 사람을 좋아하는 심정에 대한 생각이 났다. 무엇을 팔아 부를 이뤘는지는 결국 알 수 없다. 당장 회사에서는 농락당하는 중이고, 연애는 깨어지기 직전이고, 레일라의 허용없이는 잘 곳조차 없는 화자의 심정에 이입하기보다는 레일라에 이입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예술을 한다,는 자기 정체성은 결국 무언가를 모르는 체 할 수 밖에 없는 건가,라고도 생각한다. 결국 글로 쓰여진 소설일 뿐이니까, 젊은 한 때의 장면묘사일 뿐이니까, 섹스 쯤이야 가볍게 할 수도 있는 어떤 것이 되고, 먹고 사는 문제야 어떻게든 되는 것이라는 태도가 있다. 정말 그러한가. 먹고 사는 게 그렇게 쉬운가. 딸에게 그렇게 쉽지 않다고 먹고 사는 걸 이렇게 가볍게 보는 책을 보라고 하고 싶지 않다. 사는 건 무거워서, 먹고 살기도 힘들고, 자칫 잘못하면 아기가 생길 수도 있는데, 어쩌자고 몸을 쉽게 섞겠냐고. 

굳이 고르자면 나는 두번째 소설의 젊은 사장님이 좋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중이므로, 그 와중에 많이 잃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게 나이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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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쉽게 믿는 자들의 민주주의
제랄드 브로네르 지음, 김수진 옮김 / 책세상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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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펀게시판을 돌아다니다가 조깅이 아침조에 달릴깅이라면서, 달릴 깅,자를 한자로 써놓은 걸 봤다. 깜빡 속았다. 아침은 조깅, 밤에 달리는 건 야깅이라고 써 있는데, 남편도 아이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가 저걸 진짜 믿냐는 표정으로 볼 때에야 뭔가 이상한가, 생각했다. 그렇다, 나는 정말 믿었다. 달리는 사람같아 보이는 한자모양도 믿어버렸다. 나는 얼마나 쉽게 믿는 사람인가, 놀란다. 

꽤나 오랫동안 정치인이 되는 걸 생각했다. 민주노동당을 지지했고, 스스로를 여성주의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늘 나의 어떤 태도가 '경계'에 대해 물러선다. 부족한 자원을 어떻게 쓸 지 결정하는 정치인의 일에서, 경계를 짓는 데 실패한다. 오히려 원하는 게 너무 달라서, 사람들의 불가능한 소망을 다루지 못한다. 야, 그게 없다고 죽어?라고 반문하는 정치인이라니 가당키나 한가, 하고 늘 생각하고 있다. 그러고도 정말 못 할 일이구나 생각한 건 사람들의 의견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게 되는 순간들 때문이다. 

나는 결혼을 했고 아이도 셋인데, 여자들이 모여서 출산 무용담을 말할 때 말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출산 무용담, 양육에 대한 애로, 남편에 대한 불만, 무엇 하나 말할 수가 없다. 재미있다는 이야기는 좀 더 과장되는 것들이라서 여론은 고통스러운 출산과 악마같은 아이, 아이와 다를 바 없는 남편에 대한 것들이다. 

세상에 많은 이야기들이 그러하듯이, 평범한 이야기는 흘러가버리고 과장된 이야기들이 회자된다. 그런 이야기들은 또 세상을 바라보는 왜곡된 렌즈가 되어, 살아가기보다 구경하는 많은 젊은이들의 눈을 가린다. 조직은 멍청하고 음흉하고, 부도덕하고, 권력기관은 권력을 부당하게 행사할 뿐이다. 지나치게 늘어나는 정보는 생각하기 귀찮은 사람들을 상대로 이상한 이야기들을 퍼뜨리고, 어리석은 판단들이 이뤄진다. 믿음을 가진 열성적인 사람들이 음모론이 대세인 인터넷 세상을 만들고, 생각하는 게 귀찮은 사람들은 '뭐라도 있으니까 저러는 게 아니야?'라고 생각하면서 판단을 유보한다. 그 와중에 '유사역사학'이, '전자렌지 유해성'이 퍼져나간다. 전문가의 말들이 힘을 잃고, 유의미한 해결책이 유보되고, 편리한 신기술이 유보된다. 기술 도입에 비전문가를 포함한 위원회의 결정을 따른다던지, 통계적으로 의미없는 차이에 이념의 프레임으로 접근한다던지. 프랑스의 이야기인데도 우리나라의 사례를 열거할 수 있을 거 같다. 원자력발전소에 다니고 있어서 더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저자의 해결책을 한 번 더 읽었다. 인터넷 말고 만나서 말하는 공간,들에 대해 말한다. 편향된 의견이 더 편향되는 의지를 가지고 모이는 모임말고, 모르는 채로 다른 채로도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공간의 확장을 말한다. 프랑스에도 이미 사라졌다는 협회나 학회, 교사모임 같은 것들을 이야기한다. 인지마케팅기법으로 대화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전문가집단에게도 말한다. 너무 말같지도 않아서 대꾸하지 않았다가 지분을 잃어버리는 전문가집단,에게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인지한 다음 좀 더 효과적인 소통방식을 궁리하도록 요구한다. 원자력발전소에 대해 말하다가 나가 떨어진 적이 있어서(https://blog.aladin.co.kr/hahayo/7744179 , https://blog.aladin.co.kr/hahayo/9663603 https://blog.aladin.co.kr/hahayo/9459044 https://blog.aladin.co.kr/hahayo/11733638  )책의 말들이 더 많이 와닿았다. 

