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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가 잠든 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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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어가 잠든 집>은 과히 한국판 '마더'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강렬한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추리소설 계열은 아니고 <편지> 같은 계열의 휴먼 드라마 같은 분위기이다.

 

뇌과학 분야의 회사를 경영하는 가즈마사와 그의 아내 가오루코는 가즈마사의 외도 때문에 별거 중이었다. 곧 이혼을 앞두고 있고 각자 일상을 보내던 중에 그들의 딸 미즈호가 호텔 수영장에 빠져 의식불명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의사는 부부에게 미즈호의 상태를 말하고 장기 기증 의사를 묻는다. 부부는 고심 끝에 장기 기증을 결심한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딸의 손을 잡은 순간, 미세한 움직임을 느낀 듯하여 딸을 포기하지 못하고 이혼도 보류하며 누워 있는 상태의 딸을 위해 혼신을 다한다.

 

첨단 뇌과학 분야의 회사를 경영하는 가즈마사는 인공호흡기 대신 AIBS라는 기계를 쓰게 하고 특수한 장치로 근육을 움직이게 하는 기계를 써서 뇌의 작용이 없이도 딸을 움직이게 한다. 그렇지만 기계로 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어 가오루코가 친정엄마와 함께 24시간 아이 상태를 세세히 살핀다. 그 결과 아이는 일반 뇌사 상태의 환자들과 달리 건강하게 잠들어 있는 듯이 보인다.

 

자신의 인생도 포기하고 그렇게 해서라도 아이를 보고 싶은 '가오루코'의 심정도 이해된다. 하지만 엄마가 누나에게만 매달리는 동안 남동생 이쿠토의 마음은 곯아만 갔다. 가오루코는 아들의 생일 잔치를 하는 날에도 아들의 심정보다는 아들친구들에게 누워 있는 딸이 기계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줄 생각에 들떠 있었다. 움직이는 것만 보여주면 아들친구들이 누나를 이유로 따돌림을 하지 않을 거라는 비정상적 사고에 빠졌던 것이다. 성장과정에서 줄곧 상처받았던 이쿠토는 실은 생일잔치에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다.   

 

가오루코는 미즈호에게만 빠져들어 자신의 인생, 남은 가족의 인생에도 마음을 쓸 여력이 없었다. 여러 사건을 겪고 나서 꿈결인듯 미즈호가 나타나 진정한 작별의식을 치르고 나서야 딸을 떠나보내게 되었다.

 

소설 초반부에 실은 '뇌사 판정'이라는 용어가 장기 기증을 염두에 두고 나온 표현이라는 데 놀랐다. 살아 있는 이의 장기를 함부로 적출할 수 없으니 뇌사 판정은 진짜 엄격하게 시간 차를 두고 여러 번 행해지고 있었다. 장기 기증을 기다리는 사람은 너무나 많은데 기증자는 적으니 해외로 나가 기증을 받고 오기도 한다. 소설 중반부에 난치병과 장기 기증에 관한 여러 물음이 등장한다.

 

생명의 가치와 돈의 문제.

결국 난치병에 걸리면 살아남을 수 있는 쪽은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뿐이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라도 해외에 나가서 이식을 받고, 그 지역 가난한 이들은 또 막연하게 기증자를 기다려야 한다.

 

평소에 장기 기증을 막연하게 필요한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와 가족의 문제로 닥치면 의연하게 결정할 수 있을까?

 

가즈마사 부부같이 막강한 경제력이 있다면, 혹은 기술이 발달하는 요즘이라면 일말의 희망을 품고 기다릴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세계의 여러 사례를 보아도 장기간 뇌사였다가 기적적으로 깨어난 일은 없다고 한다. 일부는 신체가 자라는 현상이 보여도 진정한 회복은 아니라고 한다. 사고를 당하기 이전의 상태가 될 확률이 거의 없다면 남은 가족은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할까?

