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 좋다고 이야기만 들었던 이슬아 님의 책을 얼마 전에 보았다.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읽기 전에는 막연하게 무거운 가족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반은 맞고 반을 틀렸다. 

 

첫장 잉태부터 예상과 달랐다. 부모님의 섹스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

 

 

딸을 가지게 된 것 같은 기분이야.”

아빠는 그 기분을 믿지 않은 채로 잠들었다. 그 무렵 엄마는 꿈에서 자주 과수원을 거닐었다고 한다. 동그랗고 빨갛고 윤기 나는 사과들을 따서 광주리에 가득 담았댔다.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인 이야기들을 나는 좀 좋아한다. 옛날 옛적 코끼리가 진흙 위를 밟고 지나가다가 생긴 커다란 발자국을 어떤 여인이 밟고 지나갔더니 임신이 됐다더라 하는 식의 터무니없는 탄생설화도 좋다

 

 15쪽   

 

딸 태몽은 대개 비슷하다.

엄마한테 나는 포도밭에서 한 가득 포도가 열린 것을 보고 마구 따서 먹었더니 치마가 물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나.

 

하지만 정작 내가 딸아이를 가졌을 때는 어떤 꿈을 꾸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안 난다.  복숭아인지 딸기인지 꿈이 매번 바뀐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어릴 때 엄마를 너무 좋아했고 엄마와 애착이 강한 딸로 자라든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든 좋은 딸이 되기는 참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어려운 걸 작가는 잘해내고 있는듯하다.

엄마를 엄마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이해하려는 좋은 딸이다.

 

그리고 누드모델이자 연재노동자로 열심히 사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누드모델을 하면서 느낀 점 중에서 사람들이 작가의 몸을 보고 그리기는 했지만 어쩐지 그린 사람의 모습과 비슷하게 그림을 그렸다는 부분에 동의한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해석할 때 자신과 닮은 부분에 주목하거나 전혀 다른 것을 보고도 자기 식대로 해석하기 마련이다.

 

둥글하면서도 날카로운 그림체도 마음에 들었다. 

우선 빌려보았지만 소장해도 좋을 책.

 

그리고 미안하지만 나는

웃을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되는 딸을 원한다.

 

물론 나는 우선은 작가님처럼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되는 딸이다.

 

이 미묘한 차이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잘 모를 것이다.

 

 

 

 

 

 

 

 

 

 

 

 

 

 

 

요즘 제목 짓는 센스

놀랍다.

 

이분도 유명하신가보다. 정신과의사가 병원을 박차고 나와 무료 정신상담 트럭을 운영하기까지의 과정과 약간의 개인사를 담고 있다.

 

지역 정신보건센터나 방송국과 연결이 되었다는 면에서 저자는 운이 좋은 것이지만, 중증환자들을 생각하면 답답하기만 하다.

 

정신과에 대한 일반의 인식 개선, 그리고 정신과 문턱이 낮아져야 한다는 데에 동의하지만 일단 가장 큰 문제는 정신과 치료에 일반 질병보다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국가보험이나 사보험 모두 적용이 힘들다. 재발도 잦고 평생 가져가는 것이다.  

 

일회성 상담이나 가족, 주변의 관심 같은 것으로 해소되지 않는 만성질환자가 많다.

 

저자의 고군분투는 물론 소중하다. 그러나 단순 기분부전이나 우울증 초기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사회나 개인에게 큰 문제가 되는 건 역시 중증 질환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 읽고 썩 개운하지만은 않았다.

 

암 치료를 재능기부로 하지 않듯이 정신과 관련 질환도 국가가 보장하는 것이 더 늘어나면 가족들의 부담을 덜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도 아니고 죽을 확률이 매우 높은 중증 질환이다.

 

*

 

다행히 병원으로 돌아가셨으니 그곳에서 역시 소명을 다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안심이다.

 

병원에서도 환자에게 희생당한 분이 있는데 그런 공간은 환자에게나 의료진에게 다 위험하다.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임세원 교수님을 추모하며 한번 읽어보고 싶다.

