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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병살인, 154인의 고백 - 우리 사회가 보듬어야 할 간병 가족들의 이야기
유영규 외 지음 / 루아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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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도서관에서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을 읽었다. 희망도서로 내가 오래 전에 신청한 책인데 병간호와 기타 잡다한 업무로 분주하게 보낸 지난 두 달 동안 아무도 빌려가지 않았는지 새 책 그대로였다.

 

가족 중에 중병이나 장애로 돌봄을 지속적으로 필요로 할 경우 가족의 삶이 얼마나 뒤틀리는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잘 모를 것이다.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요양원이나 요양병원 등을 이용하는 절차나 과정도 그리 수월한 것은 아니다.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을 경우의 돌봄이나 가족 한 명이 아닌 가족 내에서 여러 명이 중복 발병할 경우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정신질환이나 치매 환자를 돌보는 가족은 환우의 폭력성으로 인해 받아주는 시설이 없어 오롯이 가족이 간호를 감내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정신보건법이 개정되면서 장기간 보호병동 입원이 어려워졌고 정신질환의 경우 보험 적용이 안 되어 치료비가 많이 드는 것도 환자 가정에게 큰 부담을 지우고 있다.

 

자신만의 시간을 낼 수 없어 본인의 건강이 심각하게 위협되고 경제활동을 할 수 없어 결국 가정 전체가 빈곤에 빠져든다.

 

무엇보다 환우 가족들의 가장 큰 고통은 이 간병의 시간이 언제까지 지속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절망으로 이어져 존속 살인이라는 극단에 달하게 되는 것이다.

 

발병한 지 6-8년 사이 환자를 하루에 8-10시간 넘게 돌보는 경우 극단적 선택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다.

 

*

신문 후속보도답게 신파 없이 있는 그대로를 담담하게 전하는데도 읽다가 몇 번이나 울컥해서 혼났다. 내 자리 맞은편에서 잘 차려입으신 연금 생활자이신 것이 분명한 아주머니 한 분이 간혹 나를 쳐다보셨다.

 

기자들이 취재를 위해 찾아왔을 때 가족을 죽인 후에도 살던 집에 그대로 사는 경우가 꽤 된다는 데에 놀랐다. 이사를 갈 경제적 여유가 없어 비극의 현장에 그대로 거주할 수밖에 없는 현실도 마음 아팠다.

 

아픈 사연들이 이어지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가정을 도울 수 있는가에 대해 끝부분에 잠시 기술했는데 각각의 가정이 필요한 돌봄을 충분히 받기에는 아직 우리 사회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듯하다.

 

선진국의 경우 가족이 간병을 맡고 있다고 할 때 비용을 지원하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가족이 간병을 할 경우 요양보호사 자격증이 있는 경우 하루 한 시간, 달에 20시간 정도 지원이 된다. 겨우 20만원 남짓인 것이다.

 

간병이 오래될 경우 회사를 휴직하거나 휴직 후 다시 복귀하는 것도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일부 직업군 외에는 그리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선진국의 경우 간병이 지속될 경우 가족이 잠시 환자에게서 벗어나 쉴 수 있는 가족휴가제가 있지만 우리나라는 치매 환자가 있을 경우 연간 일주일 정도 휴가를 쓸 수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제도가 널리 홍보되지 않았고 일주일만이라도 맡아줄 기관이 나타나지 않아 가족들은 제도를 활용할 수가 없다.

 

읽는 내내 답답하고 마음 아팠지만 참 이기적이게도 이렇게 힘든 분들도 있는데 

이제부터라도 간병 문제에 직면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동병상련'이라는 말도 잘 와닿지는 않는다.

 

의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같은 이름으로 규정한 병을 앓는다도 해도 각자의 현실이 고유하고 각자의 체력과 성품도 다르기에 서로 이해받고 공감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그래도 비슷한 아픔, 정형화된 비극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

막다른 절벽에 처한 가정이나 개인에 손을 내밀에 줄 수 있는 사회

그리고 나부터 손을 내밀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간혹 주부들 커뮤니티에 간병이 힘들다는 하소연이 올라오면

내가 하루만 봐드리고 싶네요

당장 달려가고 싶네요, 라는 덧글이 달리기도 하는데

 

진짜 찾아와주지 않아도

절박한 누군가는 순간

눈물을 닦아주는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가족이나 선한 이웃의 도움만으로 해소되지 않는 부분을 해결해주는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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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렸던 복수의 밤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성미 옮김 / 북플라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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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이나 등에 문신을 새기고 끝없이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사내를 보면 누구나 한심한 인생이라고 혀를 찰 것이다.