 

미즈호는 들판에서 네잎클로버를 발견하고도 자신은 이미 충분히 행복하니 다른 사람을 위해 두고 가겠다고 말할 정도로 심성이 고운 아이였다. 그런 아이라면 아마도 부부의 결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며칠 전에 우연히 어떤 기사를 보게 되었다. 호텔수영장에서 사고를 당해 뇌사 판정을 받은 아이의 가족이 장기 기증을 결정했다는 이야기였다.  가족여행 사진 속에서 너무나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큰아이와 같은 학년이라 그런지 더 오래 마음에 남았던 차에 우연히 이 책을 읽게 되어 그런지 여러 생각이 스쳐간다.

 

인생에서 큰 불행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 이후의 수습은 어찌해야 하는 것인지 묻는 이야기였다.

 

삶과 죽음의 순간을 누가 정하는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받아들이고 애도할 수밖에 없는 남은 자의 시간을 지켜보는 이들은 그들을 충분히 기다려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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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 늘리는 법 -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다 땅콩문고
박일환 지음 / 유유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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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하나

요즘은 일주일에 두 번 학교에 나가고 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대하다 보면 아이들이 하루에 쓰는 단어가 몇 개 되지 않아 놀라곤 한다.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에도 짜증나, 화나, 힘들어, 지루해 등등 다양한 표현이 있지만 극혐(애들말로 그켬)으로 압축된다. 저희들끼리 비난할 때는 '인성 쓰레기네' 로 요약된다.

 

# 장면 둘

카페에서 대화가 들린다. 비루한 몸뚱이가 어쩌고.

'비루하다'는 사전적으로

 (鄙陋--) [비ː루하다]

 [형용사] 행동이나 성질이 너절하고 더럽다.

 

돌아보니 출산 후 몸이 다들 좀 불었겠으나 천하고 너절하고 더러운 정도는 아니다. 온라인상에서 뜻도 모르고 재미 삼아 자주 쓰다 보니 여기저기 다 비루해졌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한때는 '비루하다'라고 온라인에 자주 쓴 적이 있다.

 

무한도전에서 자막으로 퍼뜨린 말 '육덕지다'도 소설 등에서 육덕이 크다, 육덕 좋은 식으로 쓰였다.

 

육덕 (肉德)[육떡] 

[명사] 몸에 살이 많아 덕스러운 모양.

 

예능에서 쓰는 어감과 약간은 다르지만 육덕지다까지는 내 기준으로는 봐줄 수 있다. 하지만

백종원 씨가 퍼뜨린 '고급지다'는 어딘가 불편하다.

 

 

<어휘 늘리는 법>에는 언중들의 다양한 언어 현상에 대한 고찰이 담겨 있다.

 

1. 현대인은 아이어른 할 것 없이 어휘가 빈곤하다.

책을 읽을 시간도 사람들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시간도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저 예능에서 쏟아내는 말초적인 자극적 표현에 길들여져 있다. 누가 더 세게 독하게 재미있게 말하나 겨루고 있다.

 

청소년의 어휘력이 부족하게 된 이유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예전에 흔히 볼 수 있었던 물건이나 풍경, 관습이 사라지거나 어휘 자체가 바꾸니 탓도 있을 테고, 한자 교육 비중이 낮아져서 한자로 된 개념어를 익힐 기회가 적었을 수도 있다. 반면에 청소년일수록새로 생겨난 말에 대한 적응력은 무척 높은 편이다.        20쪽

 

 

책을 읽는 동안 한국사회 전체의 문해력이 높기는 하지만 중장년층의 어휘력이 빈곤하다는 통계에 많이 놀랐다. 학교를 졸업하면 책을 잘 읽지 않고 지식의 변화 주기가 빠른 사회라 장년층 이상에서 그 속도를 따라가기 쉽지 않다. 아이들이 어휘가 빈곤하다 타박하는 나도 새로 만들어진 말이나 기술용어 등에 취약하다.

