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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평점 :
디아스포라(Diaspora)는 '이산離散'을 뜻하는 그리스어이자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 거주하는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이 말은 현재에 이르러 좀 더 확대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굳이 바다 건너 먼 나라의 형편을 살피지 않아도 이산離散의 피해와 고통은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차고 넘친다. 제국주의는 막을 내렸고, 식민植民의 기억도 사라지고 있으며, 전쟁도 휴전인 이 땅에 아직도 이산離散의 고통을 겪는 이들이 줄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책의 주인공 바리의 행로를, 가족이 해체되고, 두만강을 건너고, 불법 노동자로 일하고, 밀항을 하고, 영국에 정착하는 과정을 따라가며 어린 바리가 감당했을 차가운 두만강도, 밀항의 시간들도 나는 상상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어린 바리가 극적으로 도착한 영국이라는 신세계는 그녀처럼 내몰린 사람들에게 또 다른 이름의 지옥일 뿐이었다. 갖가지 피부색을 한, 자신의 땅에서 쫓겨난 혹은 도망친 그들은, 일류국가의 삼류시민, 불법체류자의 이름으로 살 수 밖에 없었고, 배타적인 시선 속에서 또 다시 표적이 되고 있었다. 그들은 또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 것인지, 흘러갈 곳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들에게 주홍글씨를 목에 걸게 하고, 기약 없는 시간으로 몰아가는 대단한 제국들과 교만한 통치자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들에게 그리고 언젠가 내몰릴지도 모르는 우리에게 희망이란 있는 것일까?
폭정과 기근을 피해 목숨 걸고 두만강을 건넌 이들이 무관심과 착취로 인해 또 다시 죽어가는 상황을 지켜보며 우리의 주인공 바리는 설화의 한 대목처럼 그들을 그리고 자신을 구원할 [생명수]를 찾으려 한다. 생명수를 찾기 위해 들어간 지옥 같은 환상 속에서 바리가 떠도는 불쌍한 주검들과 나누는 통한의 대화는 이 소설을 넘어 이 시대를 관통하는 [절망]이었다. 환상에서 돌아온 바리가 그들을 구원할 생명수를 찾지 못했다고 토로하자 압둘 할아버지가 그녀를 가만히 달랜다.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남을 위해 눈물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 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P.286"
그러나, 나는 압둘 할어버지의 위로, 그러니까 [희망]이라는 환상이 필요한 현실, 그리고 그것이라도 붙들어야만 하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희망]이라는 묘약을 주입하여 현실을 위무하고 버티게 하는 무엇이 있다면, 나는 주저없이 [희망]을 처방하는 약장사들의 의도를 의심한다. 그들이 내놓는 묘약은 이미 숱한 [절망]과 [극기]의 시간들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희망]을 말하는 것, [희망]만 놓지 않으면 현실은 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선동하는 행위는 위험하다. 그리고 그것은 기만이다. 물론 인간이란 [희망]없이 살기 어려운 것이라서, 神을 만들어 낸 생명체가 아니었냐고 한다면, 나는 그 대목에서는 할 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처방이 아니다. 그것은 아편일 뿐이다. 아편을 처방받은 이의 결말은 너무 뻔하다. 죽음이다.
"나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시간을 기다리고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늘 기대보다는 못 미치지만 어쨌든 살아 있는 한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 P.223"
오히려 [모든 것은 지나간다]고 나를 붙드는 바리의 손끝에서, 나는 염치없이 위로받고 있다. 견디는 것, 지나가는 것, 그것들이 [희망]이라는 말 보다 나는 좋다. 물론 견디고 기다리기 위해 뭔가 필요하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무엇이 필요하다면 그것이 꼭 [희망]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견디고, 지나가는 것을 맞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절망]이라면 오히려 편하다. 역시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이다.
고통 받고 상처 입은 자가 자신의 언어로 온전히 상처를 드러내는 일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고통의 순간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일도, 그것을 타인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로 치환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상처는 치료를 위해서건 화해를 위해서건 기록되어야 하고, 비슷한 피해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알려져야 한다. 그러나 곤혹스럽게도 언제나 고통을 해석하는 타자의 시선은 일정한 선을 넘기가 힘들고, 때로는 자의적인 해석이 곁들여지기 일쑤다. 그러한 이유로 매개자의 자질과 능력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이 한 개인의 문제일 때도 그렇지만 역사라는 집합적 기억을 다룰 때는 더욱 그러하다. 하여 우리시대의 상처, 바리의 고통을 알리는 작가 황석영의 글은 치밀한 사전 조사를 바탕으로 하여 쓰여졌다는 점, 섣불리 감정을 들쑤시지 않고 과장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살아야 할 이유를 찾기 위해 분투했다는 점에서 그가 수행한 매개자의 역할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마지막으로 아직도 이 땅에 이산離散의 고통이 차고 넘치는 이유는 우리 모두 [희망]을 잃어서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힘 있는 자들이 더 큰 힘을 얻고, 힘 없는 자들이 더 많이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하여 작가의 말처럼 우리가 찾아야 할 [생명수]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패러다임, 이분법적인 구조로 세상을 가르지 않는 상생의 윤리라면 나 역시 [생명수]라는 [희망]을 붙들어 보고 싶다. 아니, 다시 한 번 속을 의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