 

이름보다 1752번같이 수형번호로 불리는 게 편한 사내.

 

교도관은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출소하는 그에게 하루라도 빨리 안정을 찾으라고 한다. 

 

"교도관님 말씀처럼 하루라도 빨리 안정을 찾도록 노력하겠습니다."  11쪽

 

무심히 읽었던 이 대사가 전체를 다 읽고 나니 너무나 마음 아픈 결심이었음을 이제야 알겠다.

 

*

(내용 유출 주의)

 

쉰아홉인 가타기리라는 재소자는 스물일곱 살에 교도소에 처음 들어간 것을 시작으로 끝없이 범죄를 일으켜 사회와 격리되어 간다.  

 

아내와 딸과 행복한 미래를 꿈꾸던  가타기리는 사소한 시비에 휘말려 조직폭력배에게 상해를 입힌 것으로 구금되어 결국 가정을 잃는다. 그 후 가타기리는 얼굴에 커다란 문신을 새기고 기이한 범죄를 반복하며 전국의 교도소를 떠돌다 잠시 출소한 사이 공장에서 팔을 잃고 그러고도 범죄를 계속해 수감된다.

 

자신의 부인을 구하다 가타기리가 범죄를 저질렀기에 부채감을 지니고 있는 기쿠치, 한심한 아버지를 한순간 외면해 허망하게 보낸 후 가타기리에게 이끌렸던 변호사 나카무라, 가정이 와해되고 외삼촌을 아버지라 믿고 성장한 히카리, 가타기리의 삶을 파괴시킨 가지와라에게 인생을 저당잡힌 아야코,  자신의 범죄를 뒤집어쓰고 가타기리가 교도소에 간 덕에 아들의 임종을 지킨 아라키, 이렇게 다섯 사람의 시선으로 가타기리가 왜 그렇게 범죄를 반복하여 살 수밖에 없었는지 밝혀간다.

 

인생을 걸고 한 여인을 사랑했고 결국 그 여인을 죽게 한 남자를 찾아 전국의 교도소를 떠돌다 자신의 복수를 완성하고야 안정을 찾은 가타기리가 너무나 불쌍하고 한스러워서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도 한숨이 나왔다.

 

굉장히 90년대 홍콩 누아르 풍의 이야기이고 신파 그 자체다.

그런데 한 남자가 자신의 인생을 걸고 부인과 딸을 위한다는 그 자체에 매료되었나보다.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자신의 생을 파괴해야만 완성되는 사랑이라니 처절하다.

 

"좋아하기 때문에 어떤 예기치 못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의 절망감은 더욱 크지. 하지만 그런 존재가 마음속에라도 있으면 불행한 삶을 버텨나갈 힘이 되기도 해." 94쪽

 

다섯 사람이 가타기리를 대하는 시선과 그들의 내면, 표면상으로는 중범죄자이지만 그런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가타기리의 상황이 잘 그려진다.  

 

특별한 반전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반전이 있는 작품이다.

사회파 추리소설이라는 건 이런 풍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휴가철이나 후텁지근한 여름밤에 볶음우동에 맥주를 마시며 읽기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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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다리 포목점 - 오기가미 나오코 소설집
오기가미 나오코 지음, 민경욱 옮김 / 푸른숲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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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유자차와 무릎 담요가 생각나는 겨울로 가는 이 계절에 표지에 이끌려 이 책을 집어들었다. 딱 이 시기에 만나 정말 다행인 책이다. 게다가 최근에 '고양이'를 정기적으로 볼 일이 생겼다.

 

이제보니 <안경>, <토일렛>을 만든 오기나미 나오코의 소설집이네. 나온 지는 꽤 되었는데 이제야 이 책을 알아 약간 억울하다.

 

모리오

 

모리오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의 유품인 재봉틀에 애착을 느낀다. 그는 어릴 때 보았던 궁극의 꽃무늬를 찾아 '사부로 씨'가 있는 히다리 포목점을 찾는다. 그곳에서 이상적인 무늬를 찾아 무작정 스커트를 만들게 된다.