 

 

모든 에세이가 왠지 투병기처럼 여겨지는

미세먼지 가득한 우울한 겨울이지만

일주일 전에 애들이랑 남원 눈꽃축제 눈썰매장이랑 근처 백두대간 생태전시장 게판오분전이란 전시도 다녀왔다.

 

갑각류 전시인데

게판오분전

네이밍 센스 보소.

 

전시 보고 나서 인스타 올리면 꽃게랑을 준다. 지역카페에 눈꽃 축제 게판오분전이라고 후기를 올렸다가 제목만 보고 눈썰매장이 준비가 안 되어 개판오분전으로 보았다는 댓글이 속출했다. ㅋ

 

딸이랑 전당이며 박물관 수업도 다녔다.

아들은 물론 두고 다닌다.

민원 발생을 방지하고 아들의 자유로운 생활을 존중하기 위해서.

 

아들은 진짜 일찍 엄마 품을 떠난다.

겨울철에 실수로 끊어먹은 방패연같이 멀리멀리 날아가버린다.  

 

 

*

그래도

아이들 방학이라 곁에서 강제 독서

애들 방학이면 휘리릭 읽기 좋은 히가시노 게이고를 읽게 된다.

 

예술 관련 잡다하게 편하게 읽하는 책들도 보았다.

 

엄청 같이 무얼 하고 세 끼 챙기고 다닌듯한데

방학이 겨우 이 주 지났다.

 

그나저나 서재에 글 올릴 때마다 화장실에 자주 가게 된다.

이건 알라디너라면 다 그렇겠지.

 

커피를 좀더 줄이든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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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지만 전혀 새해답지 않게 해묵은 감정들로 고생한 며칠이었다.

왜 나의 원가정과 새로 이룬 가족들 다 나를 힘들게 하는지.

 

사실 그들은 그냥 저희대로, 그대로 있는데 내가 과민한 경향도 있다. 요즘은 감정을 조절하기가 힘들다. 눈물이 갑자기 터질 것 같기도 하고 한숨을 쉬고 있기도 해서 딸이 많이 걱정한다.

 

매일

"엄마, 오늘 기분은 어때? 1부터 10까지 중에서" 이렇게 묻는다.

 

어릴 때 어디가 아프면 내가 물어보았을 때처럼 그렇게 딸아이가 되물어온다.

8 정도는 되니 너무 걱정 말라고 해준다.  

 

사실은 요 며칠 4나 3인 날이 더 많았다.

그렇게 충격적인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아직도 근심에 짓눌려 있다. 

 

계속 가라앉아 있다가 도서관에 읽고 싶었던 새 책이 들어와 잔뜩 빌려서 차분히 보기 시작하니 좀 낫다. 이제야 8 정도로 회복했다.

 

<보통의 존재>는 정말 좋아서 몇 번 봤는데 지금은 가물가물하고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은 중반에 너무 읽기 힘들어 포기했다.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은 얼핏 검색하니 젊은층에서는 <보통의 존재>보다 별로라고 하지만 난 작가님과 비슷한 속도로 나이들어가고 있어서 그런지 잘 보았다.

 

작가님이 뮤지션일 때 청춘이어서 같이 음악을 듣고 이제는 같이 중년에 접어들어서 가족 걱정, 건강 걱정하면서 하루하루 살아내고 있어서 어쩐지 뿌듯하다.

 

엄청나게 많은 서표를 붙여가며 읽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단지 숫자가 늘어나고 얼굴에 주름 몇 개가 늘어가는 일이 아니었음을, 그래서 노력하고 씩씩해지지 않으면 그 무게에 언제고 잠식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일임을.

