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조던 B. 피터슨 외 지음, 조은경 옮김 / 프시케의숲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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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을 수가 없었다.

주제가 너무 포괄적이라 토론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이뤄지지 않았다.

조던 B. 피터슨의 '질서 너머'를 읽었고, 유튜브도 몇 개 본 다음이라, 그 사람이 견지하려는 어떤 태도에 대해 알고 있었다. 나머지 토론자는 전혀 모른다. 흑인 목사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무기처럼 휘두르며 상대를 조롱하는 것처럼 보였고, 유일한 여성 토론자는 극단적인 사건을 묘사하는 게 정당성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언어를 교정하는 행위가, 극단적인 폭력을 해소하는 데 과연 도움이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고 있지 않다. 정치적 지형이 변화하는 것, 극단적 우익이 출몰하고 세를 확장하는 것에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말들이 기여하는 것은 없는가?에 대답하지 않는다.

네 명의 토론자 중에 굳이 내 입장을 고르라면 스티븐 프라이,를 고를 것이다.

나는 내가 믿는 바가 단단하기 때문에, 검열을 통해 내가 믿지 않거나 좋아하지 않는 것을 걸러서 없애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뭐 그럴 권력이 없고, 있다면 그럴까봐 걱정도 한다. 그럴 때가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전혀 나의 믿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도 생각한다. 설득하는 것, 열심히 설득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하면서도, 그 설득이 어떤 방식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질문하는 거다. 언어를 교정하려는 태도에는 엘리트주의가 드러나고, 상대를 무시하는 태도가 드러나고, 우월의식이 드러나고, 적개심을 불러일으킨다. 언어에는 이미 가치관이 포함되어 있고, 그 가치관은 누천년 동안 형성된 어떤 것이다. 그렇게 견고한 것을 새로운 언어로 대체하려는 캠페인은 견고한 바닥을 부수고 집을 지으려는 노력처럼 어지럽다. 토론의 순간, 바닥이 되어야 할 언어를 상대가 교정하려 한다면 다음은 전혀 나아갈 수 조차 없다. 공론장이 어지러워지는 것은 최소한의 공통분모를 해체해왔기 때문이고, 그래서 자유롭게 극단으로 멀어졌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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