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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개
이외수 지음 / 동문선 / 1989년 5월
평점 :
절판
*89년 초판으로 나온 [들개]를 읽고 난 후 느낀 소감입니다.
[들개]의 후기에서 이외수 씨는 자신의 작품을 '이해'하려 혹은 이론적으로 분석하려 들지 말아달라고 말한다. 웃기는 건 그 후기 바로 앞에 문학평론가 두 '분'의 비평이 실려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한자어가 난무하는 매우 '분석적인' 비평이 말이다. 그 비평들의 논지는 충분히 수긍할만한 찬사이다. 일관되게 순수성(그리고 반문명적인 메시지)을 추구해온 이외수 씨의 노고는 분명 한국 문학사에 있어 의의 있는 부분일지도 모른다. 또한 그의 유려한 문체는 그에게 대중적인 인기뿐만 아니라 '글을 잘 쓰는' 작가로서의 명성도 가져다주었다.(하루키의 댄디즘을 모방하는데 급급했던 90년대 한국 문학계를 생각해보자. 다른 건 둘째치고 일단 '글을 잘 쓰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우리 작가들에게 있어선, 대단한 찬사이다.)
다 인정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나름의 비판을 하고 넘어가야겠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들개]에 대해서 작가 자신이 허락하듯 욕설로 도배를 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욕이나 줄창 하고 넘어가면 될 것을, 굳이 그렇게 하지 않고 이렇게 formal하게 글을 쓰고 앉아있는 것은, 먼저 위에서 언급한 그 고상한 비평들이 찬사로 가득차있다는데 대한 거부감 때문이 아니라, 그 비평가 양반들이 응당 읽어냈어야 할 것을 읽지 못한데 대해 '그들이 알아들을만하게' 비난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길게 말해 무엇하랴. 사실 그 비평들조차 책의 초판이 나온 89년에 쓰여졌을테니 말이다. 그렇다, 사실인즉슨 89년에 쓰여진 이 [들개]라는 소설은 2004년을 살아가고 있는 적어도 '나'라는 한 사람의 독자에게 있어서는 참을 수 없으리만큼 고리타분한 소설인 것이다.
먼저, 15년 전의 소설에 대해 촌스럽다고 욕하는게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외적인 이야기부터 하자. 그래, 15년의 갭이 가져오는 이 작품의 전반적인 유치함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아니, 노력중이다.) 개인적으로 유미주의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tilt를 가지고 있는 나이지만, 그 주제를 풀어내는 내러티브에 있어서 느껴지는 유치함 내지 naive함 역시도 세대차이라고 생각하고 못 본 척하고 말자. 그의 유려하다는 문체도, 위트 있는 문장들도, linear한 플롯이 몰고 오는 지루함을 커버하기엔 역부족이었다는 사실도, 국문학도도 아닌 나의 읽기 능력이 부족했던 탓이라고 생각하자.
자, 그럼 내적인 이야기를 하자. 한마디로 요약해서, 이외수는 소설지망생인 여주인공(이하 그녀)에 대해 매우 불순한 사상을 투사하고 있다. 그녀는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며, 그 속에서 오직 문학만을 자신의 길로 결심하고는 대학도 때려치고 창작에 매진하게 된다. 그러나 당장 먹고 살 돈이 없는 그녀는 노숙자(라기보다는 불법점유자)로 살면서 애지중지하는 책도 팔고, 별 수 없이 몸도 판다.(그녀 자신의 생각 - 사실은 이외수의 생각 - 과는 달리 그녀의 행위는 분명히 성매매이다.) 여기까지는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사치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나름대로 그녀의 생활상 및 정신상태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 문제는 여기부터다. - 그녀는 불감증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녀는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즉 돈 한 푼 없고 불법점유자인 주제에 예술은 하고 싶어하는 한 화가(이하 그)를 만나게 된다. 처음엔 그녀는 물론 그에게 끌리지 않는다. 그럴 여유가 없다는게 정확한 표현이리라. 그러나 곧 그의 작품에 끌리게 되고, 결국에는 그라는 인간(좋은 말로는 예술가의 영혼)에게 매료되어, 그에게 '모든 것'을 바치게 된다. 몸도, 마음도, 돈도, 음식도 등등등. 그러던 그녀는 우연히 바다를 보게 되더니만, 모종의 각성을 하게 된다.(이외수 씨의 반문명 내지 자연에의 경도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때마침 그는 필생을 바쳐 그리고 있던 그림을 완성하기 직전에 이르고, 오랜만에 그녀의 몸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sex를 통해 그녀는 '육체의 쾌락'에 눈을 뜨게 되고, 그는 그림을 완성하고는 죽는다.
[들개]를 읽지 않은 사람이 이 글을 여기까지 읽으면 대부분은 욕부터 나오는게 당연하리라 여겨진다. 그러니 이 소설을 직접 끝까지 읽은 내 기분은 대체 어떻겠냔 말이다. 유미주의를 그녀의 육체적 각성과 교묘하게 꿰어맞춘 이 소설의 말미는 내게 극도의 거부감을 가져왔다. 요컨대 남자 화가의 정욕이 '예술을 위해서'라는 미명하에 여자 소설가 지망생의 몸에 제멋대로 투사되는 모습이, 그야말로 역겨웠다. 이외수는 예술이라는 이름을 빌려서(그것도 하필 '예술'이라는 이름 말이다!) 여성을 유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의미에서 유미주의의 테제를 '남용'하고 있다. 이 남용이라는 단어는 유미주의의 어의와 모순되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유미주의의 어의적 의미에 탐착하자면, 의식주의 욕구로부터는 초연하되 성욕은 주체하지 못하는 쓰레기 같은 화가를 어떻게 예술가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이것은 당연히 지극히 개인적이며 근거도 없는 입장이지만, 나는 sex에 제의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혐오한다. 대개 그런 제의의 주체는 남성이요, 대상은 여성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외수 자신이 그 들개 같은 화가와 자기 자신을 암암리에 동일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을 숨길 수 없다. 그래서, 사실 그다지 좋아해본 적도 없긴 하지만, 나는 이외수가 매우 싫어져버렸다.(2004.7.23. f.y.)