89쪽 

 

상처라는 게, 세월이 흐르면 그걸 준 사람뿐만이 아니라 받은 사람의 책임도 되더라. 누구 때문이든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건 나니까, 내게는 누가 주었든 그 상처를 딛고 내 삶을 건강하게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123쪽

 

우울하고 어두운 것을 즐기려 해도 체력이 받쳐줘야 한다는 것을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암에 걸렸다가 완치된 친구가 혹 스트레스를 받을까봐 이제는 뒤가 궁금한 드라마나 내용이 센 영화는 보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마음이 아프면서도 선뜻 이해가 가지는 않았었는데 이제는 나도 알겠다. 감정과 자극을 즐긴다는 것도 이렇게 체력이 필요하고 그게 안 되면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는 걸. 249쪽

 

나도 그렇다, 이제는 카모메 식당 류의 잔잔한 일본영화나 아이들 애니 정도, 흘러간 로맨틱 코미디 정도로 살짝 웃는 게 편하다. 몇년 전에 <응답하라 1988> 보면서 감정을 너무 소모했고 최근에 미스터 션샤인도 어떨 때는 버거웠다. 석원 님이 노희경 작가의 라이브 볼 때 힘들었다는 지점에도 공감한다. 형사물이라 사회의 어두운 면이 드러나고 등장 인물들이 날것의 감정을 분출하며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이전 작과 비교해서 한층 더 짙은 우울, 출구 없음, 나만 편히 지낸다는 죄책감 등으로 스트레스 받다 드라마 시청 본연의 목적(시간을 편히 잘 흘려보내기)에 어긋나는 듯해서 중도 포기했다.  

 

결국 행복이란 가치 앞에서 세상의 모든 작은 것들은 작은 게 아니더라. 일상은, 일상의 평화라는 건, 노력과 대가를 필요로 할 만큼 힘겹게 지켜가야 하는 만만치 않은 것이더라. 259쪽

 

아픈 발을 이끌고 산책을 하고 노모에게 살림을 맡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쇠잔한 육체에 큰 부담이 될 듯하다.

 

*

궁금하지만 어쩐지 연락은 하게 되지 않는 친구같은 석원님

 

집안에도 일이 많고 많이 편찮으셨군요.

애쓰셨어요.

너무 노력하지 말고 쉬엄쉬엄 하세요.

 

 

 

 

 

 

 

 

 

 

 

 

 

 

 

 

 

 

 

 

 

오전에 심각한 얼굴로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를 읽어서 딸을 또 걱정하게 만들었다.

 

역시 아무리 내가 힘들어도 이런 증언은 꼭 들어야 한다.

 

오랜 세월 고통받으신 분의 언어를 이렇게나 잘 번역해내다니.

 

말은 자주 끊기고 맥락이 없지만 그 세월이 눈앞에 생생하게 드러난다.

 

인용을 하기 힘들고 다 줄을 쳐야 할 정도.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기대만큼 좋지는 않았다.

 

아직 다 읽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재기발랄한 아재 감각은 돋보이는데

내 취향은 아니다.   

 

 

 

 

 

 

 

 

 

 

 

 

 

 

내가 책 보는 동안 딸아이는 이 책에 멋진 작품들을 남겼다. 찍어서 올리려다 전송이 귀찮아 그냥 둔다. 확실히 나에게만 의미 있는 예술작품일 테니.

 

 

 

 

 

 

 

 

 

 

 

 

 

 

 

 

 

 

 

스스로 호를 지은 와식(늘 누워 있음) 김선생은 이런 책을 본다. 초등학생이니 나이에 맞는 것을 보면 좋겠고 그래도 줄글로 된 책을 보면 좋겠지만 이제 내 소관이 아니어서 그냥 둔다.

 

*

 

딸아이는 어린이 미사 가고 아들은 쇼파에 누워 책을 보고 있고

저녁 먹을 건 있으니

 

이만 하면 오늘은 8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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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19-01-11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이면 정말 괜찮은 거네요. 저도 그 수준을 유지하려고 노력할게요. 잘 지내시죠?

2019-01-12 0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2 1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2 2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3 0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4 0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계절이면 전에는 그 유명한 <러브레터>를 보곤 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남극의 셰프>를 보게 될 것 같다.

 

첫 장면부터 심상치 않다.

 

가도가도 끝없는 눈밭.