 

나는 사온 꽃무늬 옷감을 좁은 아파트 가득 펼치고 자로 치수를 쟀다. 그것만으로 방 전체가 꽃무늬에 푹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행복했다. 재단을 끝내고 앞뒤를 맞춰 컬러풀한 시침바늘을 꽂았다. 나는 재봉틀 앞에 앉아 조금 긴장한 채 바늘을 옷감에 댔다. 그리고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바늘이 리드미컬하게 위아래로 움직이며 실이 옷감을 통과했다. 다다다다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조심스럽게 스커트를 만들었다. 똑바로 재봉질이 되지 않으면 그때마다 실을 뜯고 다시 했다. 주의 깊고 조심스럽게, 나는 오로지 스커트를 만드는 데 온 정신을 집중했다.
나는 어머니의 발판 재봉틀을 마주하면서 그때까지 맛보지 못했던 평안함으로 가득 찬 시간을 보냈다. 36쪽

 

모리오는 완성된 스커트가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입을 스커트를 다시 만든다. 만들었던 첫 작품을 고쳐 재봉틀 소리에 안정을 찾는 동네소녀 카트린느에게 준다. 둘이 치마를 입고 거리를 거닐기도 한다.

 

나와 소녀는 해가 저문 길을 나란히 걷고 있다. 갑자기 소녀가 내 손을 잡았다. (중략)

소중한 무언가가 있다면 바로 지금일 것이다.

흙과 풀의 뜨뜻한 냄새, 조용히 우는 벌레 소리, 통통한 붉은 달, 땀이 살짝 밴 소녀의 손, 스커트 속으로 들어오는 여름밤의 바람. 나는 두근대는 가슴으로 하나하나를 느끼고 있었다. 73쪽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이다. 포목점의 '사부로 씨'가 실은 검은 고양이라는 것과 섬세한 남성 모리오가 어머니를 잃고 재봉틀을 돌려 치마를 만들어 입으며 치유받는 과정이 울림을 준다.    

 

에우와 사장

 

<에우와 사장>에서도 <모리오>에서와 마찬가지로 고양이를 인격체로 동등하게 대한다. 우연한 계기로 이비인후과 의사 요코와 그녀의 고양이 "나카무라 사장"과 살게 된 에우는 고양이가 가족에게 할 수 없는 말을 표현할 수 있도록 이끄는 일을 맡게 된다.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사이라는 게 반드시 최선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잠자코 있어도 서로를 아는 사이라는 것도 지나치게 사이가 좋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소중한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지만 그만큼 관계없는 사람이라면 말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그것을 듣는 것이 당신의 일입니다."

100쪽

 

잠을 열 시간은 자야 기운이 생기고 특별히 잘 하는 게 없이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던 에우는 낯을 가리는 사장과도 단번에 통했고 히다리 포목점 아주머니가 소개한 가정의 고양이들과도 소통해서 고양이들의 어려움을 잘 풀어준다. 

 

"고양이에게는 반드시 경어를 사용하세요. 고양이에게 아기말을 써선 안 됩니다. 이따금 자신의 애완동물에게 콧소리를 내며 아기를 대하듯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안 됩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착각입니다. 고양이는 인간보다 훨씬 나이를 빨리 먹는 존재입니다. 모두 듬직한 성인입니다. 아기가 아닙니다. 당신은 성인에게 아기 말을 사용합니까?" 100쪽

 

사부로 씨와 암에 걸린 나카무라 사장은 동물병원에서 조우한다. 사부로씨와 포목점 아주머니는 여기에서도 여전히 품위 있다. 사장도 역시 품격 있게 투병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느닷없이 사장이 말했다.

"낮잠은 푸르구나." (중략)

 

"어째서 암 같은 거에 걸린 거야?"

사장은 귀를 긁다 말고 에우의 눈을 물그러미 봤다.

"어쩔 수 없어. 유전인걸."

"유전?"

"전 주인도 암으로 죽었어."

"그런 걸 유전이라고는 하지 않잖아?"

"유전이야. 누가 뭐라든 유전이야. 너는 몰라. 누군가를 진심으로, 진심으로 사랑하면, 예컨대 그 사람과 피로 이어져 있지 않았더라도, 그 사람과 종족이 다르더라도 다양한 것이 옮겨져. 전염되는 거지."

