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장 해결될 수 없지만 무척이나 마음 쓰이는 일들이 주변에 일어나고 있다.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다면 덩달아 일상의 활기를 잃고 만다. 집도 어수선해서 세탁소 옷걸이가 아무데나 널려 있어 그걸 밟고 넘어져 다치기도 했다.
그리고 책으로 도피, 이야기로 도피.
분명히 나보다 불행한 사람들이 널리고 널려 있다고 해서
엄살은 이제 그만일까?
남의 불행을 보며 위안 삼는 걸 그만두어야 하지만,
현실 속 인물이 아니라면 그래도 이해받을 만한 사안일 것일까?
그냥 복잡한 생각을 잠시 멈추고 싶었다.
그럴 때는 장르물이 제격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작년 즈음부터 많이 읽었다. 새로 나오면 어떤 건 읽어보고 싶지만 소장은 잘 하게 되지 않는다. 두번 읽게 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어제도 어김없이 새벽에 깨서 거의 단숨에 <살인의 문>을 다 읽었다. 찍어내듯이 다작하는 히가시노 게이고도 역시 하루키같이 체력이 좋은 분이다. <살인의 문>은 2003년 작품인데 이제야 소개되나보다.
사회파추리소설답게 <살인의 문>은 흥미로운 인간의 심리를 그려낸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도 이건희같은 사람들이 부자인 건 용납하면서 동네 부자는 참아주지 못하는 그런 일그러진 마음을 가지고 있다.
죽음을 맨 처음 의식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이다, 라는 문장으로 소설이 시작된다.
동네 유지이자 치과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다지마 가즈유키는 경제적으로는 풍요롭지만, 가정 안에 마음 둘 곳이 없다. 노쇠한 할머니는 집안의 우환이고 간병 문제로 부모는 자주 다툰다.
학교에서 조용히 지내던 가즈유키는 가난한 두부 가게 아들 구라모치 오사무를 만나 어울리게 되면서 이상한 기운을 느낀다. 행운의 편지와 비슷한 부류의 '살(殺)'이 새겨진 엽서를 23통이나 받기도 하고 이후 할머니의 죽음, 부모의 이혼, 치과의사였던 아버지의 몰락으로 가즈유키는 자신이 저주에 빠졌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후 가난한 동네로 옮겨가 수영장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다시 오사무와 조우하면서 가즈유키는 원하는 것이 있을 때(주로 여성)마다 오사무에게 빼앗긴다. 초등학교 때의 저주 엽서도 오사무의 소행으로 밝혀지고 오사무는 수상한 일들(주로 사기)을 벌일 때마다 가즈유키를 끌어들여 계속 그의 앞길을 방해한다. 번번이 구라모치 오사무에게 당하면서 가즈유키는 속으로 구라모치에 대한 살의를 키워가지만, 실행에 이르지 못하고 악연을 이어간다.
1권 중반부터 과연 내 인생에도 저런 악연이 있을지 돌아보았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기도 하지만 이제 와서 다 부질없다. 언제부터인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미운 사람들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미운 사람들이 정말 싫어지는 그 요소들이 다 내 안에 이미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책을 다 덮고 나름 반전을 접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든다.
오사무는 물론 희대의 비열한 사기꾼이고 거대 악이지만 가즈유키 역시 5학년 때부터 스스로 바르지 않은 방향으로 인생의 선택을 지속해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보고도 할머니 지갑에서 몰래 돈을 빼오고 오사무와 어울렸던 때부터 하나하나 어긋나기 시작했다.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악이란 대단히 그럴듯한 어떤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데서 나온다. 성찰하지 않고 행동하면서 가즈유키의 삶은 점차로 무너져갔다.
그래도 가즈유키만 몰아세우기에는 오사무의 악행이 너무나 지독해서 엄연히 같이 악을 저지른 적도 있는 가즈유키를 변호하게 된다는 게 요상하다.
구라모치 오사무가 어딘가 있을 법한 인간이라서 더 그럴까. 주변 모든 인맥을 철저히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동원하는 그런 부류들이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저런 악연을 세상 살며 안 마주치길 바랄 뿐.
가즈유키는 늘 당하고 나서 삶의 방향을 다시 잡고 하는데 그때마다 오사무가 나타나 훼방놓는 순간 독자에게도 살인의 문이 열린다고나 할까.
사회파추리소설이라 일본사회의 문제, 다단계나 노인 대상 사기 과정 등도 잘 드러난다. 일본이 겪었던 사회 문제를 우리가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요즘 우리 지역에서는 사이비 종교가 극성이다. 시내에서 젊은아이들이 잘 차려입고 포교에 열중하는 것을 보면 슬프다.
*
화요일에 동네 북카페에서 <개인주의자 선언> 속의 아픈 사연들도 드문드문 읽었다.
그리고 드디어 읽게 된 <아무튼, 스웨터>
이 시리즈를 좋아하는데 그냥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대충 서서 보게 된다. <아무튼, 스웨터>만 정독했다. 어릴 때 외할머니가 떠주신 스웨터의 색감이 기억났다.
터키블루 스웨터
나란히 네 벌.
당시 큰아들과 큰딸이 동시에 힘든 일을 당해 친손주, 외손두 도합 네 명, 미취학과 국민학교 아이들을 돌보며 가게일도 하시면서 스웨터를 네 벌이나 떴던 외할머니께 경의를 표한다. 그중 내가 제일 커서 나만 금색사가 섞인 오렌지빛 카디건도 받았었지. 어린 마음에 할머니는 아들이자 친손주만 예뻐한다고 여긴 적이 있었는데 내가 아이들을 키우고 보니 새삼 그 시절의 할머니가 대단해 보인다.
그리고 대학 다닐 때 겨울마다 입었던 여러 스웨터들도 떠올랐다.
호감 가는 분이 있어 엄청 신경 써서 스웨터랑 그 안에 받혀입을 조화로운 셔츠도 골라 입고 나갔건만 집에 가다보니 스웨터 아래로 내복이 비어져 나와 있어 지하철 유리문에 머리를 박았던 흑역사도 떠오른다.
아이를 낳고 기르며 스웨터의 까슬한 감촉 때문에 잘 입지 않게 되었고 최근에 점차 살이 오르며 니트류는 포기하게 되었다.
스웨터가 잘 어울리는 여리여리 체형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이제 힘들듯하고
겨울상품 세일 시기에 현재 내몸에 어울리는 풍덩한 멋스러운 베스트나 한번 잘 골라보아야겠다.
*
아무튼, 도피.
행복은
어떤 만족은 강도보다는 빈도에서 오는 것.
잡다한 책을 읽고 마음 속 깊은 근심보다 가벼운 고민을 말할 수 있는 이들과 차를 마셨다.
판공성사에서도 말을 줄이고 줄여 간단히 고하고 오래 기도하고 침잠하기로 마음먹었다.
행복이란, 온천물에 들어간 후 10초 같은 것. 그러한 느낌은 오래 지속될 수 없기에, 새해의 계획으로는 적절치 않다.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을 바라다보면, 그 덧없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쉽게 불행해진다. 따라서 나는 차라리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 이를테면 ‘왜 만화 연재가 늦어지는 거지’, ‘왜 디저트가 맛이 없는 거지’라고 근심하기를 바란다. 내가 이런 근심을 누린다는 것은, 이 근심을 압도할 큰 근심이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이 작은 근심들을 통해서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계획은 없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