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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두 사람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어릴 때 작가님 작품을 읽을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쓰실지 잘 몰랐다. 난 응팔의 성동일인 것이다. 촉이 엉망이다. 풋.
이번 작품집을 읽고 여러 작가들 이미지가 겹치기도 했지만, 당대의 현실에 밀착한 작품을 쓰려고 하신듯해서 흥미롭게 보았다. 기차에서 단번에 읽었다. 간간이 스쳐가는 풍경을 보며 나를 스쳐갔던, 내가 지나왔던 어떤 시절을 떠올리기도 하고 앞으로 내게 펼쳐질 삶도 그려지는 듯했다. (다음 단락부터 스포 주의)
<오직 두 사람>
"오직 두 사람만이 느꼈을 어둠"에 대해 담담히 서술한다. 대학교수이자 딸바보인 아빠는 부인이나 다른 가족들을 제쳐두고 생애 내내 현주에게 집착하고 그녀의 삶을 구속한다. 아빠가 원하는 전공을 택하고 아빠와 주말마다 영화를 보거나 데이트를 하고 남자친구를 만나도 대개 피상적인 만남에 그친다. '아빠 딸'로 살았던 현주와 그런 둘의 기이한 결합에서 한참 벗어나 각자 살아가는 다른 가족들. 다른 언어를 쓰는 이들은 결코 소통할 수 없다.
'딸바보'라는 용어는 어느 아나운서 공개채용 프로그램에서 지원자가 아빠한테 보낸 편지에서 처음 들었다. 그때도 오싹했고 지금도 딸바보라는 말은 싫다. 바보같은 맹목적인 몰두의 끝은 언제나 파멸이다. 다행히 현주는 한번도 살아보지 않은 삶이 기다리고 있어 허전하고 두렵긴 하지만 잘 헤쳐나가리라 다짐하며 편지의 끝을 맺는다.
<아이를 찾습니다>
오래 전 마트에서 실수, 부주의?로 아이를 잃은 부부의 황폐한 삶이 펼쳐진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부주의가 아닌 유괴로 아이를 잃었다. 그러나 친엄마로 알아온 유괴범이 사망하고 다시 그들 품으로 돌아온 친아들 성민은 자신의 뿌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이를 찾느라 가세는 기울었고 성민의 친엄마는 조현병을 얻어 아이를 돌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불운은 겹쳐 성민이 돌아왔으나 아내는 실족사하고 성민은 크고 작은 말썽을 일으킨 끝에 다른 핏덩이를 남기고 자취를 감춘다.
그토록 바라왔던 일이 일아난다면 인생이 뭔가 달라질 것 같았으나 오히려 더 나락으로만 떨어지는 인생의 아이러니.
성민이와 사귀었던 여자애가 성민이가 왜 그랬는지(여자애를 임신시키고 돈을 훔쳐 달아나버렸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하자
성민이를 비난하고 사과하는 대신 윤석은 "인간이란 원래 이해가 안 되는 족속"이라고 하며 돈을 건넨다.
그렇다. 인간은 참으로 미묘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는 존재다. 인간이라면 남의 아이를 그렇게 데려가서도 안 된다. 또 인간이라면 친부모를 원망하지 않아야 하는데 오히려 유괴범인 친엄마를 그리워하고 계속 엇나간다.
인간이, 참. 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듯하다.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느냐 하는 의미도 있고 인간이니 저럴 수도 있지 하는 체념도 든다.
<인생의 원점>
의료기기 업체 사원인 서진은 어릴 때 친했던 여자아이 인아를 만나 불륜관계에 빠진다. 어린 시절 동무를 인생의 원점이라 과도하게 포장하고 만남을 지속한다. 그러나 서진은 인아의 남편으로 추정되는 사내에게 습격을 당하고 인아를 포기한다. 이후 지속적으로 폭력 남편에게 시달리다 남편을 골프채로 후려친 인아는 서진을 불러 처리하려 한다. 피를 흘리던 남편은 살아 있었고 서진은 119를 부르라고 하며 도와주기를 거부한다. 결국 인아는 남편이 퇴원하고 나자 투신한다. 다친 남편을 인아의 또다른 내연남이 습격한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보고 서진은 인생의 원점 따위가 무엇이 중하냐며 살아남았다는 게 중요하다 되뇌인다.
반전이라면 처음에 서진을 습격한 괴한이 인아의 남편이 아닌 또다른 내연남이었다는 것!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고 세 남자 중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던 인아였다.