 

2. 어휘가 중요한 이유는 일차적으로 어휘가 지식 습득의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말을 배우며 단어를 물어가며 폭발적으로 사고를 확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교직생활 이후로 글을 쓰는 필자답게 그간 문학작품에서 접한 다양한 어휘를 소개하고 있다.

 

삽상하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마음이 아주 상쾌하다, 라는 뜻의 형용사를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밖에도 대하소설에 나오는 다양한 우리말 표현이 소개되어 있다.

 

아무래도 요즘에 학생들은 자연이나 전통문화에 대한 단어를 영단어 외우듯 수능을 위해서 공부하는 경우가 많다. 김소월, 백석의 시를 읽다보면 학생들은 도무지 무슨 소리이고 왜 아름다운지 모르겠다고 하는 경우가 많아 씁쓸하기도 하다. 많이 접해보지 않아 낯설고 어색한 탓일게다.

 

3. 자신만의 어휘를 만들어 써도 좋다.

자신만의 어휘라는 건 사전에는 없지만 내가 만들어내어 주변과 쓰면서 뜻이 잘 통하게 된 말이다.

 

우리 아이들이 말을 배울 때는 자신들이 만든 신기한 단어를 많이 쓰곤 했다. 새우깡이니 감자깡이니 하는 스낵류를 먹을 시기에 '자갈치'를 접하고서 이건 왜 '문어깡'이라고 안 하냐고 했었다.

 

메일이나 문자 메시지를 쓸 때면 저는 항상 엎드립니다. 정말 엎드리는 것은 아니고 마지막에 제 이름을 쓴 다음 '엎드림'이라고 썼어요. (중략) 앞에 소개한 김상득 씨의 경우 '엎드림'이라고 보냈더니 그걸 본떠서 '일으켜 세움' 또는 '마주 엎드림', '더 납작 엎드림' 같은 말을 사용해서 답신을 보내온 이가 여럿 있었다고 한다.           79-80쪽

 

유쾌한 장면이다.

이처럼 나만의 어휘를 만들어 지인들과 나누었던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연애할 때 별칭을 짓는다거나 친구들 이름을 형용사로 활용하는 경우를 떠올려보니 빙그레 미소 짓게 된다.

이름이 미정인데 지각을 자주 해서 친구들 사이에서 참 미정미정거린다, 고도 했었는데.

 

4. 우리말의 풍부한 자산 지역말, 방언을 스스럼없이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단어를 그 지역 상황에 맞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유정의 동백꽃은 실은 강원지역에서는 노란 빛이 도는 생강나무 꽃을 뜻하며 김동인의 감자도 1920년대에는 고구마와 감자를 한데 섞어 감자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이 지역에 와서 5년을 살았는데도 사람들은 내 말투만으로 여기 분 아니죠, 라고 한다. 내가 아무리 여기 오래 산다 해도 '느자구'라든가 '귄있다'를 상황에 맞게 살려 쓸 자신은 없다. 제일 적응이 안 되었던 말이 '-하시게요'였는데 명령이 아닌 극존칭이었다.  

 

강원도 사람들은 '뼝대' 혹은 '뼝창'이라는 말을 쓴다, 표준어로 하면 절벽이나 벼랑에 해당하는 말인데, 뼝대와 절벽은 같은 말이긴 하지만 귀에 와 닿는 느낌이 다르다. 강원도가 산간 지역이라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어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작접 가서 험한 산세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    99쪽

 

아이들 어릴 때 잠시 강원도에 산 적이 있는데 북한말 억양과 낯선 어휘에 당황한 적이 간혹 있었다. 그러나 강원의 지형을 표현하기에는 그 지역 말만한 것이 따로 없을 것이다.

 

5. 번역어, 사회적 어휘 자산 늘리기 관련한 장에서는 일본 난학자들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며 많은 어휘를 새로 만들어 쓰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래도 일본의 어휘를 그대로 차용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는 점이 아쉽다.

