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지나고 나서 영화를 처음 보게 되었다.

소문보다는 별로 세지 않았다. 그냥 주위에 있을 법한 에피소드들.

 

전형적인 고부 갈등.

독립영화계의 '사랑과 전쟁' 맞다.

널리고 널린 소재.

 

그러나 시가에 잠시라도 발길을 끊고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내 아들도 볼 수 없다고 당차게 선언하는 며느리는 아직 많지 않다.

 

초반의 이 당돌한 선언이 나오기까지 원인 제공자인 진짜 평범한(?) 시어머니의 횡포에 한숨이 나왔다. 결혼하기도 전에 일터에 전화를 해서 고양이를 키우면 결혼할 수 없다고 하고 조리원에 있는 며느리에게 전화를 하다가 하도 안 받으니 조리원에 방송이 울려 퍼지게 했다는 데에서 머리를 절레절레.

 

그런데 이 정도는 사실 지역 육아카페에서 펑 사연(속이 답답해 썼다가 나중에는 껄끄러워 지우는 사연)으로 널리고 널렸다. 며칠 전에도 조회수 엄청 높은 게시물에서는 시아버지가 부부끼리 놀러갔는데도 수시로 영상통화를 수십 통이나 남겼다는 사연을 보고 절레절레.

 

도대체 왜 평범한 인간관계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들이

왜 가족관계에서는 허용되고 묵인되는지.

 

사지 멀쩡한 어른들이 여럿이어도 왜 늘 음식장만과 설거지는 그중 서열이 낮은 여성의 몫인지.

 

물론 난 물음만 가득하고 어느 모임에 가든 그냥 일을 자처하는 편이다.

어느 정도는 체념했고 싸워 나가기에는 용기가 없는 그런 사람이라.

 

*  

 

흥미롭게 모든 현상을 보기만 한다.

왜 저 사람들은 저런 대화를?  저런 행동을 하지.

 

그리고 나는 어떻게 내가 이런 심리 상태가 되었고

내 상황에서 내가 편한 길은 어떤 것인지 궁리한다.

 

이번에는 그냥 남편에게 명절 당일 아침 7시에 가고 싶다고 했고

가서 손님 대접, 설거지를 하고 오후에 돌아왔다.

 

이렇게 간단한 것이었다.

구구절절 설명 없이.

 

나는 이제 잠은 그래도 집에서 자고 싶고, 너무 오래 시가에 머무는 것이 싫다.

너무 오래의 기준은 "나와 아이들의 기분, 상태"

 

삼십 분 거리에 살지만 어머님은 몇박 몇일 자고 갔으면 하신다는 것을

나는 알기는 한다.

 

그래도 이제는 다 들어드리기는 어렵다.

 

*  

 

오랜 부부간 불화로 시숙은 부인을 동반하고 명절에 오지 않는다. 이번에는 다행히 관계를 회복해 형님이 오려고 했는데 시숙이 막았다고 한다. 형님이 오면 시숙은 형님 처가에도 가야 하는데 그건 싫다고.  코메디가 따로 없다. 물론 두분만의 역사가 있으니 함부로 판단하지는 말아야겠지.

시숙에 대한 내 감정은 그냥 별로 좋지 않구나. 이런 것을 확인했을 뿐이다.

 

어머님은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분이시고 시집살이 시키는 것과 거리가 먼 분이다. 그렇지만 나는 첫 명절에 어머님 친구분 댁에서 한나절 동안 만두를 남의 집 것까지 오래오래 빚은 적이 있고, (며느라기 시절이라 바보같이 힘드니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못했다) 가끔은 여자 집이 더 기울어야 남자가 기 펴고 산다는 류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래서 너 데리고 왔을 때 어려운 집 아이라 좋았다고(아버지가 안 계신 우리집 상황을 빗대어ㅎ)

 

그리고 십오년 동안 명절에 가도 내가 마실 수 있는 커피류는 발견되지 않아 늘 싸들고 들어간다. 아들 셋과 손주들 취향은 단번에 파악해 늘 종류별로 구비되지만 이번에도 커피 사두는 걸 깜박했다는 머쓱한 고백을 듣는다.  엄청나게 비싼 것도 아닌 맥심 종이봉지 믹스일 뿐인데.

 

서운하기보다는 그냥 그 정도가 며느리에 대한 감정인가 싶다. 옛어른들의.

 

나 역시 어머님을 온전히 헤아리기에 부족한 사람이고 그런 관계이기에,

사람 자체로 만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니기에, 적절한 수준의 평화를 유지한다.

 

 

*

 

갈등을 보여주다가 마지막에 어떤 계기로 부인이 마음을 돌려 시가에 다시 가게 되었는지 명확히 나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하고픈 메시지는 강요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스스로 마음을 먹었을 때 시가에 갈 수 있어야 편한 마음이 된다는 것이다.

 

 

시가에 가까운 이곳에 내려와 살면서 강요 아닌 강요를 접하다 이제 어느 정도는 접점을 찾았지만 그래도 마음이 불편한 순간이 자주 있다.

 

나는 이 불편한 마음을 오래 들여다 볼 것이고

내가 불편하지 않는 선에서 행동할 뿐이다.

 

 

나는 어머니에게는 그냥 며느리일뿐이고

며느리로 잘 기능해야 사랑받고 인정받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나에게

그 사랑과 인정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내가 어머니께 해드린 것보다

늘 분에 넘치게

충실하게

늘 되돌려주신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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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9-02-12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에서 두 번째 문단.... 제가 옮겨가서 간간히 써 먹고 싶은 그런 문장이예요.
그래도 되나요? 뚜유님?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아침부터 심쿵한 글을 읽고 여러 가지 생각이 막 스쳐가네요.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해요^^

뚜유 2019-02-12 15:27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잘 봐주셔서 감사해요.
명절 보내고 영화 보고 나서도
사실 이렇게 글을 쓰고도 개운하지만은 않더라고요.
이렇게 세게? 말해도 되는 건가, 하고 수정하려고 들어왔는데
심쿵하다고 해주셔서 감사해요 ~

어찌 되었든 누가 뭐라고 하든
나의 감정과 생각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 요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