"그래서 네 암도 전염되었다."

"맞아"

사장은 이불 위에서 꾹꾹이를 시작했다. 148-149쪽

 

아...꾹꾹이라니.

정말. 이렇게나 사랑스러운데 사장은 죽음을 맞는다.

죽는다는 건 결국에는 꾹꾹이를 멈춘다는 뜻이다.

그렇게나 사랑스러운 모습을 다시 볼 수 없게 된다.

 

이후 사장의 망해는 수많은 터키도라지꽃에 둘러싸인다. 요코와 에우는 무사히 장례를 치르고, 요코는 에우의 귀를 파주기로 한다. 역시 예상한 결말이고 이게 전부이다.

 

*

 

눈에 띄지 않는 소년, 소녀들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와 소통하며

하루하루 그들만의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엄청난 상실의 과정을 담담하게 그렸다.

 

이런 담담함과 섬세함, 배려가 보이는 소설류가 일본 가정식 장르라고나 할까.

좋기는 한데 굉장히 뭔가 이질적인 정서이다. 일본 가정식을 먹으러 가서 한 상 잘 받고는 아 뭔나 개운하지만은 않다, 그런 느낌.

 

그래서 별 하나를 빼고 나니 뭔가 또 허전하기도 하다.

 

그래도 이 계절에 잘 어울리는 소품.

SNS 사진발도 잘 받을 책이다.

 

사족-책을 읽고 나서 고양이 장난감 이름이 캣 댄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검색해서 어떻게 만드는지도 알게 되었다. 사지 말고 딸이랑 만들어서 시댁 꼼냥이들과 놀아주어야겠다. 책을 읽고 나니 고양이들 이름을 너무 유치하게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기연이',  기연 씨

이렇게 다시 이름 지어 부를까?

 

전남 방언 '기연히(기어코)' 다시 한다 이런 느낌으로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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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두 사람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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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작가님 작품을 읽을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쓰실지 잘 몰랐다. 난 응팔의 성동일인 것이다. 촉이 엉망이다. 풋.

 

이번 작품집을 읽고 여러 작가들 이미지가 겹치기도 했지만, 당대의 현실에 밀착한 작품을 쓰려고 하신듯해서 흥미롭게 보았다. 기차에서 단번에 읽었다. 간간이 스쳐가는 풍경을 보며 나를 스쳐갔던, 내가 지나왔던 어떤 시절을 떠올리기도 하고 앞으로 내게 펼쳐질 삶도 그려지는 듯했다.     (다음 단락부터 스포 주의)

 

<오직 두 사람>

 "오직 두 사람만이 느꼈을 어둠"에 대해 담담히 서술한다. 대학교수이자 딸바보인 아빠는 부인이나 다른 가족들을 제쳐두고 생애 내내 현주에게 집착하고 그녀의 삶을 구속한다. 아빠가 원하는 전공을 택하고 아빠와 주말마다 영화를 보거나 데이트를 하고 남자친구를 만나도 대개 피상적인 만남에 그친다. '아빠 딸'로 살았던 현주와 그런 둘의 기이한 결합에서 한참 벗어나 각자 살아가는 다른 가족들. 다른 언어를 쓰는 이들은 결코 소통할 수 없다.

 

'딸바보'라는 용어는 어느 아나운서 공개채용 프로그램에서 지원자가 아빠한테 보낸 편지에서 처음 들었다. 그때도 오싹했고 지금도 딸바보라는 말은 싫다. 바보같은 맹목적인 몰두의 끝은 언제나 파멸이다. 다행히 현주는 한번도 살아보지 않은 삶이 기다리고 있어 허전하고 두렵긴 하지만 잘 헤쳐나가리라 다짐하며 편지의 끝을 맺는다.   

 

<아이를 찾습니다>

오래 전 마트에서 실수, 부주의?로 아이를 잃은 부부의 황폐한 삶이 펼쳐진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부주의가 아닌 유괴로 아이를 잃었다. 그러나 친엄마로 알아온 유괴범이 사망하고 다시 그들 품으로 돌아온 친아들 성민은 자신의 뿌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이를 찾느라 가세는 기울었고 성민의 친엄마는 조현병을 얻어 아이를 돌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불운은 겹쳐 성민이 돌아왔으나 아내는 실족사하고 성민은 크고 작은 말썽을 일으킨 끝에 다른 핏덩이를 남기고 자취를 감춘다. 