 

6. 습작기 소설가들은 간혹 사전을 외우기도 한다. 그러나 일상에서 자신만의 어휘를 늘리려면 여러 책 특히 문학작품을 많이 읽어서 늘리는 편이 낫다.

 

여기에 덧붙여 책을 읽기만 하는 것으로 한계가 있는듯하다. 어릴 때 책에 한참 빠져서 뭔가 남들이 안 쓰는 말 어른들이 쓰는 말, 문어체를 그대로 일상에서 쓴 적이 있다. 담임선생님이 편찮으시면 '정양을 잘 하시고' 이런 식으로 말했으니 얼마나 이상하게 보였을까.

 

한정된 분야의 책을 읽기보다는 여러 계층, 여러 연령대의 사람들과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휘를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회화 학원에서 영어로 말할 때 무슨 뜻이냐고 묻고 답하고 했듯이 국어생활에서도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   

 

*

번외로

야민정음, 급식체에 대한 생각도 뭉게뭉게.

 

요즘 유행하는 야민정음, 시각적으로 표기가 비슷해 보이는 글자를 다른 글자로 바꾸는 놀이를 한글 파괴라고만 볼 것이 아니라 창의적인 언어 유희 방식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귀엽다를 '커엽다'라고 하는 것이나 멍멍이를 '댕댕이'라고 하는 정도는 봐줄 수 있고,

너무 암호같은 것은 사실 꺼려진다.

 

 

어찌 되었든 간에 국립국어원, 국어 규범에만 얽매이는 언어생활이 아닌 창의적이고 풍부한 언어생활을 위해서는 자신이 자주 쓰는 말, 주변의 언어에 대한 꾸준한 관심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얇지만 여러 면에서 언어생활을 돌아볼 수 있는 책이었다.

 

어휘가 풍부한 것도 좋지만 상황에 맞게 적재적소에 정확한 단어를 쓰려면 별도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연유로 앞으로 글을 읽고 쓸 때마다 사전을 자주 찾아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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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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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은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나오게 된 배경을 보다 직접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삶과 철학에 대해 알 수 있는데 소설과 삶이 일치하는듯해서 더 마음 아팠다.

 

잠시 살았던 강원도 한 면 소재지에서도, 지금 살고 있는 대도시의 공단 지역에서도 결혼 이민여성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자신이 속해 있던 공동체의 언어와 문화를 잃고 '문맹'이 되어 낯선 곳의 언어와 문화를 익히며 살아낸다. 자신을 배척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 어떻게든 듣고 읽고 말하고 쓰려고 한다.

 

나는 5시 반에 일어난다. 아기를 먹이고 옷을 입히고, 나 역시 옷을 입고 공장까지 나를 데려다주는 6시 반 버스를 타러 간다. 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공장에 들어간다. 공장에서는 저녁 5시에 나온다. 나는 어린이집에서 딸아이를 찾고, 버스를 다시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마을의 작은 가게에서 장을 보고, 불을 피우고(아파트에는 중앙난방이 들어오지 않는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를 재우고, 설거지를 하고, 글을 조금 쓰고, 나 역시 잠을 잔다. 87-88쪽

 

힘겹고 치열했던 시기를 담담하게 서술해서 더 슬펐다. 작가의 또다른 작품 <어제>의 토비아스를 통해서도 이 시기를 짐작해볼 수 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말하거나 쓸 때에는 엄청난 제약이 따른다. 끝없이 문법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서 수식어나 미묘한 어감의 차이를 보이는 동사나 형용사를 적절하게 구사하는 것은 사치이다.