무슨 일이 있는지 몰라도 한 대원이 이탈하려고 한다. 그러자 모두가 포기하지 말라며 기운을 북돋우며 끌고 와서는 고작 마작을 재개한다. '마작' 팀 정식 명칭은 '중국문화연구회'

 

*

남극 대륙 한참 깊은 곳에 ‘돔 후지 관측 거점’, 통칭 ‘돔 기지’가 있다. 이 돔 후지 관측 거점은

해발고도 3,800m, 평균 기온 영하 57도, 최저 기록 영하 79.7도로 세계에서 가장 혹독한 관측

지대이다. 오죽하면 펭귄, 바다표범은 물론 바이러스조차 생존할 수 없다.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만 좋다.

 

이곳에 통신 담당, 차량 담당, 설빙기상학자, 연구원, 전담 의사, 요리사 등 총 8명이 파견되어 함께 일하고 쉬고 먹는 소소한 일상이 펼쳐진다.

 

극지방이니 만큼 엄청난 스펙을 자랑하는 인재들이 모여 있지만, 현실은 기다리고 기다리는 지루한 날들이 이어질 뿐이다. 가족과 떨어져서 단신 부임하는 데서 오는 외로움과 애인과 헤어지는 실연의 고통도 나오지만 그래도 잔잔하고 가끔 피식 하게 되는 그런 분위기이다. 

 

영화 후반부에 돔 기지와 통신 연결된 아이가 기대에 차서 남극이니 펭귄은 있나요? 바다표범은 있나요? 하고 물으니 꾀죄죄한 아저씨들이 "우리들이 있지요" 라고 답해서 제일 크게 웃었다.

대장이 몰래 라면을 훔쳐먹다 바닥이 나서 니시무라 준이 수제 라면을 개발했을 때 모두가 감동하며 먹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진짜 행복해 보였다. 대장은 늘 나의 몸은 라면으로 이루어져있다고! 하고 외치던 사람이니.

모두가 일생에 한번쯤은 꼭 보고 싶어하는 오로라이지만 극지방에선 오로라보다 오직 라멘. 이런 오로라는 관측하기 힘들다고 하면서도 결국 라멘이 불을 것이 걱정되어 식탁으로 발길을 돌린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모두가 외쳤던 에비후라이. 일본에서와 같은 새우튀김을 생각하며 사람들은 셰프에게 에비후라이를 외쳐대는데 만화에나 나올 법한 왕새우라서 모두가 황당해한다.

 

극지방에서의 관측과 연구보다 니시무라 준이 요리하는 과정이 더 세세하게 나온다. 힘겨운 상황에서 오직 셰프의 요리와 소소한 장난들이 그들을 지탱하게 해준다.

영화 말미에 대원들이 일본으로 돌아가서 하고 싶었던 일들을 챙겨 꼭 하는 것을 보고 흐뭇해진다.

니시무라 준은 가족들과 소소한 일상을 즐기며 정말 그곳에 갔다오기는 한 걸까, 하고 중얼거린다. 거짓말처럼 이전과 비슷한 일상이 펼쳐진다. 놀이동산에서 패스트푸드를 맛보며 '맛있엉' 하고 감격. 역시 뭐니뭐니 해도 남이 해준 건 다 맛있음.  

찾아보니 원작 에세이도 있어서 책으로도 보고 싶다.

 

*

<체공녀 강주룡>은 금요일에 빌려서 읽기 시작했다. 역시나 명성대로였다. 이미 십대 때부터 화려한 수상 경력을 가진 작가는 돈이 되는 다른 여러 일을 하면서 우직하게 이 작품을 완성했다.

지식채널 e에서 보았던 '지붕 위 여자'를 박서련 작가는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냈다. 전반부에 남편 전빈과 주룡의 미묘한 감정선까지 제대로 짚은듯해서 정말 신기했다. 그 시대 어르신들만 아는 그런 애틋한 부부의 정?을 잘 표현했다. 서로 잘 모르고 집안이 정한 혼사이지만 차차 정을 붙여가는 모습. 이때 주룡이 더 주도적이고 더 큰 사랑을 품고 있어 좋았다. 모든 것을 거는 절대적인 신뢰와 애정.   

