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막바지에 아들이랑 이런 책들을 보고 있다.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좋은 책들이다.
<35년> 중 2권을 읽고 있다. 한국사 시험 볼 때보다 더 자세히 나온다. 여러 단체와 인물들, 분열이 마음 아프다.
그리고 변절자들. 조선이 독립할 능력이 없어 자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궤변들을 늘어놓기도 하고 밀정으로 수십년 활약하며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한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얼마 전에는 수업 자료를 찾다가 일제강점기와 관련된 다큐를 보았다. 회관에 80대 할머니들을 찾아가 어릴 때 기억나는 노래를 물으니 기미가요와 일본 노래들을 정확히 기억하고 불러주셨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너무나 정확해 소오름.
난 어느 정도 식민지 세대로부터 떨어져 있다고 여겼는데 어릴 때 향유하던 모든 하위문화 역시 일제 강점기로부터 온 것이었다. 퐁당퐁당, 학교 종이, 여우야여우야, 꼬마야꼬마야 등이 일본 노래 번안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우리집에 왜 왔니- 같은 꽃찾기 놀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까꿍 놀이 다 일본에서 온 것이었다. 쎄쎄쎄나 푸른하늘 은하수 같은 손유희 역시 일본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즐기는 놀이였다. 7-80년생 여아들의 대표 놀이인 고무줄 놀이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고무줄을 뛰며 부르는 노래들 역시 거의 일본 노래를 번안한 것이었다.
일본총독부가 비석치기, 투호 같은 우리 전통놀이를 금지하고 학교에서 조직적으로 자기네 놀이를 전파해서 전통놀이라 할 만한 건 이제 어디 체험장이나 가봐야 체험할 수 있다.
말과 역사, 전통 문화를 파괴해 우리 정신을 잃게 하려고 치밀하게 통치질서를 구축한 일제가 실로 무섭다. <말모이>를 지난 일요일에야 보았는데 일제 35년간 말을 잃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보아야 할까. 예상되는 스토리였지만 <증인>에 이어 이런 착한 영화를 또 보고 싶었다. 아역들도 귀엽고 의젓하게 연기 잘하고 윤계상, 유해진도 역시 자기 역할을 다 해주었다. 다 보고 나니 조선어학회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든다. 실존 인물은 누구인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찾아보는 기쁨을 뒤늦게 누리고 있다. 전공 시간에나 잘 배워두지. ㅎ
돈이 안 되는 ? 아니지 돈이 되게 살리지 못한 내 전공이지만 그래도 이젠 좋다. 어느 학교에나 흔하게 있는 전공이고 늘 맞춤법 공격을 받게 하는 전공이지만, 우리말을 평생 배워간다는 건 적어도 나한테는 의미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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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이들이 일본놀이든 우리나라 놀이든 잘하지 않고 사춘기 고학년에 이르면 게임으로 대동단결된다. 아들이 부쩍 다른 아이들 따라 피씨방도 가고 싶어한다. 친구들 하고 있을 때만 게임하기로 한 나름 착실한? 아들인데도 너무 누워 있어 자주 구박하게 된다.
<당신의 아들은 게으르지 않다>를 미리보기로 보고 고학년 사춘기 아들을 위해 희망도서로 신청해 꼭 읽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딸아이는 엄마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척척 알아서 자기 일?을 한다. 이런 상황이니 내가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아들을 못 미더운 시선으로 보고 있는 걸 아들도 느낄 것이다.
아들을 지금보다 더 이해하고 믿어주어야 할 시기이다
방학에 독서록에 쓴다고 다시 찾은 시집들이다.
<쉬는 시간 언제 오냐> 늘 봐도 흐뭇하다. 아들은 올해 여기 말로 유강년이 된다. 벌써 유강년이라니 정겹기 그지없다. 항상 니가 시방 유강년이 된다냐 소리에 아들이 대체 유강년이 뭐길래 하고 얼굴을 찌푸린다.
딱 아래의 시에 나오는 상황과 같다.
소수의 나눗셈
풀기도 힘들고
짜증도 났지만
교육의 의무를 위해
하였다.
이태훈 (장내초등학교 6학년)
재미없는 6학년
6학년 언니 오빠들
응원도 재미없게 하고
서 있는 것도 귀찮아 한다.
역시 6학년은
다컸나 보다.
강은비(장곡초등학교 5학년)
이 시집 통틀어 가장 눈에 띄는 시는 <지루한 날>이다. 김진영 학생 정말 순간을 잘 포착했다. 왜 아버지들은 술만 들어가면 아이들과 때아닌 정체성 논쟁을 하는지 ㅋ 한 시간이나 시달리고 나서야 겨우 풀려난다.
지루한 날
아버지가 술 드시고 오신 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지금 시간은 밤 10시
니가 누구냐?
저는 진영이입니다.
진영이가 누구냐?
아빠 아들인데요.
아빠 아들이 누구냐?
진영인데요.
드디어 아빠가 주무신다.
지금 시간은 밤 11시
나한테는 이제
자유가 온다.
김진영(소양초등학교 3학년)
<마리카의 장갑>을 소소하게 잘 읽고 <옥상에서 만나요>를 보고 있다. <보건교사 안은영>을 읽다 포기했는데 <옥상에서 만나요>는 잘 읽고 있다. 첫 단편 44가 좋았다. 웨딩드레스에 얽힌 사연을 통해 현대 결혼의 의미를 무겁지 않게 짚어보고 있다. 위트 있는 대사들과 있을 법한 기발한 상황들. 흥미롭게 보고 있다.
표지도 예쁘고 내용도 고운 <마리카의 장갑>이었으나 읽다가 성인이 되고 결혼하는 과정에서 뜨개가 필요하다면 난 아마 중도 탈락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나를 보면 다 칭찬인지 뭔지 모르겠으나 뜨개 같은 거 잘하게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20여년 전 가사 시간에 이미 인증 받은 똥손. 누군가가 입을 만한 조끼를 떠오는 게 숙제였는데 하다 하다 안 되어서 미래의 아이를 입힐 조끼라고 엄청 작게 떠간 기억이 난다. 기념으로 둘 것을.
그때그 시절엔 당연히 아이는 무슨, 하고 버려서 아쉽다.
개학
뭔가요? 무슨 학문인가요?
오긴 오나요, 하며 지냈는데
방학이 끝나간다.
그간 가끔은 왜 이렇게 느슨하냐고 애들을 몰아붙이기도 했는데
책 보고 클레이하고 영화 보고 학원도 가고
하루하루 조용히 분주하게 지냈다.
우리들 다 게으르지 않았다.
그리고 또 방학인데 좀 게으르게 지내면 어떤가.
똑같이는 다시 오지 않을 방학이기에
잘 쉬어갔으면 그걸로 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