"행복감의 토로를 후회처럼 말하는 능력이 인아에게는 있었다. 그럴 때 그녀의 얼굴을 보면 과분한 행운을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어서 서진은 늘 헷갈리곤 했다. (중략) 관계에 대한 불안이 심한 서진으로서는 그녀의 후회하는 듯한 말투와 행복한 표정 사이의 불일치가 더 달콤했다." 88쪽
지극히 통속적인 관계에 대한 묘사와 통찰이 돋보인다. 결국 생의 중요한 시기마다 이런 관계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고 또다른 혼돈으로 이끌 뿐. 사랑으로 누가 누굴 구원한다고, 삶이 이렇게나 질긴데. 참혹하게 당한 사내 앞에서 자신의 행운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서진을 보고 인간이, 참. 하게 된다.
<옥수수와 나>
문학상을 받았던 작품. 창작의 고통을 재기발랄한 상상력을 동원해 그렸지만 나의 경험세계와 달라 크게 공감하지는 못했다. 남성작가의 로망인 것인가.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상상이라면.
<슈트>
폴 오스터 소설 같은 설정. 오래 전에 헤어진 아버지가 외국에서 여러 여인을 전전하며 살다가 유품으로 명품 슈트를 남긴다면? 그런데 정말 아버지가 아닐 수도 있다면?
우리는 모두 어떤 옷과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 사랑은 때로 매우 굳건하다. 190쪽
생면부지의 아버지의 유골은 어쩐지 부담스럽지만 확고한 브랜드의 몸에 꼭 맞는 슈트는 탐이 난다. 인간이, 참.
<최은지와 박인수>
'박인수'가 맡긴 회사를 인수한 출판사 사장이 '최은지'라는 여직원 때문에 곤경에 빠진다. 암에 걸린 박인수의 부탁으로 그의 옛사랑도 찾으러 다니고 회사마저 맡았지만 일은 꼬여만 간다.
"살아오는 동안 내 영혼을 노렸던 인간이 너무나 많았다는 거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이 갑자기 주먹을 뻗었다. 병자답지 않은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피했다.
"그렇지. 주먹이 날아오면 이렇게 잘도 피하면서 왜 영혼을 노리는 인간들에게는 멍하니 당했냐는 거야." 199쪽
이 말을 해야 할 사람은 출판사 사장인듯하다. 사람들이 그렇다고 믿는 바가 결국 진실이 되어간다. '영혼'에 타격을 입고 나서야 사장은 현실로 돌아와 그들이 믿는대로의 사람이 되어간다.
<신의 장난>
언젠가 영화 <큐브>를 보고 한동안 흰 방에 들어서기 무서웠던 적이 있다. 앞뒤 꽉 막힌 큐브에 갇힌 듯한 요즘 세대들의 암울한 현실을 풍자했다. 그들이 인생의 중요한 사건, 즉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고 하지만 사실 기회를 박탈당하는 세대 아닌가!
“정은씨, 난 언제나 현재가 내 인생에서 제일 힘든 시기라고 생각했거든요. 여기만 지나가자. 그럼 나아질 거야. 그런데 늘 더 나빠졌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나이가 어릴수록 더 행복했어요. 그럼 지금 이 순간도 최악이 아닐 수 있다는 거잖아요? 지금이 그래도 앞으로 내가 살아갈 인생에서는 가장 젊고, 제일 괜찮은 순간일 수 있다는 건데…… 우리 모두 여기서 늙어가다가는 언젠가 이런 말을 하게 될지도 몰라요. 처음 들어왔던 때가 그래도 좋았어. 그땐 젊었고, 희망도 있었다.” 257쪽
힘든 시기를 지나면서도 언제나 힘들었던 예전의 시기를 그리워하며 여기만 지나가자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를 되뇌인다. 그러나 언제나 지나가버린 것보다 훨씬 더 나쁜 것들이 그들 앞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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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을 따라가면 '깊은 상실감 속에서도 애써 밝은 표정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세상에 많을 것'이라고 했다. 나만 해도 겨우 마흔을 넘겼을 뿐인데 남에게 편하게 들려주지 못할 이야기가 늘어만 간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특별히 불운이 겹치고 겹친 것도 아닌데.
여러 단편을 가만히 따라가보면 개운하지 않다. 막막하고 답답하다. 명쾌하게 선악이나 니편내편이 나뉘는 것도 아니다. 확실한 것을 찾아 발버둥치다 모호한 채로 그렇게 흐지부지 사라져간다.
그런 게 본래 삶이고 인간이라 생각하니 씁쓸하기만 하다. 인간이,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