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이 다 가고 있음을, 갑자기 늘어난 통화량으로도 알 수 있었다. 한 해를 어떻게 살아냈는지 궁금해하며, 대단할 건 없지만, 목숨을 부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올해가 가기 전, 얼굴이라도 봐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 전화를 걸어온 그들 대부분의 반응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올해 모임 중 반수가 넘는, 실은 거의 모든 모임에 참석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미 '불참'이라는 버릇없는 입장을 밝힌 모임도 있고, 당일 잠수를 타버리겠다고 내심 다짐한 모임도 있다. 이유는 매우 불건전하게도, 귀찮아서다. 상대방들이 이런 내 속내를 알게 되면, 삼족을 멸한다고 으름짱을 놓겠지만, 나는 멸할 삼족이 없다. 그래서 전혀 두렵지 않다.  

물론 나 역시 그들 중 특정한 그들의 얼굴이 삼삼하고, 목소리가 그리우며, 근황이 궁금하다. 따라서 특정한 그들을 향한 나의 연민은, 애초에 전화 한 통화로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시간과 상황이 허락한다면, 우리는 만날 수 있거나 만나야 한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그들이라면 굳이 연말이라는 대목을 노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즉, 그들과 나눌 나의 마음은 '크리스마스 한정판매'상품이 아니다. 상시 판매되는 '생필품'과 같은 것이다. 살아있으면 언제든 볼 수 있고 또 보면 된다. 그러니까 내가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한 쪽은, 매우 이기적인 발언이지만, 대부분의 그들이다. 점점 아득히 멀어진 그들. 아니 처음부터 일정 거리를 유지한 그들이라고 하겠다. 나는 바로 이 대목에서 궁금증이 생긴다.    

유행가 가사처럼 어쩔 수 없이 멀리 떠나보내 나는 죽겠네,싶은 사람들도 아니고, 세월이 흘러도 마음속에는 온통 그대 뿐이라오,라고 고백할 사람들도 아니고, 이 세상이 아니라면 다음 세상에서라도 우리 다시 만나요,라는 다짐을 할 사람들도 아니건만, 무슨 연유로 일 년에 한 번은 반드시 만나야만 한다는 것인가. 그것도 서울거리가 개념없는 운전자들로 넋을 놓고, 음식점은 단체예약으로 앉을 자리가 없으며, 까페는 끈적이는 연인들의 에너지로 공기가 탁하고, 유흥주점은 부녀회와 동호회가 장악한, 더 나아가 취객들이 노상방뇨하고, 길 잃은 청춘들이 숙박업소를 기웃거리고, 어엿한 아가씨가 노래방에서 소화기를 들고 노래하고, 멀쩡한 총각들이 양아치 흉내를 내는 이 때! 왜? 그것 뿐이더냐, 모임에 어울리는 의상, 모임에 어울리는 화장, 모임에 어울리는 머리가 잡지와 일간지에 드러누워 있고, 주위를 사로잡는 매너, 주위를 사로잡는 화제, 주위를 사로잡는 몸매가 책으로 발간되어 널부러진, 엽기와 허세가 장을 이끄는 이 때! 어째서! 왜? 

그러니까 다시 돌아가, 아니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우리 모두 서자. 그리고, 내가 없는 모임에서, 나를 안주삼아, 즐겁지도 않은 모임을 즐겁게 이끌기 위해 술잔을 기울일 그들에게 다시 밝히는 바, 올해는 만나지 말자. 만나지 않아도 산타도 오고, 선물도 생길지 모르고, 아기 예수도 오고, 보신각의 종은 울릴 것이고, 동해 바다에서는 사람들이 일출을 향해 두 손을 모을 것이다. 설날이 오고 떡국을 먹고, 나이도 먹고, 부모님에게 야단도 맞고, 사업은 어려울 것이고, 부부는 싸울 것이고, 친구는 배신할 지도 모르고, 이 땅의 4대 강들은 포크레인에 겁탈당할 지도 모르고, 인간관계는 더 힘들어 질 것이고, 배는 나올 것이고, 주름은 늘 것이다.  

그러니, 그대들이여. 우리 서로 무언가 확인하려 애쓰지 말고, 존재감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지 말고, 시기심을 감추려 전전긍긍하지 말고, 허영을 부리려 말달리지 말자. 그저 따뜻한 방에서 읽지 못한 책이나 읽고, 재방송하는 영화나 보며, 고향에서 올라온 고구마나 쪄먹으며, 손톱 발톱이나 다듬다가 그것도 지겨우면, 어쩌다 그리워 가슴 답답한 사람이라도 있걸랑 부치지 못할 편지라도 쓰자. 그것이 그대들도 나도 씁쓸하지도, 헛헛하지도 않게 연말을 보내는 일일 것이다.  

서운할 지 모르지만, 진실로 진실로 이것은 진심이니, 이제 그만 관계안에서 조급해 하시라! 그리고 2010년, 그대들이여 안녕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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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09-12-23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낫살의 헛됨이여.
저 단호함. 저 아쌀함. 저 정연함.
젊음의 훌륭함이다.

낫살의 무거움이여.
관계는 조급하고 목숨은 춥다.

하하, 굿바이님.
술과 장미의 나날은..라비앙 로즈는.
세밑.

굿바이님의 이 글은 예제 좀 퍼 날랐으면 합니다.

굿바이 2009-12-28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탄은 잘 보내셨는지요?

동우님, 저는 전혀 훌륭할 것 없는 젊음입니다. 여전히 안쓰럽고 답답한 관계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뭔가 아쌀해보려고 노력만 하고 있습니다. 물론 결과는 삽질입니다^^
술과 장미의 나날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상상만으로도 붕붕 떠오르는 걸 보면, 멜랑꼴리는 제 팔자인가 봅니다. 서울은 어제 내린 눈의 흔적들이 마음을 심란하게 합니다.

동우 2009-12-30 0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허락하실줄 알고.
이글 베껴다가 모처에다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