 

그토록 바라왔던 일이 일아난다면 인생이 뭔가 달라질 것 같았으나 오히려 더 나락으로만 떨어지는 인생의 아이러니.

 

성민이와 사귀었던 여자애가 성민이가 왜 그랬는지(여자애를 임신시키고 돈을 훔쳐 달아나버렸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하자

성민이를 비난하고 사과하는 대신 윤석은 "인간이란 원래 이해가 안 되는 족속"이라고 하며 돈을 건넨다.

 

그렇다. 인간은 참으로 미묘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는 존재다. 인간이라면 남의 아이를 그렇게 데려가서도 안 된다. 또 인간이라면 친부모를 원망하지 않아야 하는데 오히려 유괴범인 친엄마를 그리워하고 계속 엇나간다.

 

인간이, 참. 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듯하다.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느냐 하는 의미도 있고 인간이니 저럴 수도 있지  하는 체념도 든다.

 

<인생의 원점>

의료기기 업체 사원인 서진은 어릴 때 친했던 여자아이 인아를 만나 불륜관계에 빠진다. 어린 시절 동무를 인생의 원점이라 과도하게 포장하고 만남을 지속한다. 그러나 서진은 인아의 남편으로 추정되는 사내에게 습격을 당하고 인아를 포기한다. 이후 지속적으로 폭력 남편에게 시달리다 남편을 골프채로 후려친 인아는 서진을 불러 처리하려 한다. 피를 흘리던 남편은 살아 있었고 서진은 119를 부르라고 하며 도와주기를 거부한다. 결국 인아는 남편이 퇴원하고 나자 투신한다. 다친 남편을 인아의 또다른 내연남이 습격한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보고 서진은 인생의 원점 따위가 무엇이 중하냐며 살아남았다는 게 중요하다 되뇌인다.

 

반전이라면 처음에 서진을 습격한 괴한이 인아의 남편이 아닌 또다른 내연남이었다는 것!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고 세 남자 중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던 인아였다.

 

"행복감의 토로를 후회처럼 말하는 능력이 인아에게는 있었다. 그럴 때 그녀의 얼굴을 보면 과분한 행운을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어서 서진은 늘 헷갈리곤 했다. (중략) 관계에 대한 불안이 심한 서진으로서는 그녀의 후회하는 듯한 말투와 행복한 표정 사이의 불일치가 더 달콤했다."   88쪽

 

지극히 통속적인 관계에 대한 묘사와 통찰이 돋보인다. 결국 생의 중요한 시기마다 이런 관계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고 또다른 혼돈으로 이끌 뿐. 사랑으로 누가 누굴 구원한다고, 삶이 이렇게나 질긴데. 참혹하게 당한 사내 앞에서 자신의 행운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서진을 보고 인간이, 참. 하게 된다.

 

<옥수수와 나>

문학상을 받았던 작품. 창작의 고통을 재기발랄한 상상력을 동원해 그렸지만 나의 경험세계와 달라 크게 공감하지는 못했다. 남성작가의 로망인 것인가.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상상이라면.

 

<슈트>

폴 오스터 소설 같은 설정. 오래 전에 헤어진 아버지가 외국에서 여러 여인을 전전하며 살다가 유품으로 명품 슈트를 남긴다면? 그런데 정말 아버지가 아닐 수도 있다면?

 

우리는 모두 어떤 옷과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 사랑은 때로 매우 굳건하다. 190쪽

 

생면부지의 아버지의 유골은 어쩐지 부담스럽지만 확고한 브랜드의 몸에 꼭 맞는 슈트는 탐이 난다. 인간이, 참.

 

<최은지와 박인수>

'박인수'가 맡긴 회사를 인수한 출판사 사장이 '최은지'라는 여직원 때문에 곤경에 빠진다. 암에 걸린 박인수의 부탁으로 그의 옛사랑도 찾으러 다니고 회사마저 맡았지만 일은 꼬여만 간다.

 

"살아오는 동안 내 영혼을 노렸던 인간이 너무나 많았다는 거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이 갑자기 주먹을 뻗었다. 병자답지 않은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피했다.