 

내가 프랑스어로 말한 지는 30년도 더 되었고, 글을 쓴 지는 20년도 더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이 언어를 알지 못한다. 나는 프랑스어로 말할 때 실수를 하고, 사전들의 도움을 빈번히 받아야만 프랑스어로 글을 쓸 수 있다. 52-53쪽

 

 

나는 태어날 때부터 프랑스어를 쓰는 작가들처럼은 프랑스어로 글을 결코 쓰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쓸 것이다. 112쪽

 

프랑스어로 쓰는 것, 그것은 나에게 강제된 일이다.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한 문맹의 도전. 113쪽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는 이런 상황에서 완성되었다. 또한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글을 써야 하는 숙명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한 것은 물론 충분한 성찰이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녀의 작품에서는 전쟁의 경험과 이방인으로서의 절절한 외로움이 언제나 장황하지 않게 있는 그대로 표현된다.

 

우리는 작가가 된다. 우리가 쓰는 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은 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쓰면서. 103쪽

 

아이와 함께 외국어를 배우고 장시간 육체노동을 하면서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썼다. 네살에 이미 글자를 배워 닥치는 대로 읽었고 어떤 언어로 쓰였든 간에 문장이 일으키는 감각에 매료된 사람이라 가능했을 것이다.

 

작가가 적은 문장들이 나에게 환기시키는 감각, 나는 그것에 일찌감치 매료되었다. 문장은 작가의 것이었지만 감각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으니까. 조용한 도서실의 한구석에서 책을 읽고 있노라면 활자들은 일렁이는 물결처럼 내 안을 흔들어놓았고 때로는 파도처럼 밀려와 나의 조그만 세계를 여지없이 부수었다.    116쪽

 

 

짧은 분량이고 그동안 그녀의 작품을 꾸준히 읽어온 독자라면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지만 읽고 나면 자꾸 질문을 하게 된다.

 

모국어 외에는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언어가 없지만 익히 알고 있는 그 모국어마저 제대로 쓰고 있는가, 하는 고민도 된다.

 

뜻도 모르고 장황하게 남들이 쓰는 상황에 의지해 쓰거나 시류에 편승하는 오염된 언어를 쓰고 있지는 않은지 그런 염려가 든다.

 

사전에서 단어를 하나하나 찾아가며 상황에 맞는 표현을 고르고 또 골라가며 정갈하고 단순하게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삶이 곧 쓰기인 작가를 만나면 뭔가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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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김보통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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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만자>, <D.P. 개의 날>로 유명한 만화가 김보통 님이 대기업 사원, 백수, 습작기를 거치는 과정이 담담하게 담겨 있다.

 

평생 제대로 된 직장에 다니지 못했던 작가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좋은 대학에 가서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한다. 작가는 아버지의 원을 쫓아 그리고 어느 정도는 자신의 바람대로 대기업에 입사해 한동안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불합리한 조직문화, 비인격적 대우에 질려버린다.

 

다들 회사 밖은 늑대나 이리가 출몰하는 곳이라고 겁을 주지만, 실은 안온한 그곳에서 양들은 털을 밀리며 그렇게 버티는 것이었다.

 

김보통은 회사를 관두고 무작정 따뜻한 데를 찾아 오키나와에 머문다. 그곳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을 것이라 생각하나 큰 성과는 없었고 돌아와서 퇴직금으로 작은 도서관을 해보려다 여러 현실적 문제에 부딪친다. 아마 제도적으로 도움을 받아 도서관을 열었다 해도 잘 되었을지는 모르겠다.

 

트위터에서 사람들 프로필을 무작정 그려주는 일을 하다가 최규석 작가와 연이 닿은 데부터 성공신화?가 시작된다. 김보통 님만의 소박한 그림체로 300여 명의 얼굴 사진이 나오는 페이지를 폈을 때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결말이 해피엔딩이라 다행이지만 인생을 건 모험, 도박이었다.

누군지 무척 궁금한 잘나가는 영화감독인 친구의 말도 쓰라리게 다가왔다. 어떤 패가 있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다 보여야 한다는 것.

 

다행히 보통의 패는 그 시점에서 적중했다.

 

행복하지는 않지만 불행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그런 마음으로 묵묵히 오다가 이른 길이었다.