주룡은 어린 남편 전빈을 따라 독립군이 되었지만 솥에 강냉이를 끓여내거나 임산부로 위장해 무기를 나르는 한정된 일만 할 수 있었다. 사소한 갈등 끝에 주룡은 독립군을 나와 친정으로 갔지만 친정 잡다한 일에 치여 산다. 이후 반 년만에 남편이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의 최후를 지켜보게 된다.

슬픔에 빠진 주룡은 어이없게도 남편 잡아먹은 어쩌고 하는 흉한 소문과 함께 감옥에 갇힌다. 풀려나서 친정에서 지내다가 다른 동네로 이주해서 친아버지가 자신을 중늙은이에게 팔아넘기려 하는 것을 알게 되어 다시 홀로 떠난다. 그리고 평양에서 고무공이 되었고 투쟁의 선두에 서기까지의 장면을 지금 읽고 있다. 사료가 풍부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작가의 생생한 묘사로 마치 전기를 읽는듯하다.

 

*

살다보면 더 이상은 못하겠다,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 텍스트로, 화면으로 도피하곤 했다.

본가의 상황이나 단신부임(일본 소설 영화에서 나오는 표현, 어쩐지 주말부부보다 더 명확한 표현 같다)해 있는 남편이나 다 힘들어 보여 굳이 나까지 보태려 하지는 않는다.

그냥 니시무라 준처럼, 주룡처럼

매일 해야 할 일을 꾸준히 하는 것말고는

마땅한 수가 없다.

 


천변에 나가 빨래를 해 와서 널고, 보리방아를 찧고, 무채를 썰어 꿰어 말리고, 시간이 남아 정주간 황토 칠을 싹 새로 하고, 식구들 밥상을 올리고, 야학에 나가려는 전빈을 배웅하고, 밤불을 홧홧하게 때고, 큰할머니부터 형님네까지 문안을 돌고, 방에 들어앉아 관솔불을 밝히고 식구들 옷깃을 뜯어고친다.
이만하면 오늘도 떳떳하다.

<체공녀 강주룡> 34쪽

*

버티다 보면

겨울도 지나고

햇볕 따스한 어느 공터에서 지난 겨울에 그런 일도 있었나?

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니시무라 준같이

한 끼 한 끼 성의를 다해서 차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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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이면 조카가 백일이 된다.

감격스럽고 기쁜 날이지만

마냥 좋을 수만 없어 안타깝다.

 

정작 아이엄마는 산후우울증으로 힘들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최근에 친구가 왔다 가서 조금 기운 있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주었다.

 

이런 거 찾아볼 시간에

사실 0을 많이 붙여 계좌로 쏴주는 게 제일 좋겠지만 ㅜ.ㅠ

 

*

 

사실 나도

신생아기 꼬꼬마기에는 기쁨을 잘 몰랐다.

 

그저

어서 하루가 지나가기를

아이들 빨리 잠들기를

안 아프길

소망했다.

 

그리고 겨울이 제일 싫었다.

아이들이랑 강원도 눈 속에 갇혀 살았던 겨울

밤이면 무서운 바람소리

 

오정희, 황정은 소설집으로 버티던 시절

 

사진을 찾아보면

눈밭이나 축제장, 눈썰매장에서 웃고 있지만

그런 날들은

기실

일년 중 며칠 되지 않는다.

 

지나고 보니

그런 날들도

집에서 갇혀 지내던 날들도

참 좋았던 시절

 

물론 지나서 그렇다.

 

 

그래서 지나가다

소아과병원에서

유아 엄마들을 볼 때

참 좋을 때다, 라든가

얼마나 힘드세요,

 

이런 말은 잘하지 않는다.

 

그냥 문 잘 잡아주고

시선 마주치면 살짝 웃어주고

아이들 본연의 모습이 나오면

그냥 살짝 모른척해주고 그럴 뿐이다.