"그렇지. 주먹이 날아오면 이렇게 잘도 피하면서 왜 영혼을 노리는 인간들에게는 멍하니 당했냐는 거야."  199쪽   

 

이 말을 해야 할 사람은 출판사 사장인듯하다. 사람들이 그렇다고 믿는 바가 결국 진실이 되어간다. '영혼'에 타격을 입고 나서야 사장은 현실로 돌아와 그들이 믿는대로의 사람이 되어간다.  

 

<신의 장난>

언젠가 영화 <큐브>를 보고 한동안 흰 방에 들어서기 무서웠던 적이 있다. 앞뒤 꽉 막힌 큐브에 갇힌 듯한 요즘 세대들의 암울한 현실을 풍자했다. 그들이 인생의 중요한 사건, 즉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고 하지만 사실 기회를 박탈당하는 세대 아닌가!   

 

“정은씨, 난 언제나 현재가 내 인생에서 제일 힘든 시기라고 생각했거든요. 여기만 지나가자. 그럼 나아질 거야. 그런데 늘 더 나빠졌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나이가 어릴수록 더 행복했어요. 그럼 지금 이 순간도 최악이 아닐 수 있다는 거잖아요? 지금이 그래도 앞으로 내가 살아갈 인생에서는 가장 젊고, 제일 괜찮은 순간일 수 있다는 건데…… 우리 모두 여기서 늙어가다가는 언젠가 이런 말을 하게 될지도 몰라요. 처음 들어왔던 때가 그래도 좋았어. 그땐 젊었고, 희망도 있었다.” 257쪽

 

힘든 시기를 지나면서도 언제나 힘들었던 예전의 시기를 그리워하며 여기만 지나가자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를 되뇌인다. 그러나 언제나 지나가버린 것보다 훨씬 더 나쁜 것들이 그들 앞을 기다리고 있다.

 

*

 

'작가의 말'을 따라가면 '깊은 상실감 속에서도 애써 밝은 표정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세상에 많을 것'이라고 했다. 나만 해도 겨우 마흔을 넘겼을 뿐인데 남에게 편하게 들려주지 못할 이야기가 늘어만 간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특별히 불운이 겹치고 겹친 것도 아닌데.

 

여러 단편을 가만히 따라가보면 개운하지 않다. 막막하고 답답하다. 명쾌하게 선악이나 니편내편이 나뉘는 것도 아니다. 확실한 것을 찾아 발버둥치다 모호한 채로 그렇게 흐지부지 사라져간다.

그런 게 본래 삶이고 인간이라 생각하니 씁쓸하기만 하다. 인간이,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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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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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를 힘든 시기에 읽어냈다. 도저히 뭔가가 눈에 들어올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용케도 읽어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5.18.

정말 우리는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는 것일까?

 

각자가 쌓아온 견고한 일상이 폭압적 국가권력에 의해 한순간에 허물어진다. 그리고 한번 무너진 것은 결코 온전히 회복되지 않는다. 작가는 잔인하고 폭압적인 상황을 순결하고 정결한 언어로 그려냈다. 각 캐릭터가 품위를 잃지 않도록 언어를 얼마나 고르고 골랐는지 알 수 있었다.

 

허락이요? 물론 허락합니다. 대신 잘 써주셔야 합니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 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 p. 211

 

작가가 광주에서 산 적이 있어 공간에 대한 묘사도 훌륭했다. 다행히 나 역시 금남로, 상무지구 등을 다녀본 적이 있어 머릿속에 그려가며 읽을수 있었다.

 

내 어린시절도 80년대의 폭압적인 시대상과 무관하지 않다, 고 감히 주장해본다.  

 

전라도 시골 출신인 우리 아버지는 올림픽 열기가 막 시작되려는 86년에 짧은 생을 마감하셨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에 의한 죽음은 아닌, 정말 허망한 사고 때문이었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p.99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누가 물어보면 그냥 교통사고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 아버지는 범죄의 희생자였다. 초동수사가 허술해 30년 전 영구미제사건으로 남았다. (최근에 경찰인 친구를 통해 알아보려 했으나 기록이 폐기되었다는 답을 들었다.) 화성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나던 그 즈음이었다. 신문에 한 줄로도 나오지 않은 그런 사건이었다.