 

그런데 정말 평범? 보통? 인 사람들에게 이런 길이 펼쳐질지는 미지수이다. 작가는 그래도 학창 시절에 선생님이 주시할 정도로 그림에 재능도 있었고 지겨웠다고는 하지만 대기업에서 4년이나 버티었던 근성? 도 있었다.

 

그래도 노력하면 나처럼 된다, 는 식이 아니라 담담하게 이렇게 지내다 어쩌다 잘 되었네요, 하는 투라서 잘 읽었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백수였는데 오늘부터 만화가라고 소개하는 부분에서 찡했다.

 

인터뷰에 항상 고독이 탈을 쓰고 그랬는데도 김보통 치면 대기업 00이 연관 검색어로 뜬다. ㅋ

 

만화 그리기보다 사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을 제일 좋아하고 고용을 늘리기 위해 어시를 더 쓰고 자신이 하는 말의 거의 반이 뻥이라는 작가를 오래 지켜보아야겠다.  

 

그때

다행히 아직도 불행하진 않다, 면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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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도 걸어도 쏜살 문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박명진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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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나 일본이나 비슷한 문화권이어서 가족의 풍경마저 같은 것일까?

 

신기할 정도로 <걸어도 걸어도>에서 묘사하는 가족들이 오랜만에 만났을 때의 정경은 같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쌓아온 시간 속에서 서로 데면데면해졌고 작은 불평 불만을 자식들에게 내비친다.

 

어머니는 다 먹지도 못할 먹거리를 무리해서 장만하고 뿌듯해하고 자식들은 온갖 불평을 하면서도 먹어치운다. 어렸을 때의 일화를 이야기하는데 서로의 기억이 어긋나 있어 그게 또 많이 서운하다.

 

아버지는 한창 일에 빠져 살던 젊은 때처럼 가족들과 관계 맺기에 서투르고 무게 있게 보이길 원한다.

 

형제들은 서로 사는 처지나 형편이 다르고, 부모의 관심과 남은 자원을 두고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소설의 화자와 화자의 누이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막강한 대상을 두고 있다. 바로 아버지의 대를 이어 의사가 되었고 막 그 꿈을 펼치려 하던 때에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고 죽은 의인이자 영원불멸의 이상적인 아이인 준페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준페이와 연관되어 있고 준페이만이 고귀하다. 차남인 료타는 오래 전 죽은 형의 방은 고요히 잘 보존되어 있는데 자신의 방은 온갖 잡동사니가 쌓인 창고가 되어버린 데에 크게 실망한다. 어릴 때의 총기가 엿보이는 작은 일화들도 부모님의 기억 속에는 형의 것으로 되어 있다. 료타가 아이를 하나 둔 미망인과 결혼한 것을 알고도 아버지는 무신경하게 아이 딸린 여자는 결혼이 힘들다고 말해버린다. 악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형 준페이가 죽은 후 그의 형수가 재혼하여 잘 산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나와버린 실언이다. 이런 식으로 대화는 자주 어긋난다.

 

형의 기일에 전에 형이 구해준 아이였던 요시오라는 청년이 찾아온다. 아버지는 고도 비만에 프리터에 불과한 요시오가 자신의 귀하디 귀한 아이 준페이 대신 살아가는 게 못마땅하다. 물론 아버지도 모든 생명의 값은 동등하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다만 그 동안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억울하고 분하고 슬픈 감정을 저렇게 표현하는 것인데 료타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비인간적이고 냉혈하게만 보여 한참 훈계를 늘어놓는다.

 

가끔 가까운 노인 분들과 이야기하다보면 저렇게 멍한 순간이 많다. 티브이를 보다가 장애인이 나오거나 힘든 분들이 나오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든가 할 때. 

 

살아오면서 쌓인 이런저런 감정이 친밀한 사이에서는 어떤 포장 없이 바로 배설이 되어버린다. 내가 어떻게 보일까를 크게 의식하지 않는 사이이다 보니 가끔 막말, 폭언 수준의 대화가 오고간다. 그래서 가장 상처받게 되는 관계는 어쩌면 가족 안에서의 관계가 아닐까.