 

 

*

 

그나저나 유행하는 말 감성? 갬성?

이 뜬금없는 이모음역행동화 흉내는 왜 때문에?

 

문법에 맞지 않는 말들을 자꾸 쓰는 건

또 왜 그렇지?

 

 

 

백일 상이나 돌잔치 할 때 올려주고 싶은 시

물론 당사자들이 동의할 경우에 주는거다.

 

시 한 편의 여유가 없는 하루하루일 테니.

그저 멀리서 안타까울 뿐이다.

 

 

 

---------------------------- 

탄생 / 박현수

 

 


 

먼 길을 걸어
아이가 하나, 우리 집에 왔습니다
건네줄 게 있다는 듯
두 손을 꼭 쥐고 왔습니다
배꼽에는
우주에서 갓 떨어져 나온
탯줄이
참외 꼭지처럼 달려 있습니다
저 먼 별보다 작은
생명이었다가
충만한 물을 건너
이제 막 뭍에 내렸습니다
하루 종일 잔다는 건
그 길이 아주
고단했다는 뜻이겠지요
인류가 지나온
그 아득한 길을 걸어
배냇저고리를 차려 입은

귀한 손님이 한 분, 우리 집에 왔습니다


-------------------


별처럼 꽃처럼/나태주


별처럼 꽃처럼 하늘에 달과 해처럼

아아, 바람에 흔들리는 조그만 나뭇잎처럼

곱게곱게 숨을 쉬며 고운 세상 살다가리니

나는 너의 바람막이 팔을 벌려 예 섰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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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오은

 

1월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총체적 난국은 어제까지였습니다
지난달의 주정은 모두 기화 되었습니다

2월엔 여태 출발하지 못한 이유를
추위 탓으로 돌립니다
어느 날 문득 초콜릿이 먹고 싶었습니다

3월엔 괜히 가방을 사고 싶습니다
내 이름이 적힌 물건을 늘리고 싶습니다
벚꽃이 되어 내 이름을 날리고 싶습니다
어느 날엔 문득 사랑을 사고 싶었습니다

4월은 생각보다 잔인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한참 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5월엔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옵니다
근로자도 아니고 어린이도 아니고
어버이도 아니고 스승도 아닌데다
성년을 맞이하지도 않은 나는
과연 누구입니까
나는 나의 어떤 면을 축하해줄 수 있습니까

6월은 원래부터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꿈꾸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7월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봅니다
그간 못 쓴 사족이
찬물에 융해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때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8월은 무던히도 무덥습니다
온갖 몹쓸 감정들이 땀으로 액화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살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9월엔 마음을 다잡아보려 하지만
다 잡아도 마음만은 못 잡겠더군요

10월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책은 읽지 않고 있습니다

11월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사랑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밤만 되면 꾸역꾸역 치밀어 오릅니다
어제의 밤이, 그제의 욕심이
그즈께의 생각이라는 것이

12월엔 한숨만 푹푹 내쉽니다
올해도 작년처럼 추위가 매섭습니다
체력이 떨어졌습니다 몰라보게
주량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잔고가 바닥났습니다

지난 1월의 결심이 까마득 합니다
다가올 새 1월은 아마 더 까말 겁니다

다시 1월,
올해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1년만큼 더 늙은 내가
또 한 번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2월에 있을 다섯 번의 일요일을 생각하면
각하(脚下)는 행복합니다

나는 감히 작년을 승화시켰습니다

오은,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2013, 문학동네

 

 

----------------

 

 

어제는 생각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크리스마스였다.

블루 크리스마스.

 

그래도 이 아침에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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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8-12-27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리스마스 라는 날에 별로 의미를 두지 않지만)
저 역시 생각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던 그런 휴일이었어요.

저 시의 주인공이 마치 저 인것처럼 느껴져요.

뚜유 2018-12-28 06:07   좋아요 0 | URL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니까요.

한 해가 갈 때 사람들 마음은 다 같아지나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