 

경찰은 수사과정에서 한 불행한 사내의 죽음과 관련해 순간 배우자를 용의선상에 올려두고 수사를 시작한다. 어떻게든 뭔가 만들어보고자 했으나 결국 증거 미비로 며칠 만에 풀려난다. 허나 아버지 부모형제들은 이로 인해 엄마를 배척하게 된다.

 

국민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한 형사에게 국밥을 얻어먹으며 엄마는 언제 귀가했고 평소 아빠와 사이는 어떠했는지 집요하게 질문을 받았다. 맞거나 위협적 상황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같은 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너무 반복하니 답이 자꾸만 달라졌다.

 

엄마는 00시에 00에서 집을 나갔니?

 

00시에 무슨 문소리를 들었니?

 

22시인지 10시인지 왜 같은지 다른지 10살이 분간하기는 너무 어려웠다. 형사는 왜 답이 다르냐고 잘 기억해보라고 중요하다고 다그쳤다. 3학년이 그것도 하나 모르냐고.

 

엄마 어디 데려 갈까봐 무서워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거짓말 하는 아이는 나쁘다고.

 

흰셔츠에, 툭 튀어나온 배, 검정 가죽벨트로 기억되는 아저씨였다. 우리 반 친구 아버지 같았고 내게 다정하게 숟가락을 쥐어 주었다. 깍두기와 뿌연 국물과 알루미늄 오봉이 흐릿하게 떠오른다.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 p. 134

 

엄마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모들은, 외삼촌들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들었다. 당시 여대생이었던 이모는 한 경찰관이랑 노래방(순간 노래방이 그 시기에 있었을까 가라오케였나, 호프였나 잠시 딴생각을 하긴 했다)에 갔고 오토바이를 타고 그자의 등에 매달려 집에 왔다고 한다. 삼촌은 정강이를 딱 한번 맞았는데 죽도록 때린 건 아니었다고 한다. 다만 00 경찰서 쪽으로는 오줌도 안 눈다고 하셨다.

 

다들 격앙된 어조로 때로는 차분한 어조로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어. 다, 잊자 한다.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 p.79

 

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5월에 어떤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엄마의 간곡한 부탁으로 내 결혼식에 친가쪽 사람들을 보고 이후 처음 온 연락이었다. 뜬금없는 안부인사로 시작되었으나 아버지가 남긴 땅을 우리가 제때 등기이전을 안해둔 탓에 지지부진한 다툼이 있었다.  

 

아예 개념 자체가 다른데 말이 통할리가! 그분들의 시계는 엄마가 30대이고 내가 열 살이던 때에 멈춘듯했다. 남편 잡아먹은 여자와 어린 여자애들에게서 자신들의 땅?을 가져가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는듯했다. 특히 가장 집요한 분은 이사 간 외가에까지 따라와 엄마 머리채를 잡고 우리에게 모진 말을 했던 친척이라 상대하다보니 거친 말이 오갔다. 전화를 끊고 나서 손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땅을 그냥 달라는 게 아니라며 푼돈?을 제시하고 아버지 산소에도 못갈 거라고 소송해서 땅을 찾을 거라고 악다구니를 쓰고 어릴 때 맺힌 걸 아직도 못 잊고 그런다, 사납다 등등

 

이때 내가 정말 생뚱맞게 그리 오래되었는데 오일팔이 잊히던가요? 라고 했다.

 

그분은 그제야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너네 일이 어찌 그거에 비교되냐.

그때는 그냥 그런 시절이었어.

 

고심 끝에 전화를 수신차단했다. 법무사를 찾아가 상담을 받다 수수료가 아까워 물어물어가며 등기 이전을 마쳤다.

 

오일팔 기념식에 갈까 아주 잠시 고민하다 그곳은 어쩐지 너무 멀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일처리를 하다 기념식 생중계는 보지 못했다. 그러다 오후 뉴스를 보았는데 대통령이 유족을 안아주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53년생으로 알고 있던 우리 아버지는 사실은 52년생이고, 나는 유족도 아니다. 그래도 한동안 코끝이 찡해서 서재에서 나오지를 못했다.

 

밥하러 나오니 애들이 또 나쁜 할아버지 전화 받았어 한다.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로 가, 꽃 핀 쪽으로.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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