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계절이면 전에는 그 유명한 <러브레터>를 보곤 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남극의 셰프>를 보게 될 것 같다.

 

첫 장면부터 심상치 않다.

 

가도가도 끝없는 눈밭.

무슨 일이 있는지 몰라도 한 대원이 이탈하려고 한다. 그러자 모두가 포기하지 말라며 기운을 북돋우며 끌고 와서는 고작 마작을 재개한다. '마작' 팀 정식 명칭은 '중국문화연구회'

 

*

남극 대륙 한참 깊은 곳에 ‘돔 후지 관측 거점’, 통칭 ‘돔 기지’가 있다. 이 돔 후지 관측 거점은

해발고도 3,800m, 평균 기온 영하 57도, 최저 기록 영하 79.7도로 세계에서 가장 혹독한 관측

지대이다. 오죽하면 펭귄, 바다표범은 물론 바이러스조차 생존할 수 없다.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만 좋다.

 

이곳에 통신 담당, 차량 담당, 설빙기상학자, 연구원, 전담 의사, 요리사 등 총 8명이 파견되어 함께 일하고 쉬고 먹는 소소한 일상이 펼쳐진다.

 

극지방이니 만큼 엄청난 스펙을 자랑하는 인재들이 모여 있지만, 현실은 기다리고 기다리는 지루한 날들이 이어질 뿐이다. 가족과 떨어져서 단신 부임하는 데서 오는 외로움과 애인과 헤어지는 실연의 고통도 나오지만 그래도 잔잔하고 가끔 피식 하게 되는 그런 분위기이다. 

 

영화 후반부에 돔 기지와 통신 연결된 아이가 기대에 차서 남극이니 펭귄은 있나요? 바다표범은 있나요? 하고 물으니 꾀죄죄한 아저씨들이 "우리들이 있지요" 라고 답해서 제일 크게 웃었다.

대장이 몰래 라면을 훔쳐먹다 바닥이 나서 니시무라 준이 수제 라면을 개발했을 때 모두가 감동하며 먹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진짜 행복해 보였다. 대장은 늘 나의 몸은 라면으로 이루어져있다고! 하고 외치던 사람이니.

모두가 일생에 한번쯤은 꼭 보고 싶어하는 오로라이지만 극지방에선 오로라보다 오직 라멘. 이런 오로라는 관측하기 힘들다고 하면서도 결국 라멘이 불을 것이 걱정되어 식탁으로 발길을 돌린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모두가 외쳤던 에비후라이. 일본에서와 같은 새우튀김을 생각하며 사람들은 셰프에게 에비후라이를 외쳐대는데 만화에나 나올 법한 왕새우라서 모두가 황당해한다.

 

극지방에서의 관측과 연구보다 니시무라 준이 요리하는 과정이 더 세세하게 나온다. 힘겨운 상황에서 오직 셰프의 요리와 소소한 장난들이 그들을 지탱하게 해준다.

영화 말미에 대원들이 일본으로 돌아가서 하고 싶었던 일들을 챙겨 꼭 하는 것을 보고 흐뭇해진다.

니시무라 준은 가족들과 소소한 일상을 즐기며 정말 그곳에 갔다오기는 한 걸까, 하고 중얼거린다. 거짓말처럼 이전과 비슷한 일상이 펼쳐진다. 놀이동산에서 패스트푸드를 맛보며 '맛있엉' 하고 감격. 역시 뭐니뭐니 해도 남이 해준 건 다 맛있음.  

찾아보니 원작 에세이도 있어서 책으로도 보고 싶다.

 

*

<체공녀 강주룡>은 금요일에 빌려서 읽기 시작했다. 역시나 명성대로였다. 이미 십대 때부터 화려한 수상 경력을 가진 작가는 돈이 되는 다른 여러 일을 하면서 우직하게 이 작품을 완성했다.

지식채널 e에서 보았던 '지붕 위 여자'를 박서련 작가는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냈다. 전반부에 남편 전빈과 주룡의 미묘한 감정선까지 제대로 짚은듯해서 정말 신기했다. 그 시대 어르신들만 아는 그런 애틋한 부부의 정?을 잘 표현했다. 서로 잘 모르고 집안이 정한 혼사이지만 차차 정을 붙여가는 모습. 이때 주룡이 더 주도적이고 더 큰 사랑을 품고 있어 좋았다. 모든 것을 거는 절대적인 신뢰와 애정.   

주룡은 어린 남편 전빈을 따라 독립군이 되었지만 솥에 강냉이를 끓여내거나 임산부로 위장해 무기를 나르는 한정된 일만 할 수 있었다. 사소한 갈등 끝에 주룡은 독립군을 나와 친정으로 갔지만 친정 잡다한 일에 치여 산다. 이후 반 년만에 남편이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의 최후를 지켜보게 된다.

슬픔에 빠진 주룡은 어이없게도 남편 잡아먹은 어쩌고 하는 흉한 소문과 함께 감옥에 갇힌다. 풀려나서 친정에서 지내다가 다른 동네로 이주해서 친아버지가 자신을 중늙은이에게 팔아넘기려 하는 것을 알게 되어 다시 홀로 떠난다. 그리고 평양에서 고무공이 되었고 투쟁의 선두에 서기까지의 장면을 지금 읽고 있다. 사료가 풍부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작가의 생생한 묘사로 마치 전기를 읽는듯하다.

 

*

살다보면 더 이상은 못하겠다,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 텍스트로, 화면으로 도피하곤 했다.

본가의 상황이나 단신부임(일본 소설 영화에서 나오는 표현, 어쩐지 주말부부보다 더 명확한 표현 같다)해 있는 남편이나 다 힘들어 보여 굳이 나까지 보태려 하지는 않는다.

그냥 니시무라 준처럼, 주룡처럼

매일 해야 할 일을 꾸준히 하는 것말고는

마땅한 수가 없다.

 


천변에 나가 빨래를 해 와서 널고, 보리방아를 찧고, 무채를 썰어 꿰어 말리고, 시간이 남아 정주간 황토 칠을 싹 새로 하고, 식구들 밥상을 올리고, 야학에 나가려는 전빈을 배웅하고, 밤불을 홧홧하게 때고, 큰할머니부터 형님네까지 문안을 돌고, 방에 들어앉아 관솔불을 밝히고 식구들 옷깃을 뜯어고친다.
이만하면 오늘도 떳떳하다.

<체공녀 강주룡> 34쪽

*

버티다 보면

겨울도 지나고

햇볕 따스한 어느 공터에서 지난 겨울에 그런 일도 있었나?

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니시무라 준같이

한 끼 한 끼 성의를 다해서 차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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