 

언제나 예의를 차리고 늘 사람들을 거리를 대하고 만나는 편인 나도 본가에만 가면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 않는 말, 할 수 없는 말들을 무신경하게 내뱉는다.

 

모든 질문은 그저 독촉으로 여겨지고 사소한 불만은 내게 가해지는 혹독한 평가로 여겨져 늘 마음이 불편하고 잔뜩 날이 서서 결국 서로를 베어버린다.

 

 

*

형의 성묘를 갔을 때 노랑나비가 따라오고 집 안에서도 나비가 날아들자 엄마는 형 준페이의 현신(現身)이라 여기고 요란하게 동요한다.

 

이것도 우리집이랑 비슷하다. 어디선가 새가 날아들면 늘 돌아가신 아버지가 보러 온 거라고 하고 나는 그런 엄마에게 늘 면박을 준다. 엄마랑 아빠는 생전에 그다지 사이가 좋거나 하지 않았어라든가 아버지 살아계셨어도 우리가 부자로 살 리는 없어라든가 하면서.

 

그로부터 상당히 긴 세월이 흐른 것 같지만,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이라든가 지금이라면 좀 더 이렇게 했을 텐데라든가......이제 와서 그런 감상에 젖을 때가 종종 있다. 그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시간과 함께 가라앉아서, 오히려 흐름을 가로막는다. 잃어버릴 것이 많았던 하루하루 속에서 한 가지 얻은 것이 있다면, 인생이란 언제나 한발 늦는다는 깨달음이다. 체념과도 비슷한 교훈일지도 모른다.  10쪽

 

소설을 읽는 내내 나직이(류준열 배우 목소리로) 여러 문단들이 마음에 박혔다. 

 

*

아들 친구들이 와서 오렌지망고청을 타주고 다시 이어서 쓴다.

 

극적인 사건이라고는 장남 준페이의 이른 죽음이 다이고 대개 소소한 일화들로 채워진다. 우리 누구나 한번쯤은 가족과 보냈을 그런 시간들로 채워진다. 가족은 이런 것이라든가 가족애는 이래야만 하는 것이다, 가 아닌 가족이라는 관계로 얽힌 풍경을 보여준다.

 

걸어도 걸어도 조각배처럼

나는 흔들리고

또 흔들려 당신 품 속으로  137쪽

 

소설에서는 엄마와 료타의 다감한 추억이 얽힌 노래 가사인데

영화에서는 사연 깊은 노래로 나온다.

 

엄마의 영화 속 대사로 미루어보아 

남편이 젊은 시절 잠시 한눈을 팔았고

밤늦은 시간에 그를 찾으러 아이를 업고 나가 엄마는 이 노래를 듣게 된다.

 

한창 어린 아이들과 말 그대로 독박육아 중에

일을 핑계로 나간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나 정겹게 이 노래를 부르는 걸 듣게 된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가끔 이 사연 많은 노래를 들으며 원한을 달래는 엄마가 애처로웠다.

 

가족이 있다고 해도 

가끔은 이렇게 혼자 숨어서 듣는 노래가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이제는 알 수 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내가 느끼는 감정을 같이 느끼고 같이 아파해줄 수는 없다.

그저 지켜볼 수 있는 정도이다.

 

책을 읽고 나면 여러 가지 회한에 답답하고 묵직하고 썩 개운하지만은 않다.

 

그래도 그냥 다 이렇게 살아가는구나, 살아내는구나, 

나만 비정상은 아니구나 하며 살짝 마음이 놓이는 구석도 있다.

 

완벽하게 이해받고 따뜻하고 정의로운 그런 관계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위태위태 흔들흔들하며 너무 멀어지지만 않게 그렇게 나아가는 거다.

시간이 주는 무게를 견디고 이토록 험한 세파를 같이 헤쳐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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