너무 재미있게 읽고, 이북으로 읽은 게 아쉬워서 책으로도 샀다. 

첫째, 우리의 사고방식은 차원적으로 한계를 지닌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식은 제한된 공간과 영원한 현재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둘째, 문화적으로도 한계를 지닌다. 우리의 사고방식은 앞서 일어난 표상에 따라 모든 정보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셋째, 인지적으로도 바닥짐의 부담을 지고 있다. 우리의 정보처리능력은 무한하지 않으며, 어떤 문제의 복잡성은 우리의 상식적 잠재력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한계는 아마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북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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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가방 2021-06-26 1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화가 필요한데.. 대화 하는 법을 아무데서도 가르쳐주지 않으니....

별족 2021-06-28 05:15   좋아요 1 | URL
가르친다, 거나 배운다, 는 게 교실에만 있는 게 아니고, 대화라는 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반응하는 거라서, 대화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어서 저는 사실, 가르쳐 줄 수 없을 거 같아요. 자기 자신을 계속 보면서, 상대를 또 보면서 그렇게 혼자서 깨우쳐나가야 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eBook] 붕대 감기 : 소설, 향 소설, 향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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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가 없이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친구들과 하는 밴드에서 아는 언니가 권했다. 1년도 더 전에 권한 책을 다 늦게 읽었다. 그 밴드 성격도 있고, 이 책이 '페미니즘'을 표방한 것에 거부감이 있었다. 서평도 보고 역시 그런 건가, 거부감을 키웠던 것도 같다. 나는 '나의 미친 페미니스트 여자친구'를 읽고 크게 실망한 적이 있고(https://blog.aladin.co.kr/hahayo/10914180), 강화길의 '괜찮은 사람'(https://blog.aladin.co.kr/hahayo/9957536)도 좋게 읽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 코멘트 없이 읽지 않다가, 나중에 읽은 거다. 그러고는 이 소설이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것이 지금 페미니스트들에게 호감이 생길 만한 건가, 갸우뚱 했다. 역시, 작가가 비혼과 탈코르셋에 악의를 가지고 있다는 식의 악평이 있다. 내가 하고 싶어하는 말을 소설의 형태로 들려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스트'들이 등장한다. 과격한 20대, 결혼한 40대, 멀찌감치 물러선 아마도 50대, 성에 대한 태도도, 결혼에 대한 태도도, 화장에 대한 태도도 다르다. 과연 연대는 어디에 있는가. 이 모두가 페미니즘이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나도 아마 하고 싶었었는데, 이렇게 다른데 '페미니즘'으로 묶을 필요가 있을까,가 지금의 나다. 페미니즘으로 묶는다고 해서 어떤 페미니스트의 적개심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쩌면 말이 아니라 삶이, 이렇게 다른데도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아간다는 자체가 연대일 수도 있는데, 그런 면에서 굳이 더 '페미니즘'이라고 이름붙일 필요가 있을까, 의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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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한순간에
수잰 레드펀 지음, 김마림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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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를 다른 형태로 건너 들으면서 한 생각은 '이야, 참 신이 못 되 처먹었구나'였다. 

묵자를 읽으면서는 차별없는 사랑이란 말에 사람이 과연 그러할 수 있는가에 의심을 가졌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0999324)


이야기가 지나치게 결벽적이라서 놀란다. 

어쩌다 한국인,을 읽은 뒤라서 서양인들이 어떤 이야기 속에서 사는지 생각하면서 읽게 된다. 

이 사람들은 삶과 죽음이 멀어서 꿈 속에 죽은 딸이 나타나 이야기하는데 비명을 지르면서 잠을 깨는구나. 이 사람들은 타인에게 자신의 딸을 맡기면서 자신보다 더 잘 보살피기를 기대하는구나. 자신 안의 어둠을 보는 데 두려움이 많아서, 책임질 타인을 원하는구나. 

예전에 봉제인형살인사건을 읽을 때도 그런 인상을 받았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0935205) 거기 퍼 놓은 건 '착한 사람은 없다는 것, 아직 지나치게 몰아붙여 지지 않은 사람만 있을 뿐이야'라는 거였는데, 나는 '사람을 그렇게 몰아붙이면 안 돼'라고 생각하는 사람인 거다. 

서양인들에게는 분명한 선과 악이 있고, 시험에 들게 하는 신 아래에서 항상 선을 택하기를 원하는 이야기 가운데 사는 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사고가 일어나고 그 다음, 구조받은 다음에도 계속되는 이야기 가운데, 얼마나 결벽적인지 계속 생각하게 되더라. 불쌍하네. 그래서 그렇게 자꾸 극단적이 되나, 싶었다. 살아남은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어쩌면 죽었어야 하는 사람이었던 거야?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화자가 되지 못하는 죽음은 무엇이었을까, 생각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 질 타인을 결국 찾아낸 건가,라는 생각을 하는 지경이었다. 

자신 안의 어둠을 볼 수 없어서, 타인에게 관대해질 수 없는 이야기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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